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가스 대통령
1930년 혁명
브라질에서는 독립 이후 왕정체제를 거쳐 1899년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1공화정이 전통적 과두지배자에 의해 좌우되었기 때문에, 비록 정치적으로 평온함을 유지했으나 브라질의 정치구조와 사회구조는 변화되지 못했다. 이는 각 소외계층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농촌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도시지역에서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빈번히 일어났다. 여기에 유일하게 호황을 누리던 커피산업마저 1929년의 대공황으로 인해 불황의 늪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 전반의 변화와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필요로 했는데, 1930년 혁명을 통해 등장한 바르가스가 이를 실현한 인물이었다. 바르가스는 주 하원에 이어 1928년 히우그란지두술의 주지사를 역임하면서,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온 히우그란지두술에서의 공화파와 연방파 간의 정치적 대립을 종식시켰다. 이러한 정치적 조정 능력으로, 그는 혼탁했던 브라질 정치에서 조정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힐 수 있었다.
그런데 1930년 대통령 선거에서 워싱턴 루이스 상파울루 주 출신 대통령이 차기 대통령 후보를 자신과 같은 주 출신을 지명했다. 이는 그동안 유지되어온 '카페 콩 레이치1)'의 암묵적인 협약을 위반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서 부통령 후보가 암살되는 등 브라질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혼란을 틈타 1930년 소장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당시 히우그란지두술 주의 주지사였던 바르가스를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바르가스의 '신(新)국가 체제'
바르가스가 집권했을 때 브라질은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경제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미나스제라이스 주를 제외한 각 주지사를 해임하고, 그 자리에 1930년 혁명에 가담했던 군 소장파 장교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각 주정부의 군대를 연방군 소속하에 두어, 각 주로 분산되어 있던 권력을 중앙정부로 집중시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파울루 등지에서 폭동이 발생했지만, 바르가스는 이를 진압하고 1934년에 삼권분립과 대통령 중심제를 골자로 한 헌법을 새로 제정했다. 이 헌법에 따라 간접선거를 통해 의원들이 선출되고 바르가스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37년에 바르가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상, 하원을 해산시키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놓았던 신(新)헌법을 공포하여 신(新)국가(Estado Novo) 체제를 선언했다. 대부분의 브라질 중산층과 일반 국민의 지지2)를 받았던 바르가스의 신국가 체제는, 좌파 정치인의 활동을 제한하고 국가비상사태의 선포와 함께 대통령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했다. 한편 바르가스는 노동자에 대한 사회보장제도, 최저임금제도, 주 6일 노동 및 1일 8시간 근무제 등의 포퓰리즘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바르가스의 신국가 체제에 대한 반발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 두 번째 대통령 선거에도 바르가스가 입후보했으나,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1945년 후보 사퇴와 함께 대통령직도 사임하고 귀향했다. 그러나 바르가스는 상원의원을 시작으로 상파울루 주와 히우그란지두술 주의 전통적 지배계층과 유대를 맺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했다.
이러한 기반을 토대로 해서 독재자의 이미지를 벗고 민주적인 정치인으로 거듭나려고 노력했던 바르가스는, 195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전체 투표의 49%를 획득해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다. 바르가스는 빈민의 아버지, 노동자들의 지도자,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은 정치 지도자로 불리길 원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바르가스의 2차 집권기를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했다. 바르가스는 젊은 기술관료들을 중심으로 국가 경제발전의 계획을 세우고, 석유산업의 국유화 정책을 펴는 등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외국자본의 이탈과 신용도 하락으로 경제정책의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다. 여기에 국제시장에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해 수출이 감소하고 경상수지 적자가 늘어나며, 외환 위기의 가능성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자와 중산층의 시위도 격화되어, 결국 군부, 의회, 언론 등의 사임 요구로 바르가스는 곤경에 처했다. 결국 바르가스는 1954년 8월 24일 새벽 각료회의를 주도하던 도중에 회의장 밖에서 총으로 자살했다.
이로써 1930년 혁명부터 1954년 사망할 때까지(1945년에서 1950년까지의 기간 제외) 무려 19년간이나 지속되었던 바르가스 시대가 종식되었다.
삼바와 축구 - 바르가스의 문화정책
대표적인 것으로 삼바를 들 수 있는데, 바르가스는 삼바를 브라질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 아이콘으로 성장시켰다. 바르가스의 정책적인 지원과 라디오의 보급으로 삼바가 리우데자네이루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하여, 오늘날 카니발의 대표적인 음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브라질의 각 지역에서 행해지던 카니발을 활성화하기 위해 최초로 삼바학교를 지원했으며, 1935년 삼바학교의 카니발 팀들이 처음 행진을 시작하면서 삼바 카니발이 브라질의 대표적인 공연문화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포츠 부문에서도 많은 변화가 발생했다. 19세기 말 영국의 무역업자와 선원들을 통해 브라질에 들어온 축구는, 초기에는 백인이 클럽 운영을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자신들만의 여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하지만 바르가스의 집권기에 브라질의 국기(國技)로 자리 잡았다.
바르가스의 이러한 노력들이 브라질의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다.
인플레이션과 외채
바르가스의 자살 이후, 브라질의 대통령들은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한 물가 상승, 파업의 확산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계속되는 사회적 혼란을 종식시키고자 1964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군부의 지도자들은 헌법의 수호, 민주선거, 의회와 정당의 활성화 그리고 언론의 자유 등을 약속했지만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다. 경제 부문에 있어서도 '브라질의 기적'이라 할 정도로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으나 엄청난 외채로 경제적 부담이 커졌고, 임금인상과 같은 노동자의 요구가 억제되면서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불안과 국민의 불만은 군부독재의 정치적 위기를 불러왔다.
그 후 주제 사르네이와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통화개혁, 물가동결과 통제, 국영기업의 민영화, 외국자본에 대한 개방, 정부 예산의 삭감 등 초강력 반(反)인플레이션 정책을 시행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콜로르 대통령은 독직사건으로 탄핵을 받아 사임하고, 그의 뒤를 이어 부통령이었던 이타마르 프랑쿠가 대통령이 되어 콜로르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채웠다.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