역사 ,세계사/아메리카....

《과테말라, 침묵의 기억들》

구름위 2014. 9. 1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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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내전

 

원주민의 국가

 

면적이 한반도의 2분의 1인 과테말라는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인구는 중미에서 가장 많다. 과테말라는 마야문명의 발상지로서 전체 인구 중 55%가 원주민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페루와 함께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의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다. 독재정권, 쿠데타와 반정부 투쟁, 미국의 개입, 커피와 바나나의 재배 및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단일경작 등 과테말라의 정치, 경제적 후진성은 다른 중미국가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1931년에 호르헤 우비코 정권이 등장하여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했다. 그는 도로, 병원 등의 건설로 낙후된 경제 하부구조 및 위생환경 개선에 주력하는 한편 1936년 미국과 호혜통상조약을 체결했고, 엘살바도르 및 온두라스와는 국경문제를 해결하여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연합국 측에 참여하여 과테말라 내에 미 공군기지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국립경찰을 창설하여 여러 정치세력을 감시하도록 했으며, 모든 정치적 소요사태의 발생을 철저히 봉쇄했다. 그러나 선거조작을 통해 장기집권의 기반을 구축했던 우비코 대통령은, 1944년 장기 집권과 정치적 부패에 반대하는 군과 학생들이 주도한 반정부 투쟁으로 집권 14년 만에 축출되었다.

 

민주주의의 붕괴

 

독립 이후 100여 년 동안 과테말라 정부는 일부 대지주, 군인 및 외세 등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4년, 85%의 전폭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레발로 베르메호는 집권 후 노조의 결성과 파업권을 인정하는 노동법을 제정하고,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인을 위한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는 등의 개혁을 펼치면서 국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후 1950년, 하코보 아르벤스가 공산주의 세력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정치적 자유는 물론, 언론, 출판 및 결사의 자유까지 보장했다. 하코보 아르벤스는 먼저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대토지 소유주의 농지를 유상 몰수하여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는 당시 과테말라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연합청과회사(United Fruit Company)의 대규모 바나나 농장을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이처럼 미국인 소유의 많은 토지와 자본이 과테말라 정부에 의해 몰수당하고 공산주의자들이 개혁노선에 적극 개입하는 양상이 나타나자, 미국은 과테말라의 개혁정책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미국은 먼저 1954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열린 미주회의에서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지지를 받아 과테말라의 사회주의적인 개혁정책을 종식시킬 것을 결의했다. 이는 미국이 과테말라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문제해결에 한계를 느낀 미국은 과테말라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했다. 미국은 1954년, 소련제 무기가 아르벤스 정부에 제공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중앙정보국(CIA)과 미 해병대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은 반군을 앞세워 과테말라를 침공했다. 그리고 같은 해 과테말라시티를 전폭기로 공격해 아르벤스 정권을 붕괴했다. 이로써 지난 1945년부터 10년간 지속되었던 과테말라의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말았다.

 

과테말라 내전

 

미국의 개입으로 아르벤스 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에 취임한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는, 공산주의자들과 급진적인 민족주의 세력들을 제거했다. 이 과정에서 9,000여 명이 희생되고 1만여 명이 망명했다. 그리고 아르벤스 정부가 수용했던 토지를 미국인 소유의 회사들에게 환원했다. 또 1956년에 헌법을 새로 제정하여 모든 좌익정당들을 해산시키고, 반정부 세력을 더욱 심하게 억압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억압적이고 반동적인 정치체제를 다시 구축하는 과정에서 아르마스는 1957년에 암살당했다. 이로써 과테말라 정국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아르마스가 암살된 후, 과테말라에서는 군사정권과 게릴라 집단 간의 대결이 계속되었다. 미국의 보호하에 등장한 군사정권은 사회주의 세력의 일소는 물론, 노동운동과 야권의 정치활동까지도 탄압했다. 이에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 세력들은 게릴라 단체를 결성하여 미국대사와 독일대사를 암살하는 등 반정부 투쟁을 계속해나갔다.

 

1970년대 들어서 게릴라 세력이 줄어들고 온건한 개혁노선을 지향하는 여러 정당세력이 부상했다. 그러나 1979년 니카라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함으로써 과테말라에서는 또다시 게릴라의 반정부 투쟁이 격화되었고, 이에 대한 정부의 진압도 강경해졌다. 1981년에는 게릴라와 정부군 간의 격전으로 약 1만 1,000명이 사망하였다.

 

과테말라 내전으로 인해 경제는 여전히 낙후되어 있었다. 전체 국민의 반 이상이 1차 산업에 종사하고, 그중에서도 농업부문이 국내 총생산의 25%, 수출과 수입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2차 산업 부문은 중미 전역에서 가장 큰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조업이 국내 총생산에 기여하는 비율은 15.7% 정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1980년대 이후 과테말라가 해결해야 했던 가장 큰 문제는, 경제성장에 따른 부의 분배와 반정부 게릴라 단체인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과의 협상이었다.

 

《과테말라, 침묵의 기억들》

 


노벨 평화상 수상자 리고베르타 멘추.
노벨상 위원회는 마야 원주민의 인권보호에 앞장서 온 마야 원주민 출신의 인권운동가 멘추에게 199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과테말라는 지난 1960년부터 1996년까지 36년 동안 20여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는 내전의 고통을 겪었다. 이 기간 동안 100만 명이 외국으로 탈출했다. 1996년 대통령에 당선된 중도 우파의 아르주 이리고옌 대통령은 좌익반군 대표와 직접 만나는 등 반군과의 평화협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인권유린과 부정부패가 줄어들도록 많은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과테말라 정부는 좌익반군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36년간에 걸친 내전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과테말라 정부는 군 병력을 줄이며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새롭게 시행하고, 인권유린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또한 원주민에 대한 과거의 인권유린 사실을 시인하고, 마야 원주민의 종교, 언어, 관습 등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

 

'진실위원회'라 불리는 '유엔 역사규명위원회'는 과테말라 정부군과 좌익반군 사이에 맺어진 평화협정의 일환으로써, 내전 당사자인 정부군과 좌익반군의 만행을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이 위원회는 2년 동안의 조사를 마치고 《과테말라, 침묵의 기억들(Guatemala : Memoria del Silencio)》이라는 방대한 양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1960년부터 1996년 평화협정 체결까지 36년간 마야 원주민 등 20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고, 이 중 15만 명은 살해되고 5만 명이 실종되었으며 사망자의 93%가 정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유엔역사규명위원회' 위원장은 "정부군의 만행은 분명히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며 계획적인 전략이었다. 정부군은 반군을 추격하면서 마야 원주민 사회를 철저히 없앴으며 주거지와 가축, 농작물을 파괴했다. 정부군은 마야 원주민들이 '내부의 적'이며 게릴라들의 '실제적이거나 잠재적인 지지 기반'이라 간주하고, 마야 원주민들을 최대한 많이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정부군이 미국이 제공하는 돈과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1992년 노벨상 위원회는 인권운동가인 마야 원주민 출신의 리고베르타 멘추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함으로써, 과테말라 정부군의 인권유린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우리는 민중봉기의 우려에 너무 집착하는 나머지 우리의 양심을 억누르고 있다. 살인이건 고문이건 행하는 주체가 우리고 대상이 빨갱이라면 괜찮다는 식이다···. 과테말라 군부가 그런 짓들을 저지르도록 우리가 부추기지 않았느냐, 라는 역사의 질문에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는 1968년 피터 바키 과테말라 주재 미국 공사가 이임하면서 미국무부에 보낸 메모의 일부다. 미국이 과테말라 군부의 인권유린과 양민학살에 깊숙이 개입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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