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 카르데나스
멕시코혁명의 완성
'최고 통치자' 카예스와 혁명의 제도화
오브레곤의 뒤를 이어 1924년 12월 1일 카예스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오브레곤이 가장 신임했던 혁명 동지인 카예스는 토지개혁을 대규모로 실시하여, 그의 집권기간 중에 750만 에이커의 토지가 1,200만 명의 농민에게 분배되었다. 카예스는 오브레곤과 달리 1917년 헌법에 담겨 있던 반(反)교회 조항을 그대로 실천하여 보수세력 및 가톨릭교회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가톨릭교회 세력은 멕시코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암적인 존재였다. 이 교회세력의 제거야말로 멕시코혁명의 완수에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후아레스 집권 때만 해도 약 1,600명에 불과하던 성직자의 수가 디아스 통치기에는 5,000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수많은 교구와 신학교, 대학, 수도원을 거느리면서 정부에 필적할 만한 권력을 누렸다. 이들은 인권이나 사회정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카예스는 이제 더는 교회가 멕시코혁명을 배반하는 구심체가 되도록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에 교회세력은 1917년, 헌법은 교회의 권리를 침해하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카예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초등학교에서의 종교적 가르침이나 종교의 헌법에 대한 비방 금지, 공개적인 종교행사 금지, 종교 재산의 국가귀속 등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내용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에 대해서 교회세력은 반발했다. 이 반발은 단순히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디아스가 축출된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군대와 행정관료들, 방대한 토지를 차지한 대농장주들, 그리고 교회세력과 같은 디아스의 마지막 남은 세력들의 발악이었다.
그러나 1927년 여름이 되자 가톨릭교회들은 카예스의 강력한 대응으로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카예스가 4년 임기의 대통령을 마치고 오브레곤을 후보로 지명했다. 드디어 1928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출마한 오브레곤이 개정된 헌법에 따라 임기 6년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선 축하연에서 오브레곤은 가톨릭 신자인 호세 데 레온 토랄에게 살해당했다.
오브레곤이 암살되자 멕시코의 모든 권력은 아직은 현직 대통령이었던 카예스에게로 집중되었다. 카예스는 3명의 꼭두각시 대통령을 내세워 멕시코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특히 카예스는 1928년 오브레곤이 살해된 후, 오늘날 멕시코 제1야당인 제도혁명당(PRI)의 전신인 민족혁명당(PNR)을 창당했다. 카예스는 멕시코 정치의 불안정이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카우디요주의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개인적 충성심에 의한 정치를 지양하고, 이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멕시코혁명을 제도화하려 했다.
'타타' 카르데나스
농민들을 만나기 위해서 강을 건너는 카르데나스.
카르데나스는 선거에서 유효표의 98.19%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멕시코혁명 이전의 선거들이 국민의 마음이 아니라 카우디요들이 권력을 자랑하는 무대였다면, 카르데나스의 승리는 명실 공히 멕시코혁명에 대한 국민의 신뢰 표시였다. 당선 후 카르데나스는 정부에 대한 군부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그의 정치적 위상을 노동자와 농민 등 사회 하층계급을 바탕으로 정립하는 등, 카예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카르데나스는 카우디요들에게 의존하기보다는 멕시코 국민을 전적으로 신뢰했고, 대농장의 개혁과 에히도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토지개혁 실시, 가톨릭교회의 광신주의를 극복할 근대적 보통교육 실시, 산업자본들의 횡포를 견제할 노동자들의 협동단체 육성 등, 바로 멕시코혁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들을 실시해나갔다.
정직과 솔선수범의 카르데나스
카르데나스는 멕시코혁명의 진정한 완수란 혁명의 주체세력이 정직하고 솔선수범하며,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활발한 대화의 기회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르데나스 대통령은 모든 전신국에 매일 한 시간씩 무료 통신의 시간을 정하고, 누구나 전신국에 와서 대통령에게 무료로 전신을 보낼 수 있게 했다. 또한 대통령궁은 전국 각지에서 대통령을 면담하러 온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우리 국민들은 수백 년 동안 침묵을 강요당하면서 살아왔네.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이들이 말할 때 가만히 들어주는 거야"라는 말에서 카르데나스가 국민과의 대화를 얼마나 중요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지배계층의 사치와 향락을 조장하는 멕시코 시의 카지노를 폐쇄했고, 호화로움을 자랑하던 각종 클럽을 고아원이나 학교로 사용했다.
카르데나스는 토지개혁 또한 국민에게 겸손하고 솔선수범하는 마음가짐으로 추진했다. 토지개혁에 있어서 카예스와의 충돌은 불가피했지만, 노동자와 농민 조직들, 각종 시민단체가 카르데나스 정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여 카예스는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카예스를 비롯한 핵심 카우디요들의 제거로 인해 이제 멕시코에서 토지개혁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는 개인주의적 자영농 체제는 부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에히도'라는 집단 부락농장을 부활시켰다. 토지분배뿐만 아니라 농업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에히도 은행'을 설치하고 각종 학교와 병원을 확충했다.
이렇게 토지개혁이 성공하고 노동운동이 활성화되면서 혁명정신의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지만, 멕시코는 독립 이후로도 끊임없는 외세의 간섭과 침략, 특히 '북쪽의 거인'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특히 석유산업에 있어서 외세의 영향을 피할 수가 없었다.
멕시코혁명의 완결 - 석유의 국유화
디아스의 통치 기간에 멕시코 만 연안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미국과 영국계 자본들이 들어와 멕시코는 단숨에 세계적인 석유생산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석유생산에서 나오는 이윤은 멕시코 국민의 몫이 아닌 거의 전부가 외국자본의 몫이었다. 그러나 카르데나스는 구태여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가 소유자든 노동자들에게 많은 임금을 주고 국가 재정에 기여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멕시코의 석유산업에는 1만 3,000명이라는 노동자들이 있었으나, 많은 노동조합의 난립으로 집중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1936년 카르데나스 정부의 지원으로 결성된 '멕시코노동총연맹(CTM)'이 최저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등 다양한 요구 조건을 내세웠으나 석유회사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카르데나스는 초기의 석유산업의 국유화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접고, 헌법을 근거로 해서 멕시코에 들어와 있는 외국계 석유회사들을 국유화하여, 1917년 멕시코국영석유회사(PEMEX)를 설립했다. 이에 영국이 석유 국유화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멕시코는 당장에 영국과 국교를 단절했다. 그런데 당시 독일과 일본 및 이탈리아가 중심이 된 주축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던 미국은 이에 대한 반응을 자제했다. 만약에 석유문제로 멕시코를 강하게 압박한다면 멕시코는 불가피하게 주축국의 동맹으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석유 국유화가 선언되자 멕시코 국민뿐만 아니라 교회세력도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일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이로써 멕시코혁명은 완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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