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독립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거의 모든 지역이 경험했던 것과 같이, 쿠바에서도 19세기 중반 들어 스페인 본토 출신의 지배자들(페닌술라르)과 쿠바 태생의 스페인인(크리오요) 사이의 갈등이 커졌다. 이로 인해 1868~1878년 사이에 10년 전쟁이 발발했으며 1880년에도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1895년에는 쿠바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세 마르티의 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의 결정적인 요인은 외부에서 왔다.
바로 1898년, 쿠바의 아바나 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 순양함 메인호의 폭발사건이었다. 그 해 미국은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쿠바, 필리핀, 괌 및 푸에르토리코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서 쿠바는 비록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은 했으나, 미국의 또 다른 지배를 받게 되었다.
또 다른 종속
1898년 파리조약으로 쿠바의 독립은 인정되었지만, 1899년 1월 1일부터 1902년까지 쿠바는 미국의 군정하에 놓였다. 미국은 군정기간 중 쿠바 내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의 명목으로 쿠바의 주권을 제한했다. 이러한 내정간섭을 가능하게 한 것은 '플랫 수정안'이었는데, 이 수정안에는 '미국은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쿠바의 내정에 개입할 수 있다' '쿠바정부는 쿠바의 독립을 손상시킬 수 있는 국제관계에 참여할 수 없다' '미국은 쿠바에 해군기지를 보유한다' '미군정의 쿠바 내에서의 모든 활동과 권리들은 정당하며 보호되어야 한다' 등 여러 가지 불평등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은 이를 근거로 해서 연합청과물회사(United Fruit Company)와 같은 대기업을 통해 쿠바의 경제를 점진적으로 지배해나갔다. 쿠바는 스페인으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달성했지만, 또다시 미국의 경제적인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관타나모 기지
지금도 3,500여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10만여 명에 가까운 아이티의 난민들이 이곳에 수용되어 있다. 지난 1994년 여름부터는 쿠바 난민들도 이곳에 수용되었다. 그리고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포한 탈레반 전사들을 이곳에 분산 수용시켰다. 미국은 기지를 반환하기로 되어 있던 20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쿠바 정부에 기지를 순순히 돌려주지 않고 있다. 이는 관타나모 기지가 공산 쿠바와 직접 맞대고 있는 미국의 최일선 군사기지 때문이기도 하다.
헤라르도 마차도 이 모랄레스
미 군정이 끝난 1902년부터는 외형상 쿠바인에 의한 통치가 시작되었다. 1924년과 1928년에 헤라르도 마차도 이 모랄레스가 연이어 집권에 성공했다. 그는 개헌을 실시해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했고, 정적을 제거하고 고문과 암살을 자행하는 등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로 군림했다. 마차도 정권의 전횡이 심해지자 1928년 이후부터 학생,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反)마차도 세력의 저항이 일어났다. 이에 일부의 군부세력도 동조했다. 1933년에는 총파업이 단행되고 대학생이 주축이 된 학생운동 조직이 주도하는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이에 마차도는 군부를 정권의 지지세력으로 만드는 한편, 정치범 석방 등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시도했지만 양측의 갈등은 커져만 갔다. 여기에 1925년에 결성된 쿠바 공산당의 개입, 세계 공황의 여파에 따른 경제상황 악화, 이로 인한 파업의 확대 등으로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쿠바의 혼란에 대해서 미국은 마차도 정권이 존속하는 한 사태의 수습이 불가능하며, 이를 방치할 경우 쿠바뿐만 아니라 미국의 기업들도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마차도의 사임을 강요했지만, 마차도는 자신의 정적(政敵)을 바다에 빠트려 상어의 먹이로 만들 정도로 권력에 집착했다.
그러나 결국 마차도는 사임하고 세스페데스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출범한 지 불과 21일 만에 육군 참모부의 속기사로 일했던 풀헨시오 바티스타 등 하사관들이 주동이 된 반란군에 의해서 1933년에 축출당했다.
하사관들의 혁명 - 풀헨시오 바티스타
쿠데타 이후 쿠바 내의 각 세력들의 분열로 인해서 쿠바는 1934년 초까지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때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미국의 지원으로 받은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 정부를 붕괴시켰다.
1901년, 쿠바 동부지역의 한 농장에서 태어난 바티스타는 사탕수수와 바나나 농장의 노동자, 식당 종업원 등 여러 직업을 거친 후 군에 입대했다. 그는 1933년 세스페데스 정부에 대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 그의 나이는 32세에 불과했다. 그는 쿠데타 성공 이후 1940년까지 쿠데타의 실세로서 정치 일선에는 등장하지 않고, 7년 동안 7명의 허수아비 대통령을 통해 배후에서 정치를 했다. 그는 군의 봉급 인상, 연금 조성, 중산층의 보호, 노조 인정, 노동자들의 임금인상과 노동 조건의 개선 등을 통해서 군부, 노조 및 관리들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독재기반을 넓혀갔다.
이렇게 군부의 지지와 공무원, 근로자 세력을 기반으로 바티스타는 서서히 정치 일선에 모습을 드러내 1940년 선거에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바티스타의 집권기간 중 쿠바는 정치, 경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범죄율이 낮아졌으며 공기업도 효율적으로 운영되었고, 교육혜택도 확대되었다. 또 도로, 교량, 항만, 발전소 등 사회기반 시설이 확충되었고, 이에 따라 노동자의 고용 역시 확대되었다. 특히 설탕 가격이 안정됨에 따라 경제상황이 호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안정의 이면에는 개인적인 치부와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쿠바는 미국의 향락가와 경제적 식민지로 전락되어가고 있었다. 1944년 바티스타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옛 동료이자 경쟁자였던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재임기간 중 치부한 재산을 가지고 미국의 플로리다로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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