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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마호를 타고

구름위 2014. 9. 1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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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혁명

 

바티스타의 재집권

 

바티스타에 이어 그라우와 프리오가 집권했지만 미국의 신뢰를 얻지 못해 경제사정은 악화되었다. 미국에서 호화생활을 즐기고 있던 바티스타는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되는 것을 목표로 귀국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선거가 임박한 1951년에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치바스가 갑작스럽게 자살을 했다. 이로 인해서 공산당의 협조를 얻고 있는 바티스타는 자신이 당선되리라 생각했지만, 공산당은 바티스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선거로는 당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바티스타는 1952년 3월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그는 언론을 통제하고 대학을 폐쇄했으며 반체제 인사들을 투옥했다. 그리고 의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장기독재를 위한 권력 기반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바티스타가 1934년부터 1944년까지의 집권기 동안에 사회, 경제정책에 관심을 쏟았다면, 1952년 재집권을 한 후에는 오직 자신의 치부에만 힘썼다. 그는 대규모 도박산업을 유치하면서 미국기업으로부터 수억 달러를 제공받았다. 이로 인해서 아바나에 270여 개의 호텔과 1,000여 개가 넘는 바와 나이트클럽이 만들어져, 아바나는 미국인을 위한 향락도시로 변모했다. 또한 권력기관을 이용한 국민에 대한 탄압이 쿠바 전 지역에 걸쳐 자행되었다. 이러한 부패와 폭정은 당연히 쿠바혁명의 싹을 키우게 했다.

 

피델 카스트로

 

1926년에 태어난 카스트로는 1945년에 아바나 대학 법대에 진학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카스트로는 쿠바인민당의 창당식에 대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되었다. 쿠바인민당은 호세 마르티 이래 가장 청렴하고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던 치바스 상원의원이 만든 것이었다. 호세 마르티의 강령에 충실한 정통주의 정당을 표방한 이 쿠바인민당은, 카스트로에게 있어서 그의 정치활동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좌표가 되었다.

 

그 후 카스트로는 반미주의를 기치로 내건 라틴아메리카 학생연대기구의 창설에 적극 참여하면서 정치적인 경험을 쌓았다. 그는 다른 쿠바학생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창설집회를 위해 콜롬비아로 갔는데, 그곳에서 콜롬비아 자유주의 운동의 지도자 가이탄이 암살되는 바람에 회의가 무산되었다. 비록 카스트로는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이를 계기로 주목받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카스트로는 반미시위로 다시 한 번 일반 대중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켰다. 1948년 미 해군들이 아바나 시내의 호세 마르티 동상에 방뇨하는 등 동상을 모욕한 사건이 발생하자, 카스트로가 이 반미시위에 앞장을 섰던 것이다. 비록 이 시위는 쿠바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카스트로는 쿠바의 자존심이 실추되었다는 자책감을 갖게 되었고, 반미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경찰에게 강력한 비난을 퍼부었다.

 

이러한 사건 후, 1952년에 실시될 예정이었던 선거가 바티스타의 쿠데타로 취소되자 카스트로는 법적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아바나 재판소에서 '혁명은 쿠바 법의 원천'이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이에 법과 대화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스트로는 폭력에 의한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그란마호를 타고

 

 

 

그란마호가 보관되어 있는 기념관(Memorial Granma).
1956년 12월 2일 카스트로를 포함한 82명의 혁명전사들이 멕시코에서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로 잠입하여 3년간의 투쟁 끝에 혁명에 성공하였다. 이 기념관은 쿠바 혁명정부의 가장 신성시되는 곳 중 하나다.
 
카스트로는 먼저 쿠바 제2의 군기지였던 몬카다 병영의 습격을 시작으로 대정부 무력투쟁의 길로 들어섰다. 1953년 7월 26일 새벽, 카스트로와 123명의 동료들은 몬카다 병영을 습격, 소수의 혁명군이 병영 내로 진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곧 진압되었고, 다수는 시가전에서 희생당했다. 카스트로를 비롯하여 살아남은 많은 사람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처형되었다.

 

카스트로는 체포되었지만 처형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1953년 10월부터 시작된 특별재판에서 카스트로는 여러 가지 이의를 제기하면서 여론의 주목을 끌었다. "바티스타 이전의 공화국이 만족할 만한 체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체제하에서는 자유가 있었다. 바티스타는 쿠데타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이 자유를 박탈했다"라고 주장했다. 이 재판에서 카스트로는 15년 형을 선고받고 카리브 해에 있는 피노 섬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카스트로는 법정에서 "역사가 나를 사면하리라(La historia me absolverá)"라고 말하면서 농지개혁과 노동자 문제 등 일련의 혁명이념을 제시했다.

 

1954년 대통령에 당선된 바티스타는 카스트로와 그의 동료들을 석방했다. 투옥된 지 21개월 만이었다. 석방은 되었지만 카스트로는 좀 더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멕시코로 망명했다. 카스트로는 멕시코에서 쿠바 침공계획을 세웠다. 그때 혁명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체 게바라를 만나 1956년 12월 2일, 그와 함께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 동남부 오리엔테 주의 알레그리아 데 피오 해변에 도달했다. 그란마호는 1934년에 제작된 목재 요트로써 소유주는 로버트 에릭슨이라는 미국인이었는데, 그는 1만 7,000달러에 그란마호를 혁명군에게 팔았다. 25명 정원의 그란마호에는 82명이 승선했고 엄청난 양의 무기와 탄약이 실려 있었다. 5일로 예상했던 항해는 7일이 넘게 걸렸고, 배 멀미에 지친 혁명군들은 이미 전투요원으로서의 능력을 상실했다. 그란마호는 암초에 부딪혀 좌초되고 혁명군들은 발각되어 사살되거나 체포되었다.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그리고 부상당한 체 게바라를 포함한 16명만이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피신하였다.

 

그 후 카스트로는 뉴욕타임스, CBS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국내외 여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바티스타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도를 약화시켰다. 게릴라군은 16명에서 200명으로 증가했다. 카스트로는 게릴라 활동지역을 해방구로 설정하여, 이곳이 바티스타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지역이라는 사실을 국내외에 알렸다. 1958년에 들어서면서 각 공공부문의 노조에서 파업이 발생했고, 미국은 바티스타에게 사임과 총선거 실시에 대한 압력을 가했다. 이렇게 바티스타에게 불리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1958년 7월, 카스트로는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나와 바티스타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북부와 동부 등으로 나뉘어 아바나로 향했다. 카스트로는 350명의 부대를 이끌고 산토도밍고에서 1,000여 명의 정부군을 항복시켰고, 결국 1958년 12월 31일에 바티스타는 도미니카로 망명했다. 하루 뒤인 1959년 1월 1일에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아바나에 입성하여 새로운 혁명정부를 수립했다.

 

쿠바혁명

 

쿠바혁명은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1910년의 멕시코혁명, 1979년의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과 함께 20세기 라틴아메리카 3대 혁명이라고 평가받는 쿠바혁명은,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 혁명이었고 세계 많은 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카리브의 작은 섬나라 쿠바가 거대한 미국과 맞붙어 혁명을 성공시키고, 또 이 혁명의 진정성을 지켜냈다는 자부심과 사회변혁에 대한 자신감을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심어주었을 정도로, 쿠바혁명이 라틴아메리카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또한 쿠바혁명은 미국이 기존의 대 라틴아메리카 정책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미국이 시행해온 기존의 대 라틴아메리카 정책은, 기본적으로 1차 상품의 생산지로서 대토지 소유제를 유지하고, 정치적인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독재정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쿠바혁명은 미국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시행하는 데 장애물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러한 정책들을 시행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면서,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쿠바의 공산혁명의 침투를 저지하기 위해서 '라틴아메리카 마샬 플랜'이라고 불리는 '발전을 위한 동맹정책'을 내놓았다. 즉, 쿠바를 제외한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게 처음 10년간 약 200억 달러를 저이자 또는 무이자로 지원해서 이 지역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공산세력의 준동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정책은 미국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국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미국은 이를 위해서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국가가 미주기구를 통해 쿠바와 외교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를 끊도록 종용했다. 이에 멕시코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동참했다. 그러나 이 '발전을 위한 동맹정책'은 케네디가 암살된 후에는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미국은 다시 군사독재 정권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처럼 쿠바혁명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라틴아메리카 현대사에 하나의 커다란 획을 그었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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