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미국과 멕시코의 영토전쟁

구름위 2014. 9. 19. 15:29
728x90

과달루페-이달고 조약

 

미국과 멕시코의 영토전쟁

 

이투르비데의 축출

 

1820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자유주의자들의 반란으로 멕시코 지역의 크리오요들은 점차 독립의 의지를 품게 되었다. 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멕시코를 독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이투르비데는, 자신을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지칭하며 멕시코시티에 입성했다. 1822년 7월 의회는 이투르비데를 '아구스틴 1세'라는 칭호로 옹립했다. 그러나 산타안나 장군이 1823년 이투르비데 제국의 종식과 민족 대표 배분 및 연방 결성을 골자로 하는 카사 마타 강령을 선포하고, 멕시코시티로 진격해 들어갔다.

 

같은 해 3월, 결국 이투르비데는 집권 10개월 만에 사임하고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그 후 이투르비데는 재집권의 의도를 가지고 탐피코 항에 비밀리에 입국했으나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이투르비데의 실각 후 의회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은 멕시코가 19개의 자치주로 구성되고, 각 주는 독자적으로 주지사와 주의원을 선출하며, 입법부는 상·하원으로 구분하고, 대법원은 사법부의 최고기관이며, 행정부의 수반은 임기 4년의 대통령이 맡는 등의 삼권분립제도를 골자로 하고 있다. 그밖에 가톨릭을 국교로 하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인정했다.

 

그러나 각 지역의 분리 선언, 중앙정부에 대한 지지 거부 등으로 멕시코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국가 행정에 대한 경험도 없는 카우디요들이 자신들의 무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다. 1821년에서 1860년까지 40년 동안 정권교체가 50번이나 있었고, 그 중 35번은 군인이 주도한 쿠데타로 인한 것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멕시코의 혼란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알라모 전투 - 미국의 텍사스 합병

 

1821년에 멕시코 정부는 오스틴에게 텍사스 일부 지역에서 식민화 사업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들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나 12년 만에 텍사스에 사는 멕시코인의 숫자를 상회하게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 출신으로서 영어를 사용하는 신교도였다. 그들은 멕시코 정부의 감독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1833년에는 오스틴이 멕시코 정부에게 텍사스가 멕시코의 코아우일라 주와는 별개임을 인정하도록 요구하여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그리고 1835년에 멕시코 중앙정부가 연방주의를 폐지하자, 많은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던 텍사스는 1824년에 공포한 연방주의 헌법의 회복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의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이에 베라크루스에서 프랑스군과 싸운 경험이 있던 산타안나는 텍사스로 진격해, 텍사스인이 '알라모의 비극'이라 부르는 전투에서 그들을 전멸시켜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정부가 멕시코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 사건에 적극 개입하지 않은 틈을 탄 일시적 승리일 뿐이었다. 이 전투를 지휘한 산타안나는 산하신토에서 텍사스군의 반격으로 대패하여 포로의 몸이 되어 미국에 인도되었다. 그 후 텍사스는 미국과의 통합문제를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산타안나도 미국의 앤드류 잭슨 대통령에게 텍사스의 독립 인준을 약속하고 1836년 말 멕시코로 돌아왔다.

 

결국 1836년에 독립을 성취한 텍사스 공화국은 미국에 합병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정부는 산업화된 북부지역과 노예해방을 반대하면서 농업을 위주로 하던 남부지역 간의 정치적 갈등을 빌미로 텍사스의 합병을 보류했다. 하지만 결국 1845년 미국은 텍사스의 합병을 승인했다.

 

과달루페 – 이달고 조약

 

1844년에 당선된 미국의 포크 대통령은 1845년 텍사스를 합병한 후,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남서부 전역을 미국에 매각할 것을 멕시코 정부에 끊임없이 요구했다. 결국 포크 대통령은 테일러 장군에게 군대를 이끌고 리오 그란데 델 노르테 지역으로 진입하도록 명령함으로써, 1846년 4월 미국과 멕시코와의 전쟁이 발발했다. 양국 모두 준비 없이 갑자기 치룬 전쟁이었으나,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를 두고 정쟁만 일삼았던 멕시코는 쉽게 무너졌다. 이에 멕시코 정부는 쿠바에 망명 중이던 산타안나를 불러들여 전투에 참가하도록 했으나, 그도 역시 상대가 되지 못했다. 1847년 미국의 윈필드 스코트 장군이 멕시코의 베라크루스 시를 거쳐 수도인 멕시코시티를 점령했다. 차풀테펙 성에서 최후까지 목숨을 바쳐 사관생도들이 항전했으나 멕시코는 결국 패하고, 1848년 2월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을 미국과 체결하였다. 당시 멕시코는 이 조약으로 텍사스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 네바다, 유타, 콜로라도 등 영토의 반 이상을 미국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 후 "유럽이 우리를 구하러 하루라도 빨리 오지 않으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이 방황할 것이다"라고 했던 보수당의 지도자 루카스 알라만의 절규는 당시 혼란스러운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과달루페-이달고 조약(1848년) 이전의 미국·멕시코 국경과 현재의 국경.
스페인에서 독립한 지 불과 20년 만에 멕시코는 원래 영토의 절반을 미국에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원주민 대통령 - 베니토 후아레스

 

독립 이후 멕시코는 절반이나 되는 국토의 상실, 정부와 국민의 빈곤, 끝없는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인해서 무정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멕시코 지식인은 국가가 당면한 문제를 풀고자 서로 힘을 합치려 했으나, 막상 실천하는 과정에서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간의 분열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보수당은 스페인 체제로의 복귀를 꿈꾸었고, 자유당은 보수주의자의 특권을 폐지하고 새로운 지도자, 새로운 정부 및 새로운 헌법을 토대로 식민체제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원했다. 이러한 분열과 혼란 속에 빠진 멕시코를 구할 수 있는 세력이나 인물이 필요했는데,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자유당의 베니토 후아레스였다.

 

그는 사포텍 원주민 출신으로 3세 때 고아가 되어 양치기를 하다가, 외삼촌에게 스페인어를 배우고 15세에 수도원에 들어가 라틴어 공부를 마친 뒤 법학을 공부했다. 그 후 오악사카 주 의회 의원과 주 대법원 판사를 지낸 뒤, 1847~1852년에 오악사카 주지사를 지내며 교육의 대중화, 도로사업 등에 힘썼다. 그는 1855년, 자유주의자를 결집하여 산타안나에 대한 투쟁을 주도했던 후안 알바레스와 힘을 합쳐 멕시코 시를 무혈점령했다. 혁명에 성공한 자유주의자들은 알바레스를 대통령으로, 후아레스를 법무부 장관으로 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본격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이들은 우선 '후아레스 법'을 제정하여 교회와 군인이 누리던 특권을 폐지하고 그들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도록 하는 등의 제도적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법은 보수주의자의 반발을 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6년에 또 다른 자유주의 성향의 '레르도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교회와 공공기관이 소유한 불필요한 토지를 조속히 매각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토지의 재분배 문제를 간과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지주들의 토지 소유를 더욱 확대하고 교회가 새로운 자본가 세력으로 등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자유주의자들의 개혁조치는 1857년에 헌법이 새롭게 제정되면서 그 결실을 맺었다. 미국의 헌법을 모방한 이 헌법은 연방주의 원칙의 재확인, 종래의 교회, 군부, 대지주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상원의 폐지, 단원제 의회제도의 시행, 대통령의 권한 축소 등 앞서 제정된 '후아레스 법'과 '레르도법'의 정신을 충실히 반영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1858년에 후아레스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멕시코 사상 첫 원주민 출신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858년 당시 멕시코에는 보수주의자가 추대한 펠릭스 술로아가 대통령과 자유주의자의 대표인 후아레스 대통령, 2개의 정부와 2명의 대통령이 존재하는 파행적인 정치 상황이 전개되었다. 후아레스가 연방주의, 공화제, 민주제, 대의제, 교육, 상공업, 노동, 결사의 자유가 포함된 헌법을 공포하자,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내전은 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후아레스가 1860년 12월 멕시코 시에 입성하면서 자유주의자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내전의 상처는 깊었고 국가의 재정은 고갈되었다. 이에 후아레스 정부는 1861년 외채상환 및 이자 지불의 중단을 선언했다. 이는 주요 채권국인 스페인, 영국 및 프랑스에 큰 충격을 주었다.

 

막시밀리아노의 3년 천하

 

1861년 외채상환의 일시적 정지에 대해서 프랑스, 영국, 스페인 등 유럽 3국은 멕시코에 대해 제재조치를 취할 것을 결의하고, 1862년 3국의 연합군을 멕시코의 베라크루스에 상륙시켰다. 협상을 통해 영국과 스페인의 군대는 철수하고 프랑스군이 1863년 독자적으로 멕시코시티를 점령했다. 이에 후아레스 정부는 수도를 포기하고 텍사스 국경지대로 도피하여,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프랑스군에 대항했다. 멕시코시티를 장악한 프랑스군은 보수주의자들과 결탁하여 군주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나폴레옹 3세의 후원을 받은 멕시코의 보수주의자들은, 막시밀리아노 대공이 총독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미라마르 성을 방문하여 막시밀리아노를 멕시코 황제로 맞고 싶다고 청원했다. 막시밀리아노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셉의 동생으로서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야심 많고 정치적인 감각이 뛰어났던 그의 부인인 카르롤타 아말리아는, 황제직을 수락하라고 남편 막시밀리아노를 졸랐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미국에 대항해서 군주제로 된 라틴의 장벽을 쌓고 싶어 했다.

 

또한 멕시코의 보수주의자, 사제 및 왕정주의자들은 당시 오랫동안 후아레스의 자유주의 정부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잃어버린 특권을 찾기 위해 군주제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국내외의 상황으로 인해서 막시밀리아노는 순조롭게 황제에 즉위했다. 막시밀리아노 황제는 후아레스에게 협력을 제안했으나 후아레스는 이를 거부했다. 반면에 군부, 교회 및 대지주 등의 보수주의자들은 막시밀리아노에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회복하는 데 힘썼다.

 

멕시코 황제로서 멕시코인이 되려고 노력하던 막시밀리아노는, 어떤 특정 계층의 이익 보호에 앞장서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면서, 1865년 1월 '개혁'정신을 옹호하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866년에 나폴레옹 3세는 프러시아와의 충돌을 구실로 프랑스군을 멕시코에서 철수시키면서 힘이 약화되었다. 또한 남북전쟁을 끝낸 미국은 막시밀리아노 황제의 퇴위와 멕시코에서의 출국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내의 보수주의자도 막시밀리아노 황제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시밀리아노 황제는 멕시코에서의 출국을 단호히 거부했다.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자유주의자들의 군대가 그를 체포하여, 국내외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1867년 처형하였다. 이로써 멕시코 역사상 두 번째로 탄생했던 군주정은 붕괴되었다.

 

그 후, 후아레스는 1867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다. 후아레스가 공화정을 복구하면서 정치적인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끊임없이 계속되는 반란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후아레스는 1871년 선거에서 포르피리오 디아스와 경쟁해서 또다시 당선되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다. 그러나 후아레스는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872년에 사망했다. 그 후 막시밀리아노와의 투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반란을 일으켜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로써 후아레스의 '개혁의 시대'는 종말을 맞고 디아스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역사 ,세계사 > 아메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0) 2014.09.19
쿠바의 김구   (0) 2014.09.19
긴 나라   (0) 2014.09.19
콜롬비아  (0) 2014.09.19
완충국   (0) 2014.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