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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구름위 2014. 9. 19.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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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2004년에 젊은이들의 우상 체 게바라의 '23세의 특별한 여행'을 그린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영웅 없는 이 시대가 영웅의 요소를 갖춘 그를 불러오고 있다'라는 말처럼, 이 영화는 영웅이 부재한 시대에 영웅을 필요로 하는 젊은이들의 욕구와 맞물려서 제작되었다. 그리고 저항적이며 자유로운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체 게바라의 붐을 이루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이끈 인물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체 게바라'의 원래 이름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다. '체 게바라'의 '체'는 '어이! 친구' 정도의 뜻을 가진 말이다.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는 암으로 할머니를 잃은 후, 암 정복에의 야망을 가지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시절 아르헨티나를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군부독재정권과 대지주들이 한패가 되어 저지르는 온갖 비리와 부패가 만연한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현실을 목격했다. 1952년에는 동료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포데로사(Poderosa, 힘 있는, 강력한)'라 이름붙인 오토바이를 타고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도 역시 체 게바라는 단순히 한 젊은이의 낭만적인 경험을 넘어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소외당한 이들의 참담한 삶을 직접 체험했다. 특히 여행을 마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오기 전에 들른 부와 환락의 도시 마이애미에서, 체 게바라는 가난한 이들을 착취해서 돈을 버는 미국 자본의 실상을 목격하고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을 결심했다. 이미 두 번의 여행을 통해 혁명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그에게 의사라는 직업은 더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취직한 지 두 달 만에 병원을 그만두고 1953년 볼리비아로 갔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로 탄생한 볼리비아 혁명정부가 민중들의 삶에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음에 실망한 게바라는 그 해 12월 과테말라로 갔다.

 

당시 과테말라는 하코보 아르벤스가 이끄는 과테말라 혁명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과테말라 혁명정부는 미중앙정보국(CIA)의 공작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체 게바라는 혁명정부의 붕괴를 보면서 "아홉 개를 가진 자가 하나를 가진 자를 공격해서 열 개를 채우는 모습을 좌시할 수가 없다"며 자신이 싸워야 할 적은 바로 다름 아닌 제국주의임을 확신했다. 그는 그 후 멕시코로 갔다. 당시 멕시코시티는 스페인 내전 후 망명한 스페인의 정치가, 지식인뿐만 아니라 트로츠키를 비롯한 많은 사회주의 정치인, 지식인의 활동무대였다. 이곳에서 게바라는 마르크스와 레닌사상을 탐독하며 본격적인 혁명가의 길을 준비했다.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 그리고 혁명

 

당시 멕시코에는 피델 카스트로가 있었다. 그는 쿠바의 몬카다 병영 습격 실패로 투옥되었다가 사면되어 1955년에 멕시코로 들어와 새로운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을 준비하고 있던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낭만주의 청년'에서 '총을 든 게릴라'로 변신했다. 체 게바라는 드디어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1956년 11월,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멕시코 해안에서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상륙,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거점으로 한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다. 1959년 1월 독재자 바티스타를 축출하고, 체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당당하게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혁명의 꿈을 이루었다.

 

그 후 체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 총재와 산업부흥상 등 경제분야를 관장하는 직책을 맡았다. 그는 '인간의 욕망이 물질로부터 자유롭고 노동이 즐거운 놀이가 되는 경제 건설'을 꿈꾸었다. 그는 화폐나 기업, 국가라는 개념을 부정했고, 소련이 쿠바에게 제공하는 유상차관을 비판했다. 체 게바라의 이러한 태도는 소련의 비판을 불러왔고, 쿠바의 경제정책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도 대내외적으로 많은 갈등을 유발했다. 이러한 비판에 직면한 체 게바라는 소련, 중국, 동구권 및 북한을 순방하며 자신의 경제정책에 대한 이론과 실천의 문제들을 알리고 그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또한 유엔, 아프리카 등을 누비며 쿠바의 자립경제와 전 세계적인 반제국주의 투쟁을 위한 지원 등을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단지 사회주의권 지도자들의 혁명을 대하는 소극적인 태도와, 미국의 쿠바 봉쇄령과 같은 제국주의의 횡포만을 경험했을 뿐이었다. 이에 체 게바라는 자신의 것들을 버리고 1965년에 피델 카스트로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긴 채,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싸워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슴에 품고 아프리카의 콩고로 떠났다.

 

그러나 9개월간 콩고에 체류하면서 게바라는 새로운 전장 콩고가 아직 혁명을 받아들일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1966년 11월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또 다른 혁명을 꿈꾸며 변장한 채 볼리비아로 잠입했다.

 

볼리비아 일기

 

당시 볼리비아에는 바리엔토스 군사독재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공산당 지도자인 마리오 몽헤와 연합해,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정부의 건설을 계획했다. 이는 볼리비아가 남미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볼리비아에서 혁명이 성공한다면, 주변에 인접한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등 남미 여러 나라에 혁명의 불길이 삽시간에 번지게 하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볼리비아는 쿠바의 상황과는 또 달랐다. 볼리비아의 혁명세력들은 농민들에게 위협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으나, 농민들은 이들에게 비협조적이었고 정부군에 이들의 정보를 제공하는 등 혁명세력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이는 게릴라전에서 가장 중요한 우군인 농민의 지원 확보 실패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투쟁해야 함을 의미했다. 1966년 11월부터 1967년 10월까지 11개월간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거점을 확보하며 투쟁해나가는 과정은, 그의 《볼리비아 일기(The Bolivian Diary of Ernesto Che Guevara)》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악화되어가는 주변 상황 속에서 어릴 때부터 그를 괴롭혀온 천식 발작도 더 심해지고 대원들의 식량난도 극심해져 갔다. 1967년 10월 8일 그들의 은신처는 노출되었고, 게바라와 대원들은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미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결국 체 게바라는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튿날 볼리비아 정부는 그를 사살하고 양 손목을 자른 뒤, 그 손목을 쿠바로 보내 그의 죽음을 입증하기까지 했다.

 

¡Hasta La Victoria Siempre!(아스따 라 빅또리아 씨엠쁘레, 승리할 때까지 영원히!)

 

그 후 체 게바라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1997년 볼리비아의 바예 그란데 지방에서 두 손목이 잘린 채 발견되었다. 체 게바라를 사살한 후 그의 죽음을 입증하기 위해 두 손목이 잘려진 바로 그 시신이었다. 체 게바라는 30년간의 침묵을 깨고 혁명의 조국인 쿠바로 돌아왔다. 수많은 추도객의 조문 속에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안장되었다. 일주일간 계속된 장례식의 마지막 날 산타클라라에는 약 50만 명의 추도객이 몰려들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것은 네가 별에서 왔기 때문이 아니다. 너는 나에게 '인간은 눈물과 고뇌를 가지고 있으며, 빛을 비추고 또 빛을 가려주는 문을 열고 닫기 위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기 전에 쓴 이 메모에서 체 게바라가 인류에게 품은 애정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있다. "민중에 대한 사랑이나 인류에 대한 사랑, 정의감과 관대함이 없는 혁명가는 진정한 혁명가일 수 없다"는 그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체 게바라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혁명의 모티브로 삼아 투쟁한 뜨거운 가슴의 소유자였다.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금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평했다. 이는 체 게바라의 내면적인 성숙과 함께, 이데올로기를 떠나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위한 투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스따 라 빅또리아 씨엠쁘레(¡Hasta La Victoria Siempre!, 승리할 때까지 영원히!) 이는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한 투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항상 고뇌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던 체 게바라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혁명광장에 있는 체 게바라의 모습.
체 게바라 밑에 ¡Hasta la Victoria Siempre!(승리할 때까지 영원히!)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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