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그링고

구름위 2014. 9. 19.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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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혁명 당시 정부군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는 농민군 대표들.
판초 비야(선그라스를 쓴 사람)와 에밀리아노 사파타(비야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는 멕시코혁명을 통해서 농민들을 위한 토지개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멕시코혁명

 

1910년에 일어난 멕시코혁명은 30여 년간 지속되었던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독재정치에 대항하여 시작되었다. 멕시코혁명은 쿠바 혁명, 니카라과 혁명과 함께 라틴아메리카의 3대 혁명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혁명은 1910년에서 1913년 사이의 1차 혁명인 마데로 혁명, 1913년에서 1920년 사이의 2차 혁명인 카란사 혁명, 1920년에서 1940년 아빌라 카마초가 대통령에 취임하는 멕시코혁명의 제도화 등 대략 3기로 나눌 수 있다.

 

혁명의 불길과 디아스의 항복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인민이라면 때로는 위대한 희생을 치러야 할 역사적 순간을 갖게 된다. 지금이 바로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그러한 희생을 치러야 할 때다. 우리 멕시코인이 독립을 쟁취한 뒤로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이 독재는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만일 독재를 조건으로 우리에게 평화가 주어졌다면, 이 평화는 우리 멕시코 민족에게는 수치로 가득한 평화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법이 아니라 폭력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독재의 목표는 국가의 번영이 아니라 소수집단의 번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마데로의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을 기점으로 1910년 10월 멕시코 전역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다. 이 선언문에는 7월에 실시된 선거는 무효며, 따라서 디아스의 대통령직도 인정되지 않고, 대신 마데로를 멕시코의 임시 대통령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한 모든 멕시코인은 조국을 위해, 자유를 위해 1910년 11월 20일 오후 6시를 기해 일제히 봉기할 것을 촉구한다는 등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멕시코 각지에서도 마데로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면서 봉기했다. 혁명군의 대부분은 삶의 터전을 상실한 농업 노동자로서, 혁명의 열정에 불타고 있던 이들의 공통점은 디아스에 대한 증오였다. 이들은 디아스야말로 멕시코를 망친 병의 근원이라고 믿었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봉기했다.

 

혁명군의 지도자 마데로는 후아레스 시를 멕시코 혁명정부의 후보지로 생각, 이를 점령하여 디아스에게 사임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에 병들고 지친 노(老)독재자 디아스는, 자신의 사임을 알리는 성명서를 남기고 30여 년간의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유럽으로 망명했다.

 

마데로와 사파타

 

혁명 후 1911년 11월 대통령이 된 마데로는, 또 다른 혁명군의 지도자 사파타와 갈등을 일으켰다. 마데로는 멕시코 민중이 원하는 것은 빵보다는 자유라고 생각한 반면에, 사파타는 원주민으로부터 불법적으로 빼앗은 농토의 반환과 대농장 토지의 3분의 1을 농민들에게 불하하는 등의 토지개혁을 요구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농장주들과 연방군으로부터 압력을 받은 마데로는, 사파타와 그들의 병사들에게 즉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것과 모렐로스를 떠날 것을 요구했다. 마데로의 배신에 할 말을 잃은 사파타는 마데로 정부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토지개혁'과 '사회정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아얄라 계획'을 발표했다.

 

한편, 혁명 동지들에 의한 반란에 시달렸던 마데로는, 디아스 정권하에서 탁월하게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던 빅토리아노 우에르타를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우에르타는 본래부터 디아스의 충직한 심복으로서 구체제 인사들 사이에 인기가 있던 인물이었다. 결국 멕시코혁명의 선구자인 마데로는 자신이 중용한 우에르타의 지지세력에 의해 1913년에 살해당했다.

 

혁명의 암살자 - 우에르타

 

마데로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우에르타는 먼저 사파타에게 공직을 제안하는 등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사파타는 우에르타를 '권력에 눈이 멀어 주인을 죽인 자'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항한 투쟁의지를 다졌다. 우에르타는 행정력을 지닌 각 주의 주지사들을 위협하여 자신의 집권을 인정하게 했다. 그러나 코아우일라 주지사였던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우에르타에게 반발했다.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공화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후계자로 자처했다. 그러면서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과 동북부와 서북부에서 각각 시민혁명군을 조직해 우에르타에 저항했다. 또한 멕시코 북부에서는 판초 비야가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여 우에르타군과 싸워 계속 승리를 거두면서 멕시코 시를 향해 남하했고, 멕시코에 인접한 남부지역에서는 사파타가 투쟁했다.

 

이렇게 멕시코 각지에서 우에르타의 정부군에 맞선 혁명군의 기세에 눌린 우에르타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915년 8월 15일, 드디어 오브레곤 지휘하의 혁명군이 멕시코 시에 입성했다.

 

오브레곤과 카란사의 승리

 

멕시코 시를 장악한 카란사는 판초 비야-사파타 연합전선과 주도권 경쟁으로 갈등을 빚었다. 특히 토지개혁 문제에서는 카란사와 사파타와의 화해가 불가능했다. 1914년 10월 아구아스칼리엔테에서 혁명에 성공한 지도자들의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판초 비야-사파타 연합전선의 '아얄라 계획'과 정치적 자유만을 주장하는 카란사의 '과달루페 계획'이 서로 대립했는데, 판초 비야-사파타 연합전선이 더 우세했다. 이에 카란사는 오브레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추구했으나, 판초 비야-사파타의 연합전선은 오브레곤을 멕시코 시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사파타군과는 달리 멕시코 시를 점령하고 있던 판초 비야군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졌다. 한편 베라크루스로 쫓겨 갔던 오브레곤의 대반격에 의해 판초 비야군은 괴멸되었다.

 

그 후 케레타로에서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1917년에 멕시코혁명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했다. 이 헌법에는 농지의 유상몰수와 유상분배, 모든 지하자원의 국가 소유, 외국인과 교회의 토지 소유 금지, 교회나 개인의 교육기관 운영 금지, 초등교육의 국가 운영, 8시간 노동과 7시간 야간 노동, 12세에서 16세까지의 아동은 6시간 노동, 여성과 임산부의 보호, 최저임금제 실시, 성 혹은 국적의 차별이 없는 임금 지급, 노동조합 구성권 및 노동 쟁의권 부여 등의 개혁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17년에 카란사는 3월의 총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당당히 멕시코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1917년 새로 제정된 헌법에 따라 특권을 빼앗긴 교회세력의 위협, 혁명군에게 압수되어 분배되었던 토지를 이전의 지주들에게 돌려준 반(反)혁명적인 정책 등으로 인해서 카란사는 곤경에 처했다. 여기에 사파타가 자신을 진정한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카란사를 늘 불안에 떨게 했다. 결국 1919년 카란사 측근의 음모로 사파타는 암살당했다.

 

사파타

 

사파타는 토지가 비옥하여 사탕수수농업으로 유명한 모렐로스 주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지주들에 의한 토지의 독점과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 수세기 전부터 멕시코의 농민문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지역이었다. 사파타는 이러한 농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봉기했다. 이는 이상 속에 존재하는 정치권력을 위한 봉기가 아닌, 먹을 것과 자유를 주는 땅을 위한 봉기였다.

 

그러나 사파타는 1919년 카란사 정부의 사령관인 곤잘레스 장군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모렐로스의 돌멩이까지도 사파티스타다'라고 할 정도로 사파타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던 모렐로스 농민들에게, 사파타의 암살 소식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판초 비야와 그링고

 

1916년 1월, 판초 비야의 부하들이 열차를 타고 가던 16명의 미국인 기술자를 살해했다. 그리고 3월에는 판초 비야군이 미국 뉴멕시코 주의 콜럼버스 시와 시 외곽에 주둔해 있던 미국의 기병대에게 살인과 약탈을 저지른 후 국경지역으로 퇴각했다.

 

미국은 즉각 판초 비야를 추격했다. 존 퍼싱 장군이 이끄는 1만 2,000명의 미국 기병대가 멕시코 영토로 진입했다. 장장 10개월에 걸친 대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카란사 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퍼싱의 기병대는 멕시코 깊숙이 들어와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판초 비야를 추격했다. 보통 국경지역에서 양국 군대가 잠시 월경하는 일은 흔히 있었으나, 이처럼 깊숙이 침투하는 일은 명백히 멕시코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카란사는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미국의 추격으로 판초 비야는 완전히 괴멸되었지만, 한편으로 미국을 증오하고 있던 멕시코인에게는 판초 비야가 완전한 영웅으로, 카란사는 주권침해에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겁쟁이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그링고(Gringo)'라는 말이 생겼는데, 이는 멕시코인이 푸른색 제복을 입고 있던 미국 기병대들에게 했던 "푸른색 제복을 입은 자들(Greens)은 집으로 가라(go home)!"는 의미에서 나왔다. 이 말은 그 후 '미국인'을 가리키는 속어가 되었다.

 

판초 비야는 '멕시코판 임꺽정'이었다. 고아로 태어나 20여 년간을 도적질로 살아왔지만, 빼앗은 돈과 물건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멕시코혁명이 일어났을 때 3,0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마데로의 혁명군에 가담해 북부지방을 평정했다. 그는 스스로 북부군 사령관이 되어 농토를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많은 학교를 설립하는 등 농민을 위한 정책을 실시했다. 카란사와 결별하고 사파타와 동맹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실패한 후 카누티요로 돌아와 자신의 농장에 속한 농토 중에서 3분의 1을 자신을 호위하는 병사들에게 나눠주고 농사를 짓게 했다. 자신의 농장 안에 병원, 가게, 성당, 우체국, 학교 등을 짓고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판초 비야는 "불쌍하고 무식한 멕시코, 아마 교육 수준이 높아질 때까지는 좋은 일을 보기 힘들 거요. 나도 스물다섯이 되어서야 내 이름을 쓸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라고 말하면서 멕시코혁명이 완성되는 길은 교육뿐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1923년 판초 비야는 암살당했다. 멕시코의 민심은 암살의 배후로 오브레곤의 후계자 카예스를 지목했다.

 

카란사의 죽음과 오브레곤의 집권

 

한편, 카란사가 혁명 후 보여준 비민주적 행태는 디아스의 시대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카란사와 함께 우에르타에 대항해 싸웠던 오브레곤이 사파타 다음으로 카란사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었다. 오브레곤은 1919년에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오브레곤은 전국을 순회 연설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이에 대해서 카란사는 오브레곤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였지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오히려 압박의 방향은 카란사에게로 향했다.

 

이에 카란사는 자신의 전용 열차에 다량의 금과 은을 싣고 베라크루스로 피신했으나, 1920년 5월 21일 새벽 4시 푸에블라의 산악지대에서 살해당했다. 사파타가 카란사의 음모에 의해서 암살당한 지 약 1년이 지난 뒤였다.

 

이제 늙은 수염이 사라졌네
틀락스칼란톤고에서
머리 좋은 원숭이를 하나 데려오게나
그들이 우리의 모래주머니를 떼주었다네


사파타의 경우와는 달리 멕시코에서 카란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목소리는 찾기 어려웠다. 그 대신 이처럼 그의 죽음을 즐거워하는 노래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었다.

 

1920년 12월 1일, 40세의 오브레곤은 멕시코 대통령에 취임했다. 오브레곤은 제한적이지만 1917년 헌법의 내용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먼저 자신이 집권하는 데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던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폈다. 오브레곤은 노동운동의 허용뿐 아니라 노조회의에 참석하는 노조 대표자들을 위해 철도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승차권을 발부하는 등 여러 가지 지원책을 내놓았다.

 

오브레곤은 마데로나 카란사와 같이 대농장주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토지개혁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농장 체제의 해체와 자영농 혹은 에히도 중심의 집단농으로의 전환으로 인한 농업 생산성의 하락을 우려해서, 점진적이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토지개혁을 진행해나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브레곤의 혁명 완수에 대한 의지는, 호세 바스콘셀로스를 교육부 장관에 발탁해서 교육혁명을 실천한 것에 잘 나타났다. 바스콘셀로스는 원주민을 포함한 전 국민에게 기초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농촌의 기초교육 시설의 확충을 최우선 과제로 채택했다. 그는 "나는 원주민들을 무언가 색다른 존재로 간주하여 여타 사람들과 분리되도록 가르치는 북아메리카 선교사들의 방법을 반대한다"라고 말하면서 원주민에 대한 교육을 강조했다. 바스콘셀로스는 또한 벽화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수 없었던 민중들에게 벽화가 멕시코에 대한 자긍심을 줄 수 있는 호소력 있는 매체라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많은 벽화가를 초대하여 각종 관공서 건물의 벽화를 제작하게 했다. 디에고 리베라,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등이 바로 이 벽화운동을 통해 멕시코 예술을 세계에 알린 벽화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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