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론과 에비타
대통령에 재선된 뒤(1952년) 국민들의 환호에 답하는 페론과 에비타.
아르헨티나는 187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유럽에 많은 농축산물을 수출하여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풍부한 자원에 비해 자본과 노동력이 부족했던 아르헨티나는 영국으로부터 자본을, 유럽으로부터 이민을 받아들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한동안 수출입이 줄고 소비재가 부족해지는 등 경제성장이 둔화되었지만, 1920년대 중반에 유럽시장으로 곡물과 육류 수출이 재개되면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정상 상태를 회복했다.
그러나 1929년부터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은, 농축산물을 수출하고 공산품의 수입에 의존했던 아르헨티나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즉, 수출은 급격히 줄고 대외부채와 자본 유출이 증가하여 심각한 재정 적자에 시달렸으며 실업률도 증가했다. 정부는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고자 보호주의 정책을 폈지만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 그 후 1930년 우리부루 장군의 쿠데타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는 지속적으로 군부의 정치 개입을 겪어야 했다.
노동계급의 대변자, 페론
1943년에 후안 도밍고 페론을 주축으로 한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페론은 임금인상, 주 60시간 노동, 동일 노동의 남녀 차별 폐지와 해고 노동자의 복직 등을 요구했던 육류 포장공들의 파업에서 노동자에게 유리한 결론을 이끌어냈다. 또한 당시 분열로 어려움을 겪던 노동자 조직의 대표격인 노동총동맹(CFT)을 통합하는 등, 노동운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노동계의 파업과 분열을 해결한 페론은 노동부 장관직을 맡아 노동계급과 연대하여, 주변부에 머물고 있던 노동계급을 중심세력으로 편입시켰다. 당시 노동계급은 수적으로 팽창했지만 대다수가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고, 노동운동은 매우 관료화되어 노동자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페론은 노동계급의 대변자로 자처하면서 노동자들의 작업장과 본부를 직접 방문했다. 그리고 지도부를 매일 만나고 그들의 집회에 참여했다. 연설을 통해서 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리를 강조했고, 이에 노동자들은 페론에 많은 지지를 보냈다.
1944년, 페론은 부통령 및 노동복지부 장관까지 겸임했다. 페론의 급속한 지위 상승으로 군부 내에 반대파가 형성되었다. 여기에 미국도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페론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결국 페론은 1945년 마르틴 가르시아 섬에 유배되었다. 그러자 '데스카미사도스(Descamisados)1)'라고 언론에게 조롱당했던 수많은 노동자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대로를 메우고 '페론 만세'를 외치는 등 광범위한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정부는 이들의 반발에 굴복하여 페론을 석방했다. 석방 이듬해인 1946년 페론은 자신을 지지하는 노동계급의 지도자들을 주축으로 노동자당을 만들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당의 후보들은 공산주의자부터 보수파에 이르는 다양한 반대세력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상원과 하원 두 곳을 제외한 주지사 선거까지 모두 휩쓸었다. 집권 초기 환율 인상으로 제조업 부문의 수출이 부진해지고 미국 자본이 침투하자,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와의 협정을 통해 제조업 수출을 도모하면서 제조업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했다. 이와 함께 국제 정세도 페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미국과의 불편한 관계도 해소되었고, 5개년 경제계획을 통해 국민 총생산이 29%가량 늘어남으로써 외환 보유고도 증대되었다.
한편, 페론의 집권과 함께 노동자의 시대가 열림으로써 많은 혜택이 노동자에게 돌아갔지만 역설적이게도 파업권은 인정되지 않았다. 때문에 노조가 정부의 허가 없이 파업에 돌입할 경우, 페론정부는 파업의 주동자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이처럼 노조는 많은 물질적 이득과 정치적 영향력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성을 상실한 채 가부장적인 후견인의 보호 속에 안주했다.
페론과 에비타
한편 페론은 첫 번째 부인을 암으로 잃고 난 후, '에비타'로 알려진 여배우 출신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와 1945년에 결혼했다. 두 번째 결혼이었다. 에비타는 시골뜨기 가출 소녀, 삼류 단역배우와 같은 밑바닥 삶을 전전하다가 자신보다 2배나 나이가 많은 페론과 결혼한 후, 페론 못지않은 카리스마와 열정으로 1949년까지 페론 정부의 2인자가 되었다. 에비타는 노동, 보건, 자선 분야의 일을 맡아 병원, 학교, 고아원, 양로원 건립을 주도해 노동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또한 자선단체 '에바 페론 재단'을 운영하면서 빈민구제에 힘썼으며,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는 등 여권신장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의 기수' '페론의 방패' '데스까미사도스의 전권대사' '페론과 대중을 이어주는 사랑의 교량' 등의 칭호를 들었던 에비타는 1952년 33세의 나이에 자궁암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사망은 아르헨티나를 비탄 속에 빠트렸다. 그녀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무려 한 달간이나 치러졌다. 사람들이 자기를 잊지 않도록 해달라는 에비타의 유언대로 에비타의 시신은 썩지 않게 처리하여 노동부 건물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1955년 페론을 축출하고 정권을 잡은 군부는, 전시된 에비타의 시신이 노동자들의 봉기에 상징으로 이용될 것을 우려했다. 그만큼 에비타의 시신은 노동자들을 하나로 결집시킬 만큼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군부정권은 치밀한 작전을 통해서 에비타의 시신을 이탈리아 밀라노 근처의 작은 공동묘지에 매장했다. 그 후 에비타의 시신은 우여곡절 끝에 1971년 스페인에 망명 중이던 페론에게 돌아갔고, 그녀가 죽은 지 24년 만인 1976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콜레타 공동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페론의 재집권, 그리고 사망
아르헨티나에서는 페론의 축출 이후 1983년까지 15명의 대통령과 여덟 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하는 등 극도의 정치혼란이 발생했다. 페론이 축출된 후에 정권을 잡은 대통령들은, 페론이 활성화시킨 노동자 조직의 통제를 위해 페론은 물론 그와 관련된 모든 정당의 정치활동을 철저히 금지했다. 그러나 페론파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여기에 망명 중이던 페론의 원격 조종도 한몫했다.
결국 페론에 대한 지지자들의 숭배가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여, 18년간의 페론파의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1973년 대통령 선거에서 페론파의 엑토르 캄포라가 당선되었다. 그는 집권 후 곧바로 사임하여 망명지에서 귀국한 페론이 권좌에 복귀할 수 있도록 했다. 집권한 페론은 여러 세력 사이의 화해와 조정을 통해 국민통합의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지만, 석유파동에 따른 국제적인 경기침체는 국내 정치상황에 악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1974년, 페론은 당선된 지 8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부통령이던 아내 이사벨 페론이 뒤를 이었다. 무용수였던 이사벨은 1956년에 페론을 만난 뒤 페론의 개인비서가 되어, 망명을 떠나는 그를 따라 마드리드로 가서 1961년 결혼한 페론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이사벨 페론 정부는 물가앙등과 노동계의 불안, 정치폭력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채 출범했다. 그녀는 내각 각료들을 새로 임명하고 화폐를 발행해 외채를 상환하고자 했으며, 국가가 무정부 상태 직전까지 이르게 된 1974년 11월에는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독직과 테러활동으로 인해 강제로 추방당한 이사벨 페론 정권의 사회복지장관 로페스 레가를 둘러싼 논쟁이 그녀를 불리하게 했다. 온건파 군 장교들은 그녀의 사임을 촉구했으나 페론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동안 정국이 혼란해지고 경제침체가 가속화되었으며, 정치적 폭력의 수위는 높아졌다. 결국 1976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비델라 장군이 1981년까지 집권했다.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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