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한국과 라틴아메리카와의 첫 만남

구름위 2014. 9. 1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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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와 쿠바

 

멕시코 이민 모집

 

북미 묵서가(墨西哥, 멕시코국)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나쁜 병질이 없다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바이다. 그 나라에는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근년에 일, 청, 양국인이 단신 혹은 가족과 함께 건너가 이득을 본 자가 많으니,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위의 글은 1904년 12월 17일(음력 11월 11일)부터 1905년 1월 13일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황성신문〉에 게재된 멕시코 한인 이민자 모집광고 내용의 일부다. 서울, 인천, 수원을 중심으로 한 대도시 거주자들을 겨냥해 멕시코에 가족 단위의 이주를 권고하고, 4년간의 계약노동 기간 동안에 높은 보수와 여러 가지 편의가 제공된다는 허위, 과장된 사실을 신문에 대대적으로 실었다. 여기에 1,031명의 조선인이 신청했는데, 이들은 주로 고향인 농촌을 벗어나 도시로 이주한 퇴역군인, 전직 하급관리, 소수의 양반계급, 내시, 무당, 기독교로 개종한 자, 건달, 걸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멕시코 이민을 희망하는 이들은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빠른 기간 내에 부자가 되고자, 더 나은 교육의 기회와 종교의 자유를 얻고자, 또는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조국의 해방을 이루고자, 하는 등의 다양한 목적으로 조국을 떠나 멕시코로 가려 했다.

 

멕시코 이민의 참상

 

한국에서 멕시코로 이민자를 보내는 과정에서 여러 난관에 부딪혔지만, 드디어 1905년 3월 초(혹은 4월 초) 1,031명의 한인 이민자들이 제물포항을 떠나 일본의 요코하마를 거쳐, 거의 40일이 넘는 항해 끝에 1905년 5월 15일 멕시코의 살리나 크루스 항에 도착했다. 다음은 멕시코 한인 이민의 1.5세대인 임천택의 멕시코 도착에 대한 회상이다.

 

인천에서 출발한 지 30여 일 만에 지루한 항로를 건너 별 장애 없이 묵국 '살리나 구르스'에 도착해 이민국 검사를 거쳐 다음 '유카탄 부로그래스' 항에 상륙하니 때는 5월 15일(음력 4월 16일)이었습니다. '유카탄'도 수부 '메리다'에 도착하여 5~6일이 지나서 식민회사의 지시에 의해 어저귀 농장으로 몇십 명씩 각각 헤어져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민자들은 22개의 헤네켄 농장으로 분산되어 4년간의 계약기간(1905~1909년) 동안 유카탄의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면서 노동일에 종사했다. 고온다습한 뙤약볕 아래에서 헤네켄 잎을 베어내는 일은 매우 힘든 노역이었다. 게다가 감독을 맡은 멕시코 십장들은 한인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행동이 느리다고 채찍을 휘둘렀다.

 

"밭에서 일을 더디 하고 잘 못한다며 십장들이 소리 지르고 채찍으로 때리는 까닭에 몸이 피곤하여도 죽지 않는 한 쉴 도리가 없었고, 말을 모르니 십장의 소리만 들리면 잘 한다는 것인지 못 한다는 것인지 알지도 못하고 공연히 겁이 나서 남녀노소가 움직거리던 인간지옥, 그곳에서 우마의 대우를 받던 것이 멕시코 이민의 정형이었다" 또는 "자기가 노예로 팔려온 것을 비로소 안 동포들은 목을 놓고 땅을 치며 이것이 국가의 죄냐, 사회의 죄냐, 또는 나의 죄냐, 그렇지 않으면 운명이냐 하고 울고 불기를 마지아니했다. 울다가 자살한 동포도 십여 명에 달했으며, 또 운다고 농장 주인에게 매를 맞고 구류를 당하기는 매일 계속되는 일과였다"라고 목격자들은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의 참상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러한 농장주의 만행과 힘든 노동을 피해 일부 한인 이주민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낯선 지리와 언어 탓에 경찰이나 사설경찰에게 붙잡혀 농장으로 돌아왔다.

 

한인 공동체 구성

 

메리다의 헤네켄 농장으로 분산된 한인 이민자들은 대한제국과 완전히 단절되어 멕시코에서 고립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게다가 한인은 외부와 차단된 농장 내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농장주의 횡포와 노동력 착취가 다반사였던 농장에서의 생활은 거의 전근대적인 농노생활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인은 이러한 가혹한 환경과 노동 조건을 극복하고 독자적으로 생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은 우선 심리적인 안정감이나 언어적인 일체감, 그리고 문화적인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고 외부에 대한 문화적인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한인 공동체 사회를 형성했다.

 

그러나 계약기간 동안 한민족의 언어와 유교적 전통문화를 유지하려 했던 한인 1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점당하자 돌아갈 조국이 없어진 한인 이민자들은 유카탄반도를 중심으로 멕시코와 쿠바로 흩어졌다.

 

 

헤네켄을 운반하는 한인들.
1905년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은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쿠바의 사탕수수농장을 거쳐 헤네켄 농장으로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한인 집단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멕시코에서 쿠바로

 

그럭저럭 4년이라는 기한이 지났다. 그러나 처음 올 때의 희망은 몽상임을 발견했다. 우리는 헤네켄 농장에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계속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그동안 어느 한 곳에 생활의 근거를 잡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 후 우리 동포들은 이곳저곳으로 방황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묵국 전경 어느 곳에도 우리 형제들의 발자취가 가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되었다. 그 중 운이 좋은 사람들은 하와이, 미국 등지로 돌아가거나 극히 소수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멕시코 한인 1.5세대인 임천택이 썼던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멕시코의 한인은 고국이 일본에 합병되고 하와이로의 이주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생존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했다. 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설탕 가격이 폭등하여 쿠바의 제당산업이 호황을 맞이했다. 이에 쿠바의 사탕수수농장은 많은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쿠바의 제당산업의 호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작 멕시코에서 290명의 한인이 도착했던 1921년 초의 쿠바는, 저임금에 실업자 증가라는 불황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헤네켄 농장이 있던 마탄사스로 갔다. 마탄사스에서 일하고 있던 쿠바의 노동자들은 헤네켄 농장의 일을 능률적으로 해내지 못했다. 때문에 멕시코에서 이미 충분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한인은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이들이 바로 쿠바 내 한인 집단촌 형성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헤네켄을 활용한 밧줄 산업이 1924년 이후 침체되어 사양길에 접어들자 한인 역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한인은 스페인어는 물론 자신들의 모국어를 읽고 쓸 능력조차 없어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1933년 바티스타의 집권으로 직장이나 자산이 없는 외국인을 강제 추방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자국의 노동자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새로운 노동법을 제정함으로써, 쿠바 국적이 아니었던 한인은 헤네켄 농장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일을 계속 하려면 쿠바 국적을 취득해야 했다. 마침 1940년 새로 개정된 헌법에 따라 쿠바 태생이 아닌 외국인도 쿠바 국적의 취득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쿠바에서 태어난 2세들은 쿠바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고, 현지 사회와의 동화가 쉽게 이루어졌다. 한인 1세대의 수효가 점차 줄어드는 반면에 2, 3세대의 숫자가 증가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부모 세대가 가졌던 조국에 대한 애착심과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유대감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말로 의사표시를 할 수도 없었다. 특히 1950년대부터 시작된 제4세대 한인부터 그러한 단절이 가속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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