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주의
불쌍한 멕시코여!
"불쌍한 멕시코여, 신과는 그렇게도 멀면서 미국과는 어찌 그리 가까이 있는지!"
1976년에 멕시코 대통령에 취임했던 멕시코의 로페스 포르티요의 말이다. 이는 멕시코가 미국에게 역사적으로 온갖 수모를 당하고 경제적으로 종속되어온 데 대한 서글픔의 표현이다. 이렇게 미국에게 수많은 간섭을 받아온 멕시코였지만, 1910년 멕시코혁명 이후 1940년 군 출신으로서는 마지막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빌라 카마초까지 여러 격변기를 거치면서 정치 질서가 안정되어갔다. 카마초 대통령이 정치권에서 군 출신 인사를 완전히 배제시킴으로써 이후 멕시코 정치에 군부가 개입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멕시코 역시 공업화가 추진되고 외국자본이 들어오는 등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경제성장에 멕시코혁명의 많은 원칙과 정신이 큰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혁명정신의 포기나 재해석 등 혁명의 보수화가 불가피했다.
틀라텔롤코 광장학살사건
멕시코는 활발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1968년에 제3세계 국가로는 최초로 제19회 하계올림픽을 유치했다. 그러나 올림픽 개막을 며칠 앞두고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고교생들의 사소한 패싸움에서 시작되었다. 이의 진압을 위해 출동한 군경은 학생과 교사들을 사정없이 매질하며 과잉진압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학생 1명이 숨졌다. 이로 인해서 서로 원수지간이었던 학생들이 단합하여 과잉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날은 7월 26일이었는데, 쿠바의 카스트로가 15년 전인 1953년에 쿠바군의 제2의 기지였던 몬카다 병영을 공격하여 혁명의 기치를 높인 날이기도 했다. 기념일 행사를 펼치던 학생 행렬이 또다시 과잉진압을 당해서 학생 4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고 체포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주말을 기해 학교 건물을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친 채 농성에 돌입했다. 정부는 폭동 진압을 위한 정예부대인 그라나데로스를 출동시켜 화염병으로 맞서는 학생들에게 바주카포를 퍼부어 수십 명의 학생이 희생되었다.
사태가 커지자 고등학생들은 마침내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UNAM) 내 좌익학생 단체들과 손을 잡고 수업 거부를 단행했다. 장래에 대한 보장이 없는 경제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 특히 자부심이 강하고 평소에 엘리트층이 너무 두터워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던 국립자치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에 일반 국민 역시 동조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8월 27일, 대통령궁 앞 소칼로 광장에는 약 40~50만 명이 모여 '침묵시위'를 벌였다. 군경은 이튿날 새벽까지 남아 있던 일부 과격분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9월 19일 군경은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에 진입해 교내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 교직원과 학부모 등 수천 명을 체포했다.
이렇게 학생운동이 탄압에 대한 항의를 넘어서 국가의 권위주의, 일당 독재, 부패를 성토하는 형태를 띠게 되자, 농민, 빈민촌 거주자, 노동자 등 하층민과 젊은 성직자까지도 이에 동조했다.
올림픽이 시작되기 열흘 전인 10월 2일, 학생들은 멕시코 시의 틀라텔롤코 광장1)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연다고 발표했다. 주동자들은 정부가 강력한 경고로 맞서자 시위계획을 포기했지만, 그때 행진을 벌인 일부 노동자, 농민 시위대가 광장에 도착할 무렵 광장을 포위하고 있던 군경이 발포한 총탄에 시위대에 있던 몇 명의 노동자, 농민들이 쓰러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광장에는 300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사망자가 49명, 부상자가 500명으로 발표되었지만 멕시코 언론은 정확한 사상자 숫자를 보도하지 않았다. 영국의 〈더 가디언(The Guardian)〉은 325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비공식 통계가 500명 사망, 2,500명 부상 그리고 1,500명 체포로 전하기도 했다.
멕시코 정부가 이렇게 무력진압으로 나온 것은, 노동자, 농민 그리고 학생 간의 제휴가 급기야 계급투쟁으로 발전해 전국적인 반란으로 발전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유치해 멕시코가 근대국가로 성장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던 멕시코 정부는, 이른바 '도스 데 옥투브레(Dos de Octubre, 10월 2일) 학살사건'으로 거의 50년간이나 유지되어왔던 정치적 안정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당시 미국언론은 이 사태를 '동맥경화증에 걸린 멕시코 정권이 과잉반응을 나타낸 것'이라고 분석하기까지 했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UNAM)의 사무국 건물에 있는 대형 벽화.
"멕시코에서 신(神)은 6년마다 죽는다" 이는 멕시코에서 대통령이 행정부의 모든 권한을 가지면서 사법부나 입법부의 견제를 받지 않음을 잘 나타낸 말이다. 실제로 1917년 멕시코혁명 정부가 제정한 헌법에는 '멕시코 행정부의 최고 권력은 멕시코 대통령 한 사람에게 부여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대통령이 멕시코 정치의 정점에 있는 행정부의 수장일 뿐만 아니라 모든 제도의 실질적인 수장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동시에 헌법에는 '대통령 재선불가 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이는 디아스 대통령의 부정선거에 항의해 '공정선거와 재선 금지'를 슬로건으로 한 혁명정신의 충실한 이행이기도 하다. 멕시코 대통령의 임기는 6년 단임인데, '육신(肉身)'은 물론 '정신적 연임'도 금기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신적인 존재라 할 수 있는 대통령 후보의 선출은 이른바 '데다소(dedazo, 손가락으로 지명한다)' 또는 '데스타페(destape,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라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현직 대통령에 의한 낙점인 것이다.
이처럼 멕시코 정치의 성격은 한마디로 '대통령이 곧 국가'임을 뜻하는 '대통령주의'로 설명된다.
제도혁명당(PRI)의 장기 집권
카르데나스에 이어 1940년 카마초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1970년 에체베리아가 집권하기까지, 멕시코는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경제발전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미국의 투자가 활성화되어 양국 간의 교역량이 늘어나는 등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외교 면에서도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측에 가담하여 참전함으로써 오랜 국제적인 고립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성장의 추진과정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불만을 표출해서 정치적 소요가 자주 발생했다. 특히 1970년 에체베리아 정권하에서 멕시코는 국제사회에서 지위가 한층 격상되어 제3세계의 주도국으로 부상되었으나, 국제 원유가의 하락과 수입 물량의 증가로 국제수지는 적자를 면치 못했고,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어 멕시코의 국내자본이 해외로 유출되는 등 경제사정이 악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후에 집권한 로페스 포르티요, 미겔 데 라 마드리드 대통령 집권기간에도 계속되었다.
멕시코 국민은 이러한 경제사정 악화의 주된 원인을 정부 및 집권여당인 제도혁명당(PRI)의 실정(失政)으로 돌렸다. 1929년 이후 집권여당으로 군림해온 제도혁명당은 비록 6년마다 평화적 정권교체로 정치적인 안정을 확립할 수 있었지만, 일당 지배체제가 장기화되면서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어 국가를 효율적으로 경영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아울러 인플레이션의 심화와 석유파동으로 경제상황이 악화되자, 국민의 불만이 팽배해지고 좌익정치가들과 학생운동세력이 대규모로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에 들어와 더욱 표면화되었다. 그 결과 1988년 유례없는 부정선거 속에서도 제도혁명당의 후보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가 불과 50.47%라는 사상 최저의 득표율로 당선되기까지 했다. 이처럼 제도혁명당 자체의 부패와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해서, 국민은 집권여당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되었다.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