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혁명 안에 모든 것이 있고···"

구름위 2014. 9. 1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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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

 

1959년 쿠바혁명이 성공한 후의 피델 카스트로.
쿠바혁명 후 카스트로는 "혁명 안에 모든 것이 있고 혁명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역설하면서 쿠바의 모든 분야를 장악해나갔다.
 
"혁명 안에 모든 것이 있고···"

 

카스트로는 혁명에 성공한 뒤, 과거 시에라 마에스트라 속에서 '라디오 레벨데(Radio Rebelde)'를 통해 국민에게 약속했던 전면적인 농지개혁과 산업의 국유화, 국민소득의 공정한 분배, 교육의 확충 등을 실천하려 했다. 이를 위해서 외국인, 특히 미국인의 손에 있던 토지와 산업시설들을 다시 찾아와야 했다. 카스트로는 석유법과 대기업 국유화법을 제정하여, 1960년 7월부터 쿠바에 있던 미국인 소유 기업과 은행들을 모두 국유화했다. 특히 석유산업의 국유화는 미국과의 갈등을 일으켰다. 당시 쿠바의 석유정제 공장들은 베네수엘라산 석유를 정제하여 쿠바와 미국에 공급하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러시아산 석유가 훨씬 싸다는 것을 알고, 쿠바에 있는 석유정제 공장들이 러시아산 석유도 취급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영미계 석유회사들이 이를 거부하자 카스트로는 석유산업의 몰수를 명령했다. 이에 미국은 즉각 쿠바산 설탕 수입의 제한으로 응답했다. 카스트로는 이러한 미국의 조치에 미국의 전기회사와 전화회사 그리고 주요 설탕 가공공장들까지 몰수했다. 그 후 외국인 소유의 호텔과 카지노까지 국유화해 1961년 8월까지 쿠바 내 거의 전 산업이 국유화되었다.

 

이러한 카스트로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미국은 경제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쿠바는 소련으로부터 1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받고, 소련은 5년간 500만 톤의 제당을 쿠바에서 수입하기로 했다. 이러한 소련과의 관계는, 미국의 경제적 압력에 직면해 달러 부족에 처한 쿠바에게 혁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미국과의 관계 악화는 쿠바의 공산주의화를 가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 기업들의 국유화와 함께 카스트로는 농지개혁을 실시하여 바티스타의 농장을 몰수했고, 대농장주의 토지를 수용하여 각 농가에 분배했다. 그래도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은 농지개혁청(INRA)이 관리하는 협동농장에서 농사를 짓게 했다.

 

1961년 여름까지 정치, 경제적인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카스트로는 영화와 출판사업 등 문화산업 분야까지 장악했다. 할리우드적인 쇼는 극장에서 사라졌고 쿠바인민들의 전통적인 축제가 사라졌다. 카스트로는 "혁명 안에 모든 것이 있고 혁명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선언했다. 이는 카스트로가 쿠바의 문화예술인에게 쿠바에서의 문화는 혁명을 옹호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교시를 내린 것이었다.

 

피그 만 사건과 미사일 위기

 

카스트로의 급진적인 정책에 대해 경제제재와 외교 단절을 선언했던 미국은, 더 나아가 1961년 4월 과테말라에서 훈련시킨 바티스타의 잔존세력과 용병의 연합군 약 1,500명을 쿠바에 침투시켰다. 미중앙정보부가 제공한 각종 화기와 장비를 가지고 수도 아바나와 가까운 피그 만에 상륙했다. 그러나 이들은 시기를 잘못 맞춰 상륙도 못하고 쿠바군 비행기로부터 공습을 받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약 90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1,200명은 쿠바군에 이끌려 목에 팻말을 달고 아바나 시를 행진해야 했다. 국제적 창피를 당한 미국은 6,200만 달러의 몸값을 제공한 후에야 그들을 미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쿠바와 미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미국과의 관계 악화는 1962년에 들어 카스트로를 더욱 더 위기에 몰아넣었다. 쿠바 내에서 반군의 활동이 재개되었고 경제상황 또한 매우 어려웠다. 카스트로는 미국이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다양한 공작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멕시코를 제외한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쿠바와 국교를 단절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카스트로는 소련과 동맹관계를 맺어 미국의 침략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카스트로는 또한 자신의 내각에 공산주의자들을 대거 등용시켜, 소련이 '쿠바가 마침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길에 접어들었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결국 그는 쿠바에 대한 미국의 압박정책으로 인해서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들에게 더욱 다가갔다.

 

쿠바와 군사조약을 체결한 소련은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주의 국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의 코앞에 있는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이 정보를 미리 확보하고 소련에게 미사일 기지를 쿠바에서 철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소련은 쿠바에 설치하는 미사일은 방어용이며 미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러한 소련의 대응에 대해서 미국은 1962년 10월, 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던 소련의 선박을 카리브 해역에서 봉쇄했다. 소련 선박들이 해상 봉쇄선을 넘을 경우 소련과의 핵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최후통첩이 소련에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세계는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질 정도로 일촉즉발의 위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마침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소련의 후르시초프 서기장이 쿠바의 미사일 기지 건설 중단과 쿠바의 독립을 서로 보장함으로써 극적인 타결을 이루어냈고, 이로써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모면했다.

 

카스트로 체제

 

미사일 위기 이후 케네디 행정부는 1963년 2월 미국인의 쿠바여행을 금지했고, 같은 해 7월에는 미국 내 쿠바 자산을 동결시켰으며, 1964년에는 미주기구(OAS)를 통한 다국적 제재안이 발동되었다. 그러나 카스트로 정부는 이러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1963년 2차 농지개혁법을 단행하여, 국가 토지의 76%를 국영농장이 장악하게 했다. 그리고 1966~1970년 사이에 제당산업의 근대화에 주력했고, 1960~1975년 사이에는 소련으로부터 30억 달러에 달하는 군사비를 지원받았다. 1976년에는 신헌법을 제정하여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토대로 경제체제를 수립했고, 지역과 주 단위의 선거를 실시하여 대의체제를 확립했다.

 

1980년대에 들어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의 공산당을 장악하여 자신의 통치체제를 확고히 했지만, 쿠바의 경제상황은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에 따른 교역 감소로 급속히 악화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카스트로는 과거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폐지했던 주택, 선박, 농장 등에 세금을 부과하는 새 세금법을 개정했다. 또 부분적으로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도입해 변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쿠바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해야 한다는 미국의 대전제에는 변함이 없었다. 또한 플로리다에 정착해 살고 있는 반(反)카스트로 성향의 쿠바계 미국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1992년 5월 미 의회가 "쿠바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가져다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쿠바 봉쇄정책을 아예 입법화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토리첼리 법'이라 불리는 쿠바민주주의법(CDA)인데, 이 법의 골자는 미국회사의 외국지사가 쿠바와 무역을 할 수 없도록 봉쇄를 강화한 것이다. 그 이후 1996년 더욱 강화된 헬름스-버튼 법이 제정되었는데, '쿠바의 자유 및 민주연대법'이라 이름붙인 이 법은 대 쿠바 경제봉쇄를 모든 나라로 확산시킨 것이었다.

 

갈 사람은 언제든 가라!

 

카스트로는 1980년과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국외탈출을 허용했다. 1980년 4월 1일, 6명의 쿠바인이 버스를 몰고 페루 대사관으로 돌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카스트로는 "쿠바의 안전에 공조(共助)하지 않는 대사관들을 보호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며 경찰 수비대를 대사관 주위에서 철수시켰다. 그러나 카스트로의 속내는 불만에 찬 소수 쿠바인의 침입이 페루 대사관 직원들에게 큰 불편을 주기를 기대한 것이었다. 그 후 1만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페루 대사관 구내로 밀려들었다. 예상보다 많은 숫자에 당황한 쿠바정부는 이들을 범죄자, 약물 중독자, 인간쓰레기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더는 삶을 지탱할 수 없다고 결심한 평범한 시민일 뿐이었다. 카스트로는 이들을 모두 코스타리카로 보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다시 페루로 갔다.

 

카스트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이애미에 있는 망명 쿠바인에게 친척들을 미국으로 데려가도 좋다고 선언했다. "갈 사람은 언제든 가라!" 카스트로는 이들을 쿠바에 남은 마지막 벌레들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벌레들은 가급적 쿠바를 떠나는 게 좋다고 또다시 선언한 것이다. 곧바로 쿠바의 마리엘 항을 통해 수백 척의 배가 몰려들어 망명객들을 가득 싣고 미국 플로리다로 갔다. 미국 카터 대통령은 이들을 모두 '열린 마음과 열린 두 팔'로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이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같은 해 9월에 미국의 간청을 받아들여 카스트로가 해안선 봉쇄를 선언할 때까지 무려 12만 5,000명이 쿠바를 탈출했다.

 

그 후 또 한 번의 쿠바 탈출사태가 일어났다. 1994년의 이 사건은 과거와 같은 정치적 난민이 아니라 단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일어났다. 쿠바의 아바나 항에서, 또는 인근의 바닷가에서 나무상자나 스티로폼으로 만든 조악한 뗏목을 타고 해류에 의지해 미국의 마이애미로 향했는데, 이들의 숫자가 약 3만 명에 달했다. 흥미롭게도 두 경우 모두 난처한 입장에 처한 쪽은 카스트로가 아니라 바로 미국이었다. 카스트로는 쿠바사회가 수용할 수 없는 반체제 인사들을 돈을 받아가며 처분했고, 미국은 수십만의 골칫 덩어리를 받아들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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