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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운하

구름위 2014. 9. 19.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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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파나마운하의 건설 배경

 

1851~1855년에 미국의 금융업자들이 콜롬비아 정부의 허가를 받아 파나마 지협을 횡단하는 철도를 건설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파나마인이 희생되었고, 미국의 횡포에 불만을 품은 파나마인이 1855년과 1856년에는 미국인 소유의 철도와 미국 선박을 공격했다. 그러자 미국은 8척의 군함과 400명의 미군을 파나마에 상륙시켰다. 이때부터 미국은 군사 및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파나마운하의 건설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파나마운하는 원래 1878년 콜롬비아 정부가 수에즈운하를 건설했던 레셉스가 운영하는 프랑스 회사와 건설 계약을 체결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파나마운하 건설은 수에즈운하와는 달리 공사 구간의 중앙부가 높아 수평식 운하 건설이 적합지 못했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과 황열병 및 말라리아의 창궐, 그리고 프랑스 회사의 재정난 등으로 계획의 절반 정도만을 시행한 후 1889년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미국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파나마를 운하 건설 예정 지역으로 결정했다. 그 첫째는 1898년 쿠바에서 치렀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전함 오리건호가 미국의 서부 해안에서 남미 끝 마젤란해협을 돌아서 쿠바에 도착하는 데 총 22만 마일의 거리를 68일에 걸쳐 항해한 사실이었다. 그 둘째는 만약 중미지역에 운하를 건설하면 항해기간을 3분의 1로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은 1903년 1월 운하가 건설될 지역의 폭 10마일 내의 지역을 미국에 영구히 임대하는 내용의 헤이-에란 조약을 콜롬비아 정부와 체결했다. 이 조약은 99년 동안의 조차(租借)비와 운하지대 관리비로 1,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운하가 건설된 후에는 연간 25만 달러의 임대료를 지불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 그러나 콜롬비아 상원이 이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다. 그러자 프랑스 운하회사와 미국은, 콜롬비아 정부에 대한 파나마 지역 주민들의 오랜 불만과 콜롬비아 내전에 따른 이들의 독립 열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1903년 11월, 파나마 지협에서 미국과 프랑스 운하 건설회사가 배후 조종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콜롬비아는 파나마의 독립을 차단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미국은 파나마 지협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전함 내슈빌호를 이용해 콜롬비아군의 파나마 상륙을 저지하고 파나마의 독립을 지지했다. 미국은 파나마의 독립 선언 직후, 파나마운하 지역을 미국이 영구 임대하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1903년 파나마의 독립과 함께 파나마운하의 공사를 시작했다.

 

 

파나마운하의 건설.
남북 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파나마 지협을 횡단하여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이 운하는, 복잡한 지형과 풍토병, 막대한 공사비 등으로 공사가 지연되었다가, 1914년 8월 25일 공사를 시작한 지 12년 만에 완공되었다.
 
파나마운하

 

파나마운하는 1903년 파나마의 독립과 함께 공사가 시작되어 1914년 8월 15일에 완공되었다. 12년 동안 총 7만여 명에 공사비만 무려 4억 달러가 소요된 세계 최대의 토양댐과 인공호수, 콘크리트 구조물로 이루어진 엄청난 공사였다.

 

파나마운하는 총 길이가 82킬로미터고, 통과에 소요되는 시간만 8~10시간이며, 하루 평균 40척, 연평균 1만 3,000척의 배가 통과하고 있다. 운하 통과세가 연평균 5억 달러 정도인데, 이는 파나마 1년 수출의 15%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부가가치를 생각하면 엄청난 경제적 상품인 것이다. 이곳을 통과하는 대부분의 배는 화물선인데 미국은 주로 쌀, 옥수수, 사료 등 곡물을 아시아 국가에 보내고, 일본이나 한국 등 아시아 국가는 자동차 등을 파나마운하를 통해 미국 동부해안으로 보내고 있다.

 

미국의 파나마 침공

 

파나마는 운하지역 남북 10마일 범위의 땅에 대한 영구 임대권을 미국에 주고, 그 대가로 1,000만 달러와 매년 임대료로 25만 달러를 받기로 했다. 따라서 운하지대는 치외법권 지역으로서 사실상의 미국 식민지가 되었다.

 

이러한 미국의 영향력에 도전한 인물이 바로 아르눌포 아리아스였다. 그는 비록 미국 시카고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지만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때 그의 나이가 30세에 불과했기에 대통령직 대신 장관직을 맡으면서 막후 실력자로 파나마를 통치했다. 그리고 1940년에 정식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집권 후 미국이 파나마를 정당하게 대우하지 않을 경우 다른 강대국과 협력해나가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또한 유럽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파나마운하 건설 때 대거 이민 온 중국인이 가지고 있던 각종 소유권을 강제로 몰수하고, 수천 명에 달하는 흑인의 시민권을 박탈하는 등, 인종차별적인 정책을 폈다.

 

한편 미국은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1년 파나마운하의 보호를 위해 군사기지를 설치했고, 자국의 무장 선박을 파나마운하로 통과시키려 했다. 아리아스가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쿠데타 세력을 지원하여 아리아스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 후 아리아스는 1949년과 1968년에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으나 자신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1968년,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토리호스는 강력한 카리스마에 의한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현 집권당인 '민주혁명당'을 창당하고, 1977년에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의 협상을 통해 파나마운하의 반환을 실현하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81년 지방순찰 중 의문의 헬리콥터 사고로 사망했다.

 

그 후 몇 번의 정권교체를 거쳐 1983년부터 안토니오 노리에가 장군이 파나마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국가 방위군 장교로 미국 중앙정보국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노리에가는, 정권을 장악한 후 마약밀매로 부를 축적했고 이를 토대로 권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1987년부터 노리에가 대통령을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여 파나마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이에 미국은 정치 불안의 주역이자 점차 반미적인 성향을 보이는 그에게 퇴진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 및 대규모 판매업자들과 유대를 맺고 부를 축적했다.

 

그 후 미국은 노리에가에 대한 퇴진 압력을 계속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미국은 주권파괴라는 세계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1989년 2만 6,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파나마를 무력 침공했다. 무력으로 파나마를 장악한 미국은 1990년 노리에가를 마약 밀수혐의로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했다. 그는 1992년에 미국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파나마운하의 반환

 

1968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파나마의 토리호스 대통령이 1977년, 미국의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1999년 12월 31일에 미국이 파나마로 파나마운하를 반환한다는 내용의 협정에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1979년, 20년간 운하의 점진적 이양과 유지, 보수 등 관리를 위해 한시적으로 운영될 미국 국방부 산하기구 '파나마운하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로써 파나마운하가 개통된 지 65년 만에 처음으로 파나마인이 운하의 운영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모든 행정과 기술인력을 파나마인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미국인이 퇴직하게 되면 파나마인을 채용하여 모든 인력이 파나마인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국주의적 유산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파나마운하에 대한 미국의 소유권이 1999년 12월 31일 정오를 기해 파나마로 반환되었다.

 

운하 건설 86년 만에 운하의 운영권을 물려받은 파나마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약 5년 동안 운하 확장 프로젝트의 타당성을 조사했다. 그리고 '운하 확장 프로젝트, 세 번째 갑문 설치'에 대한 국민투표를 2006년 10월 22일에 실시하여 통과시켰다. 이 파나마운하 확장 프로젝트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운하의 화물 적재량을 증가시키고 파나마에 재정수입을 확충해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또한 운하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타 분야들도 반사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고용창출로 인해 파나마 경제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2006년 파나마운하를 이용하고 있는 상위 5개국은 미국, 중국, 일본, 칠레, 한국 순이다.

 

파나마 최초의 여성대통령 미레야 모스코소

 

1999년 5월, 52세의 미레야 모스코소 후보가 집권여당의 마르틴 토리호스1)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30년 만에 여야 간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선거에서 승리한 미레야 모스코소는, 파나마의 대중적 지도자이며 세 번이나 대통령을 역임하고 1968년 토리호스의 쿠데타로 권좌에 물러났던 아르눌포 아리아스 전 대통령의 미망인이었다. 반면에 패배한 집권여당의 후보였던 마르틴 토리호스는, 미국으로부터 파나마운하를 돌려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토리호스 장군의 아들이었다. 그 후 30년의 세월이 흘러 전 대통령의 미망인과 또 다른 전 대통령의 아들이 선거에서 대결하게 된 것이었다.

 

35세의 마르틴 토리호스 후보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소모사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던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군에 합류하여 활동했다. 이후 미국의 텍사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1992년 귀국 후 장관직을 역임했다. 한편 모스코소 후보는 아리아스 대통령 후보의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968년에 아리아스는 대통령이 되었으나 곧이어 발생한 토리호스의 쿠데타로 미국에 망명해야 했다. 이때 22세였던 모스코소는 그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 이후 미국에서 두 사람은 46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1969년에 결혼했다. 1971년에 파나마로 귀국하려 했으나 노리에가 장군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1988년 남편이 사망한 후 파나마로 귀국하여 남편의 이름을 딴 아르눌포당(PA)을 창당했다. 그리고 당 총재를 역임하고 1994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그 후 1998년에 다시 아르눌포당(PA)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각주
1 마르틴 토리호스: 1968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1981년에 의문의 헬리콥터 사고로 사망한 토리호스 전 대통령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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