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석유의 나라

구름위 2014. 9. 1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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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후안 비센테 고메스

 

'작은 베네치아' 베네수엘라는 19세기 초 남미 '해방자'로 불린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콜롬비아, 에콰도르와 함께 '그란 콜롬비아 연방공화국'이 되었다가 베네수엘라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그 후 독재자들의 통치가 계속되었는데, 1908년 미국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고메스도 그 중 하나였다. 안데스 산악지방 타치라 주의 목동 출신이었던 고메스는, 목축업을 기반으로 1899년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는 1908년 대통령이 된 이후 1935년 사망할 때까지 27년간 베네수엘라를 통치했다.

 

그는 먼저 정치안정과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군부를 최신무기로 무장시켜 카우디요들의 반발을 잠재웠다.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서는 군부뿐만 아니라 경찰과 비밀기관 등을 동원했고, 이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인사에 대해서는 투옥과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고메스의 이러한 반대세력 제거 및 정권유지의 비용은 석유개발을 통한 이익에서 충당되었다.

 

이렇게 국내정치를 안정시킨 고메스는, 석유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는 대농장주들의 불법을 구실로 해서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자신의 가족이나 심복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권력을 잡은 후에는 외국자본가에게 석유 개발권을 양도하고 그에 따른 수익의 대부분을 착복하여 부를 늘려갔다.

 

마라카이보의 석유

 

 

마라카이보 호(湖)의 유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에서 석유는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렇게 고메스가 자신의 부를 확대시킴과 동시에 독재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전통적인 수출산품이었던 커피 가격이 상승되고 1918년 마라카이보 호(湖)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석유 생산량은 경이적인 속도로 증가하여, 1928년 무렵에는 이미 세계 2위의 석유 생산국이자 세계 1위의 석유 수출국이 되었다. 소규모의 가난한 도시였던 마라카이보 시는 인구가 급증하여 대도시가 되었고, 수도 카라카스는 영국과 미국의 석유회사 본부나 은행이 들어와 일약 국제적인 도시로 발돋움을 했다. 그 후 석유는 마라카이보 호(湖) 이외에 동부의 팔콘 주나 남부의 아푸레 주, 바리나스 주에서도 생산되어, 세계 석유시장에서 차지하는 베네수엘라의 영향력은 점차 증대되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다섯 번째의 산유국이 되어 석유가 전체 수출의 80%를, 국가 재정수입의 42%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1929년에 후안 바우티스타 페레스가 집권했다. 그러나 석유로 인한 경제성장과는 달리 정치 및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어 사임하고, 1931년 고메스가 다시 집권했다. 그러나 석유 생산 노동자들은 고메스 정권의 계속된 독재와 부패 등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임금인상과 노동 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35년 고메스가 79세로 사망하자 노동자들의 요구가 폭발하여, 석유산업 시설에 불을 지르고 외국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등, 전국적인 폭동이 발생해 정국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 특히 분노한 일부 군중은 오랜 기간 동안 베네수엘라의 부와 권력을 독차지했던 고메스 일가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의 추종자들을 살해하기까지 했다. 이에 고메스 일가는 카리브 해의 섬으로 망명을 가야만 했다.

 

로물로 베탄쿠르

 

1935년에 고메스가 사망한 후, 당시의 국방장관이었던 엘레아사르 로페스 콘트레라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엘레아사르 로페스는 사회적 요구를 받아들여 정치범을 석방하고, 고메스 정부가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운영했던 모든 조직을 해체했다. 그러나 대중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 활성화되고 야당의 좌익연합인 국민민주당(PDN)의 세력이 커지자, 엘레아사르 로페스 대통령은 '질서 수립'이라는 구실로 다시 진보적인 정치단체와 국민민주당을 불법화시켰다. 이때 좌익 진영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인물이 바로 로물로 베탄쿠르였다.

 

독재자 후안 고메스 비센테와 극명하게 대비되어 20세기 베네수엘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베탄쿠르는, 고메스의 독재가 시작된 1908년에 태어났다. 혹독했던 독재자의 치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베탄쿠르는 대학시절 '28세대'라고 불린 고메스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여 투옥되었다. 이어 콜롬비아의 쿠라사오로 추방된 이후 1936년 말까지 도미니카 공화국, 코스타리카, 트리니다드 토바고, 푸에르토리코 등 여러 국가에서 정치적 망명생활을 하면서 베탄쿠르는 새로운 배움과 경험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로물로 베탄쿠르가 추방되었을 때 그는 칠레에서 사회당의 수뇌였던 살바도르 아옌데와 친교를 맺었다. 칠레에서 베네수엘라로 다시 돌아온 베탄쿠르는 1945년에 청년 장교들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 청년 장교들은 무능하고 전문성이 부족한 타치라 주 출신의 군 고위층이 계속 군부 내 세력을 장악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베네수엘라의 첫 정당이라고 할 수 있었던 민주행동당(AD)이 제시하는 민주적인 선거와 언론의 자유 등 개혁정책을 지지했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년간 베탄쿠르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민주행동당의 대통령으로서 베네수엘라를 통치하면서 꾸준히 개혁정책을 펴나갔다.

 

푼토피호 협약

 

민주행동당의 후보이자 베탄쿠르의 유년시절 스승이었던 소설가 로물로 가예고스가 베탄쿠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로물로 가예고스는 고메스의 독재를 비판한 소설인 〈바르바라 부인(Doña Bárbara)〉을 쓴 작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가예고스는 군사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고, 다시 1958년까지 군사독재 시대가 들어섰다. 쿠데타 이후 베탄쿠르는 1949년 쿠바 아바나로 망명한 이래 10년간 코스타리카, 미국, 푸에르토리코 등지에서 또다시 긴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그 사이 국내 정치상황이 변해서 1958년 민주행동당의 후보로 나선 베탄쿠르가 1959년에서 1964년까지 6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베탄쿠르의 당선 후 여당인 민주행동당은 야당인 민주공화동맹(URD), 기독교사회당(COPEI)과 '푼토피호(Punto Fijo, 고정) 협약'을 체결했다. 이는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공산당을 배제하고, 선거 실시 이후에는 어느 정당의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공동으로 지지하면서 연립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이 협약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헌법의 수호와 선거를 통한 통치, 둘째 야당의 정부 참여를 통한 거국내각의 구성, 셋째 최소한의 공동정책 채택으로 선거 과정에서 정당 간의 협력 보장 등이다. 이로써 베네수엘라는 상대 당 정치 엘리트를 각료로 임명하는 등의 화합정책을 통해서 정치적 안정을 기할 수 있었고, 특히 군부의 정치 개입과 독재자의 등장을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통해서 베탄쿠르는 1961년 헌법개정을 통해 시민의 자유권 보장, 양원제 채택, 대통령의 연임 금지와 재선의 입법화 등을 정착시켰다. 또한 베네수엘라 석유공사(CVP)를 설립하여 석유산업을 국유화했다. 그리고 농지개혁법을 시행하여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이외에도 철강, 석유화학, 알루미늄 등과 같은 기초산업에 대한 정부의 참여를 강조하고, 교육, 산업, 보건위생에 대한 정책도 강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베탄쿠르의 치적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는 1960년 당시 세계 5대 석유생산 수출국이었던 이라크,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와 함께 석유의 생산 과잉을 통한 원유의 국제가격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 기구를 설립했다.

 

석유와 베네수엘라

 

베탄쿠르 이후 40년간 민주행동당(AD)과 기독민주당(COPEI)이 계속해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해왔기 때문에 정치가 안정되었다. 특히 민주행동당은 석유 수출로 인한 부를 가지고 대중의 복지 향상에 힘을 쏟았다.

 

1973년 선거에서 당선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은, 국내 석유산업을 좌지우지했던 외국의 석유회사들을 축출하고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면서 국영석유공사(PDVSA)를 설립했다. 이어 외국계 철강회사들도 국유화했다. 여기에 들어간 재원은 석유 가격 인상 덕분에 4배 늘어난 석유 수입으로 충당했다. 그는 대외정책에도 적극적이어서 1970년대 중반 이후 중미지역의 분쟁 해결을 위해 카리브 해의 빈곤한 도서 국가들과 중미국가들에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1975년에는 멕시코와 함께 라틴아메리카경제기구(SELA)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밖에 쿠바와의 외교 재개,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유대 강화 등을 통해서 국제사회에서 베네수엘라의 위상을 높였다.

 

그의 뒤를 이어 기독교 사회당과 민주행동당의 후보들이 차례로 대통령이 되어 베네수엘라를 통치했다. 하지만 부패의 만연, 석유 수출로 얻은 부의 불평등한 분배, 유가 하락에 따른 외채의 증가, 인플레이션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89년에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가 국민의 압도적 지지로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경제 회복을 위해 석유의 소비자 가격과 교통요금을 인상하고 임금을 삭감했으며, 일부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도입했다. 이에 전국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여 수백 명이 사망하는 등 사회가 혼란에 빠졌다. 또한 베네수엘라 노동총동맹(CTV)은 총파업을 주도하여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는 페레스 정부의 전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反)신자유주의 민중봉기였다. 또한 석유 가격의 하락으로 인해 베네수엘라 경제는 더 나빠졌다. 1991년 베네수엘라 노동총동맹의 임금인상 요구, 1992년의 두 번에 걸친 유혈 쿠데타 기도, 대통령 자신의 정부기금 남용에 따른 기소의 위기 등으로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은 의회로부터 탄핵받아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1993년 물러나야만 했다.

 

1958년 이후 베네수엘라의 경제를 번영시켜 '경제 대통령'이라는 명성까지 얻었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은, 그의 경제적 업적 때문에 최초로 재선 대통령이 되었으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결과적으로 그는 석유가격 때문에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가 석유가격 때문에 국가의 반역자가 되었던 '석유에 살고 석유에 죽었던' 대통령이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석유 생산으로 소득이 늘면서 소비 풍조가 만연해지고, 부가가치가 낮고 힘들고 어려운 농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면서 편의주의나 한탕주의가 만연했다. 정치인은 석유로 얻어진 재원을 국가발전에 사용하기는커녕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나 재산을 늘리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석유가격이 하락하면서 베네수엘라의 경제는 수렁에 빠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거세졌다. 이처럼 베네수엘라는 '석유'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하는 아이러니를 겪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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