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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디니스타 민족해방 전선

구름위 2014. 9. 19.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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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혁명

 

 

 

니카라과의 '반미 벽화'.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의 군부독재를 적극 지지해왔다. 이로 인해서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의 반미감정은 커져만 갔다.
 
미국의 니카라과 통치니카라과는 멕시코와 함께 1826년에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1826년에는 중앙아메리카 연방에 가입했으나, 1838년 탈퇴하고 독립국가가 되었다. 그 후 오랜 기간 동안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간의 대립이 있었다.

 

1910년대 중반부터 니카라과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보수적인 친미주의자들이 집권했다. 1912년에는 친미주의자 아돌포 디아스가 권력을 잡았다. 그는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제공받는 대신 세관, 국영철도, 증기선 운행의 이권을 미국에 주었고, 자유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미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중미의 중심부에 위치한 니카라과에서 정치는 안정적이고 집권세력은 친미적이어야 하며, 정치 불안은 필연적으로 경제파탄을 야기하여 유럽의 개입을 유도할 것이라는 미국의 인식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니카라과는 1925년에서 1926년 사이 9개월을 제외하고 1910년대 중반부터 1933년까지 미 해병대의 장기주둔이 시작되는 등, 미국의 직·간접적인 통치를 받았다.

 

혁명전사 산디노의 등장

 

산디노는 미국의 이러한 니카라과에 대한 정치, 경제적인 통치에 맞서다 전사한 자유주의자 벤하민 셀레돈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후 산디노는 코스타리카, 온두라스, 과테말라, 멕시코 등지에서 개혁적인 정치사상과 사회혁명 등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다. 산디노는 멕시코에서, 1926년 자유파와 보수파 간의 내란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고 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미군이 다시 니카라과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조국 니카라과로 귀국했다. 산디노는 반미투쟁에서 로마의 시저 황제처럼 용맹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자신의 이름을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로 바꿨다.

 

산디노는 1927년에 미군과 정부군에 대항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산디노와 함께 자유주의 헌정파였던 호세 마리아 몬카다와 후안 바우티스타 사카사가 산디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쿨리지 대통령의 중재를 받아들여 1927년에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몬카다와 사카사는 차례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산디노는 이 평화협약을 반역으로 규정하고, 미 해병대가 철수할 때까지 계속적인 반미투쟁을 선언했다.

 

산디노의 게릴라전

 

이에 미군은 전투기를 동원하여 산디노군에게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공세를 한층 강화했다. 산디노는 엘 치포테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독자적으로 미군에 저항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자 미군은 "영광스러운 애국자의 길을 택하든지 아니면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도적이 될 것인지를 택하라"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에 산디노는 단호하게 "나는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여기서 너를 기다리겠다. 나는 자유로운 조국을 원한다. ···나를 따르는 동지들은 열렬한 애국심으로 나를 지지하고 있다"라고 응수했다. 또한 산디노는 니카라과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던 후버 대통령에게 "당신이 이전의 미국 대통령들의 정책을 계속 시행한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또 다른 산디노를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 및 기아의 증가로 인해서 산디노군에 합류하는 농민의 수가 크게 늘어나, 초기 2,000명 정도에서 1931년과 1932년에는 6,000명에 이르렀다. 산디노군은 니카라과 전역에서 광범위한 투쟁을 전개해서 미군과 정부군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194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이 산디노의 군대를 가리켜 '작고 어리석은 군대'라고 말했다. 그녀는 1928년 이 산디노의 군대가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적으나, 미국의 야만성을 알리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 '어리석고 작은 군대'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디노 자신 역시 "처음부터 승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결국 패할 것이란 것을 알았다"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는 무기의 힘보다는 모범과 희생으로 미군 철수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다.

 

미군은 사카사 대통령의 주둔 요청에도 불구하고 1933년에 철수했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침체로 니카라과 개입에 대해 경제적인 부담을 느끼고 있었고, 국내외의 반대 여론에 직면해 있었다. 동시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루스벨트는 니카라과 개입에 반대했다. 이러한 미국 내의 정치 상황의 변화와 산디노의 치열한 반미 투쟁으로 니카라과에서 미군이 철수한 것이다. 미군 철수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산디노는 사카사 정부와 모든 적대적인 행위의 중단, 게릴라 사면, 산디노군의 부분적 무장해제 등의 협정을 맺었으나 이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산디노의 죽음과 소모사 일가의 등장

 

1933년 미 해병대가 나카라과에서 철수한 후에 미국으로부터 훈련받은 국가방위대가 그 임무를 대신했다. 소모사가 사령관으로 있던 이 국가방위대는 산디노군을 수차례 공격하기도 했고, 정부군에 대항할 만한 힘도 가지고 있었다. 이에 1934년 사카사 대통령은 국가방위대의 활동이 불법임을 선언하고 이에 대한 수사를 명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카사와 회담을 마치고 대통령궁을 나오던 산디노가 국가방위대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때 국가방위대 사령관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였는데, 산디노가 처형된 후 1936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사카사 대통령을 축출하고 단독으로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36년에 정권을 잡은 소모사는 1956년에 암살될 때까지 20년간 니카라과를 통치했다. 소모사가 1956년 암살되자, 그의 장남인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가 대통령이 되었다. 1967년 루이스 소모사 데바일레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동생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집권했다. 이에 전국야당연합(UNO)은 강력히 대항했지만 그의 집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과 소모사 일가 독재의 종식

 

1974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다시 당선되자, 1961년에 산디노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을 중심으로 반정부 무장투쟁이 전개되었다. 여기에 1970년대 들어 교회, 군부, 지주 등 체제 내의 분열과 1972년 마나구아 지진으로 인한 산업시설의 파괴, 인명 손실 등으로 인해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체제는 위기를 맞이했다. 또한 1978년 니카라과의 유력 중앙지 〈라 프렌사〉의 사주이자 편집장인 페드루 호아킨 차모로가 살해되면서 지배체제 내에서조차 분열이 생겼다. 대외적으로도 미국 카터 행정부의 인권 외교정책으로 인해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 체제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1979년 니카라과를 떠났다.

 

이로써 소모사 일가의 3대에 걸친 46년간의 세습독재가 종식되었다.

 

니카라과 혁명

 

1979년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레가 축출됨으로써 니카라과 혁명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혁명이 완성되고 니카라과에 남은 것은 절망과 빈곤뿐이었다. 니카라과의 경제상황은 거의 회복 불능 상태였다.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는 국가경제의 재건을 위해 소모사 일가와 국가방위대의 고위 지휘관, 정부 고위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은행, 보험회사, 광물, 임업 자원을 국유화했다. 또한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토지개혁을 시행하여 약 7만 명의 농부들과 약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그리고 1980년에는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서 '문맹퇴치 십자군'을 조직했고, 많은 의료시설을 설립했다. 이와 함께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는 소모사 정권하에서 저질러진 고문과 무고한 죽음을 확인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혁명정부의 내무상 토마스 보르헤의 "나는 산디니스타의 모토를 기억한다. 싸울 때는 가차없이, 그러나 일단 승리하면 관대하라"는 내용의 연설을 통해서 국가방위대의 병사들에 대한 어떠한 보복행위도 금지했다.

 

미국은 니카라과 혁명을 지켜보면서 니카라과가 또 다른 쿠바가 되는 것을 사전에 막고자 7,500만 달러의 원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산디니스타 정부가 쿠바, 소련 등의 사회주의 국가와 가까워지는 등 혁명정부가 좌경화의 길로 들어서자 미국은 원조를 중단했고, 니카라과의 반혁명세력인 콘트라(Contra)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다. 미국은 니카라과의 좌경화를 라틴아메리카에서의 공산주의의 팽창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이른바 '콘트라 반군'의 선발과 훈련을 위한 자금으로 약 2,000만 달러를 지원했다. 이는 미국의 적대국인 이란에 대한 비합법적인 무기 수출을 통해 마련한 재원이었다. 콘트라 반군은 이를 바탕으로 항만, 교량, 송전탑 등을 파괴했다. 이외에도 미국은 세계은행과 미주개발은행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니카라과에 대한 경제 지원을 막았으며, 콘트라 반군의 병력도 1만 5,000명으로 증강시켰다. 이에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도 군사력을 강화하여 반군 소탕작전을 강화했다.

 

니카라과 혁명정부의 실패

 

1985년 국제 감시단의 감시하에 치러진 선거에서 다니엘 오르테가 사아베드라가 당선되었으나, 니카라과는 미국의 경제봉쇄와 콘트라의 파괴활동, 계속된 내전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1989년의 국민소득은 1960년대의 수준으로 떨어지고 인플레이션이 치솟아 실질임금이 계속 하락했다. 미국의 금수 조치 이후 시작된 소련의 원조도 줄어들었다. 결국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는 교육, 보건, 의료, 주택, 급식 예산에 대한 긴축정책을 시행했다. 일부 산업분야의 사유화를 추진하는 한편, 공무원을 대량 감축했다. 특히 사회복지 예산의 축소로 혁명공약의 일부는 폐기되었다. 이로 인해 혁명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비판이 증가했다.

 

결국 1990년 국제연합과 미주기구 등에서 파견한 선거감시단의 입회하에 실시된 선거에서, 불과 7개월 전에 결성한 14개의 좌우익 정당 연합체인 니카라과 야당연합(UNO)의 비올레타 바리오스 차모로 후보가 승리하여 오르테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의회선거에서도 과반수의 의석을 획득했다. 이로써 12년간 지속되었던 산디니스타 좌파정부가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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