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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인민혁명동맹, APRA

구름위 2014. 9. 1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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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인민혁명동맹, APRA

 

페루

 

 

페루의 수도 리마 남쪽의 빈민촌.
페루는 독립 후, 전쟁에서의 패배, 그에 따른 경제쇠퇴와 정치 불안 등을 겪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도 이러한 혼란한 상황은 그대로 이어져서, 페루에는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러한 빈민촌이 많이 존재한다.
 
새로운 조국

 

페루는 1835년 칠레-아르헨티나와의 전쟁과 칠레와의 태평양 전쟁에서 패했다. 이로 인해서 페루는 전쟁비용 충당에 따른 대외부채의 증가, 핵심 수출품목인 초석의 상실과 주변국과의 군비경쟁에 따른 경제쇠퇴 등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이 정치적인 불안과 겹치면서 혼란은 극에 달했다.

 

1919년, 페루는 아우구스토 베르나르도 레기아의 독재체제를 맞이했다. 1908년에 이어 1919년에 군부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레기아는, 다수의 반대파로 이루어진 의회를 해산한 후 입법회의를 구성하여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레기아는 '새로운 조국' 건설을 앞세워 도시 중산층을 중심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또한 국제석유회사(IPC)와 같은 외국기업을 유치했고,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에서는 최대 규모의 외자를 도입하여 도로와 철도, 항만, 관개수로 건설 등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했다. 그의 집권기에는 페루 최대의 노동조합(CORP)이 조직되어 이를 바탕으로 사회당과 노동당이 생기기도 했다. 11년간 페루를 통치한 레기아는 1930년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로 사임하고 영국으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체포되어 투옥된 후 1932년 사망했다.

 

빅토르 라울 아야 데 라 토레의 APRA

 

1920년 레기아에 의해서 추방된 빅토르 라울 아야 데 라 토레는, 1924년 멕시코에서 미주인민혁명동맹(APRA)을 결성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혁명은, 가난에 허덕이는 프롤레타리아보다는 투쟁의식이 강한 지식인과 중산층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후진성은 제국주의의 착취에 그 원인이 있다고 진단하고, 국가가 경제발전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서 서구 자본주의의 초기단계에서 나타났던 부작용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 원주민들의 집단주의 전통을 지키고, 그 위에 새로운 농업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의 개혁을 통한 반(反)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성향을 가졌던 그는 APRA를 결성하여, 원주민의 인권회복,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적 통합, 반미 투쟁, 그리고 주요 생산분야의 국유화 등을 위해 투쟁했다. 또한 원주민을 사회에 동화시키고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산업화 및 민주화시켜야만, 국제정치에서 라틴아메리카가 중대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사이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중산층과 젊은 지식인층, 그리고 노동자들이 APRA의 사상을 추종함으로써, 빅토르 라울 아야 데 라 토레는 페루 정치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페루로 돌아와 1931년 APRA를 결성했다. 이는 1931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그러나 산체스 세로의 부정선거로 집권이 좌절되고, 이어서 APRA는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APRA당은 1932년 트루히요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1933년 APRA의 한 당원이 산체스 세로 대통령을 암살했다. 이후 정부군과 대립상태가 되면서 APRA는 공산주의와 쿠바혁명에 대한 반대 표명과 소수 지배세력과의 제휴 시도 등, 강경노선을 온건노선으로 바꾸고 마침내 반미혁명 노선을 포기하였다.

 

그 후 집권에 계속 실패하다가 1985년 APRA 출신인 36세의 알란 가르시아가 집권에 성공했다. 1924년 APRA 창당 이후 최초로 집권에 성공한 것이었다.

 

벨라운데 대통령

 

레기아 정권이 1930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붕괴된 후 1962년에 군사 쿠데타가 발생할 때까지, 페루는 군부 반란, 대통령의 암살, 경제 악화 등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를 겪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도 80% 이상의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등 사회적 불평등이 극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석유 같은 국가의 주요한 자원은 대부분 외국의 다국적 기업의 수중에 있었으며, 여기에서 나오는 이익 역시 소수의 지배층에게 돌아갔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려 했던 인물이 바로 1963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벨라운데였다. 그는 APRA 정책의 많은 부분을 수용하여 저렴한 임대주택과 학교 신설, 사회보장제도의 확대, 도로 건설 등 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해나갔다. 특히 벨라운데 대통령은 1964년에 농지개혁법을 시행하여 많은 수의 농민이 혜택을 받도록 했다. 또한 국제석유회사(IPC)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나, 페루 원유의 98%를 통제하고 있던 국제석유회사의 강력한 저항으로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로써 국제석유회사는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석유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는 군사 쿠데타 발생의 원인이 되어 벨라운데 대통령의 퇴진을 불러왔다.

 

그 후 군사정권이 이어지면서 대부분의 외국기업을 국유화시키고, 농지개혁으로 수용된 토지와 사유농장을 협동농장이나 소농들에게 분배하는 민족주의 성향의 혁명적인 개혁정책이 추진되었다. 또한 독립된 외교노선을 구사하여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승인하고,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9년에 APRA의 창시자인 빅토르 라울 아야 데 라 토레의 사망으로 사회가 혼란해졌고, 결국 1980년 선거에서 전직 대통령인 벨라운데가 다시 당선되어 12년간의 군부 통치가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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