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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구름위 2014. 9. 1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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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콜롬비아 보고타 시의 중심인 볼리바르 광장과 대성당.
1538년에 건설된 이 도시는 남아메리카 북부의 스페인 식민지의 중심도시로서 발전하였고, 1739년에는 누에바그라나다 부왕청이 이곳에 설치되었다. 보고타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해인 1819년부터 1830년까지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그란 콜롬비아의 분열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는 1819년 베네수엘라와 누에바그라나다(지금의 콜롬비아 지역)를 통합하여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을 결성했다. 그 후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을 베네수엘라, 쿤디나마르카 및 키토 등 3개로 분리하고, 이들 각 지역의 수도를 카라카스, 보고타, 키토로 정하여 각 수도에 대표 또는 부통령을 지명했다. 그 후 시몬 볼리바르는 1822년 에콰도르, 1824년 페루, 볼리비아를 각각 해방시켰다.

 

한편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의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에게 독립전쟁을 위한 인적, 물적자원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1826년 베네수엘라 의회는 그란 콜롬비아 중앙정부에 반대하면서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를 대표로 선출하고, 또 그란 콜롬비아에서의 분리 독립안을 채택했다. 이에 시몬 볼리바르가 페루에서 급히 귀국하여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 세력을 진압했다. 하지만 시몬 볼리바르의 전제적 통치방식에 불만을 가진 각 지역의 카우디요들이 반발했다. 결국 1830년 베네수엘라는 그란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여 파에스가 베네수엘라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830년에는 에콰도르도 그란 콜롬비아로부터 분리, 독립했다. 이로써 라틴아메리카의 통합을 이룩하고자 했던 시몬 볼리바르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개인의 이익에만 충실한 지역 카우디요들의 정치적 야망과, 안데스산맥이나 아마존 강 등 지역 간의 연결을 어렵게 하는 자연적 환경 때문이었다.

 

1832년 2월 그란 콜롬비아는 국명을 누에바그라나다로 바꾸었다. 누에바그라나다에서는 두 정파 간의 대립이 일어났다. 즉, 교회의 특권 폐지, 교회의 자산 몰수, 예수회 추방, 지방자치 옹호, 신앙의 자유 보장, 노예제 폐지 등을 실현하고자 했던 상인이나 도시의 자유 직업인이 중심이 된 자유주의자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엄격한 중앙집권제를 추구했던 지주와 성직자가 주를 이루는 보수주의자 간의 갈등이었다.

 

콜롬비아 합중국

 

그란 콜롬비아가 붕괴된 후 콜롬비아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번갈아 집권했다. 특히 1849년 자유주의자 호세 일라리오 로페스가 집권하여 노예제도, 원주민 공동 소유 토지(에히도, ejido)에 대한 보호령, 성직자들의 특권을 폐지하고 예수회를 추방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대농장주들을 더 부유하게 만들었고, 콜롬비아가 국제시장에서 원자재를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하는 1차 산업국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자유주의자의 개혁정책에 반발하여 보수주의자가 집권했다. 1857년에 집권한 오스피나 로드리게스는 헌법을 개정하여 국명을 그라나다 연방으로 바꾸었다. 그는 예수회의 귀국을 허용하고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과 21세 미만의 모든 가장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는 등 선거권을 확대시켰다. 그런데 이 헌법으로 인해서 그라나다 연방정부가 각 주의 행정에 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861년 카우카 주지사이던 모스케라가 연방정부에 반발하여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1863년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서 국명을 콜롬비아 합중국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각 주가 자체의 법령, 군대 및 사법제도를 갖는 절대연방제를 실시토록 했다. 또한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허용했지만 성직자의 자산 소유를 금지했고, 예수회를 다시 추방하면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러나 이 헌법으로 인해서 대통령의 권한이 축소되어 중앙정부의 지위가 약화되었다. 이는 각 주의 질서 유지에 중앙정부의 개입을 어렵게 했다. 지방정부에 대한 무장반란, 주와 주 사이의 대립 및 무기교역의 자유 등으로 인해 각 주는 자체의 군대를 강화시켰는데 여기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처럼 1863년의 헌법은 무정부 상태를 야기했고, 각 지역의 카우디요들이 경제적인 부를 기반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자유주의자는 기존의 헌법을 고수하려는 급진파와 중앙집권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온건파로 양분되었다.

 

천일전쟁

 

그 후 1880년 선거에서 당선된 라파엘 누녜스는, 교회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추방된 성직자들의 귀국을 허용하는 등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펼쳤다. 그리고 그는 1886년, 이전의 헌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에는 국명을 콜롬비아 공화국으로 바꾸고, 삼권분립과 단원제 의회 제도를 채택하여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지사는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통령의 임기는 6년, 가톨릭을 사회질서 유지의 기본 요소로 하여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고 교회는 공공교육을 전담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헌법은 1899년 내전이 본격화될 때까지 각 지방자치단체를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라파엘 누녜스가 병으로 사망하자 1892년에 카로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자 자유주의자들이 1895년 반란을 일으켰지만 정부군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카로를 지지하는 민족주의파와 대통령에 대한 권력 집중과 언론 통제에 반대하는 역사주의파로 양분되었는데, 1898년 선거에서 민족주의였던 안토니오 상클레멘테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부정선거라고 비난했다. 이에 고령의 상클레멘테 대통령은 부통령이었던 마로킨에게 권력을 위임했다. 마로킨은 보수주의 중에서도 민족주의파에 속했으나, 자유주의자들과 역사주의자들이 선호할 만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다시 복귀한 상클레멘테는 마로킨의 모든 개혁정책을 무시했다. 이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켜, 콜롬비아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소위 '천일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899년에 시작된 전쟁에서는, 현대화된 무기와 잘 훈련된 보수파 정부군이 구식 무기로 무장한 자유주의자들을 진압했다. 1900년에 마로킨이 다시 대통령직을 계승하자 자유주의자들은 평화협정 체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마로킨은 이를 거부했다. 1902년 자유주의자인 벤하민 에레라가 군대를 이끌고 파나마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자 콜롬비아 정부는 파나마에 주둔 중인 미군 측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미군은 자유주의자로 구성된 반란군을 진압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자유주의 지도자들은 1902년 보수파 정부군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 평화협정으로 끝난 천일전쟁은 십만 명 이상의 인명과 수많은 재산을 손실했을 뿐만 아니라, 원래 콜롬비아의 영토였던 파나마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파나마운하까지 잃게 되는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입혔다.

 

적도의 나라

 

에콰도르

 

 

적도탑.
에콰도르는 '적도'라는 의미다. 이 탑은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서 북쪽으로 22킬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미탓 델 문도(Mitad del Mundo, 세계의 중심)'라고 한다. 이 탑을 중심으로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를 구분하는 0도 0분 0초 선이 있다.
 
국경 분쟁과 독립

 

에콰도르는 원래 키토 아우디엔시아의 관할지역으로, 1739년까지는 페루 부왕령에, 그 후에는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 소속이 되었다. 이렇게 소속이 바뀌면서 에콰도르, 북쪽의 콜롬비아, 남쪽의 페루 세 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이 자주 일어났다.

 

주변국들과의 분쟁에도 불구하고 에콰도르는 다른 여느 국가보다 독립 열망이 높았다. 하지만 페루 부왕청군의 공격으로 그 열망이 좌절되었다. 1811년 12월에 에콰도르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계속된 페루 부왕청군의 공격으로 에콰도르는 다시 8년 이상 부왕청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1821년 초, 콜롬비아의 시몬 볼리바르와 페루의 산 마르틴의 지원을 받아, 시몬 볼리바르의 부하였던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장군이 페루 부왕청군에게 승리했다. 이로써 에콰도르는 1822년부터 1830년까지 8년 동안 그란 콜롬비아와 합병했다. 그런데 이 합병으로 에콰도르는 그란 콜롬비아 북부지역과 페루지역의 전투에서 전쟁물자와 병력을 보급하는 기지가 되었다. 또한 1828년에는 그란 콜롬비아와 페루 간의 국경선 분쟁으로 인해 에콰도르의 과야킬 시가 폐허가 되었다. 이로 인해서 인적, 물적 피해를 본 에콰도르 주민들의 불만이 커졌다.

 

1830년, 베네수엘라가 그란 콜롬비아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하자, 에콰도르 역시 키토에서 혁명평의회를 결성한 후 곧바로 그란 콜롬비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시몬 볼리바르의 부하였던 후안 호세 플로레스 장군을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1830년 8월 리오밤바에서 구성된 의회는 헌법을 제정하여 국명을 에콰도르, 수도를 키토로 정하고 대통령으로 후안 호세 플로레스를 선출했다. 그리고 단원제 의회에서 선출되는 4년 임기의 강력한 대통령제를 채택했고, 가톨릭을 국교로 했다.

 

그러나 독립 이후 에콰도르는 각 지역 카우디요 간의 경쟁, 지역 간의 적대감, 교회에 대한 반발, 불명확한 국경선으로 인한 분쟁 등으로 매우 혼란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플로레스의 망명과 귀환

 

플로레스에 이어 1835년에 집권한 자유주의파 의원 비센테 로카푸에르테는, 헌정의회에서 신헌법을 제정하여 국명을 에콰도르 공화국으로 하고 의회를 양원제로 개편했다. 그는 집권 후 국가질서의 확립, 공공교육의 기회 확대에 주력했다.

 

비센테 로카푸에르테에 이어 다시 집권한 플로레스는 대통령의 중임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그는 스페인과의 교역을 위해 항구를 개방하고 많은 국가와도 교역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플로레스는 페루와 국경선을 확정짓는 데 실패했고,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반대세력의 반발에 부딪쳤다. 결국 1845년 과야킬에서 대규모의 폭동이 발생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소요가 수개월간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에콰도르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은 플로레스가 유럽으로 망명하면서 진정되었다.

 

1859년 페루군이 과야킬 항을 점령하자, 당시 과야킬 지역을 지배하던 기예르모 프랑코 장군은 1860년 에콰도르의 남부지역을 양도하는 마파싱게 조약을 페루군과 체결해 페루로의 편입을 선언했다. 그러자 이를 반대하는 에콰도르 민중의 봉기가 발생했고, 유럽으로 망명했던 플로레스가 다시 돌아와 페루에게 빼앗겼던 지역을 다시 탈환했다.

 

가톨릭교회 세력의 득세

 

1861년에 플로레스가 정권을 다시 잡았으나 곧바로 물러나고, 교회 중심의 보수세력의 지원을 받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가 집권했다. 그는 15년 동안 에콰도르를 통치하면서, 강력한 가톨릭 사상과 그의 지도력만이 혼란기의 에콰도르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모든 권력을 중앙집권화했다. 그는 또한 1865년 과야킬에서 일어난 반란을 강력히 진압하여 자신의 통치력을 강화했고, 항만과 공공건물의 건설, 교역과 농업의 장려, 부패 제거 및 단일 통화 제도의 수립을 통해서 에콰도르를 근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69년에 재집권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임기가 끝난 후에도 즉시 연임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선거권을 문맹자가 아닌 21세 이상의 가톨릭교도로 제한하여 부여했다. 이 헌법에 대해서도 그의 반대파는 '노예헌장' 또는 '검은 헌장'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는 이에 개의치 않고 재집권 후에도 계속 교회세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자유주의와 반교회세력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국가 통합, 전제주의적 질서의 수립, 도덕 재무장에 힘을 쏟았다. 그는 1875년 재선되었지만 취임 후 곧 암살되었다. 그의 암살로 인해서 에콰도르는 1895년 플라비오 엘로이 알파로가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20년간 무정부 상태와 다름없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다.

 

자유주의 집권 시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가 암살된 뒤에도 20년 동안 보수주의자가 계속 집권했다. 그러나 1895년 과야킬에서 자유주의자 플라비오 엘로이 알파로가 집권함으로써 자유주의 집권의 시대가 열렸다. 1896년에 대통령으로 선출된 엘로이는 집권 후 보수 반동세력과의 투쟁, 당 내부의 여러 계파 간의 갈등, 새로운 정치기구의 설립, 안데스산맥을 통과하는 철도의 건설, 사회 및 문화적 통합 등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1897년에 제정된 헌법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인정했지만, 그는 집권 후 외국의 종교단체를 추방하고 자국 출신의 성직자에게만 종교활동을 허용했다. 그는 수도를 키토로 다시 정하고 세속혼과 이혼을 허용하였으며, 교회의 일부 자산을 수용하여 수도원, 병원 및 구호기관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엘로이는 1907년에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911년에 일어난 군사 반란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망명했다. 그 후 그는 다시 에콰도르로 들어와서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고, 키토에서 군중에 의해 1912년에 처형당했다.

 

조류의 배설물, 구아노(guano)

 

페루

 

'외국인'에 의한 통치

 

17세기 말에 라플라타 부왕령이 생기면서, 유럽과의 교역이 보다 원활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 직후 페루 지역은 식민시대의 번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또한 페루의 독립에 공헌한 대표적인 인물이 모두 토착 페루인이 아니어서, 정치적으로도 독립 직후의 페루는 매우 불안정했다. 페루인은 '외국인'인 아르헨티나의 산 마르틴 장군에 의해 독립이 되고, 또 산 마르틴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후에도 또 다른 '외국인'인 베네수엘라 출신의 시몬 볼리바르가 페루를 계속 통치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로 인해서 페루의 토착 지배계층들은 페루에서의 영향력 상실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내륙 고지에서 저항을 계속하던 스페인의 부왕군을 공공연히 지원하기까지 했다.

 

토착 지배계층의 우려

 

1824년, 남미의 독립전쟁에 있어 최후의 전투인 아야쿠초 전투에서 시몬 볼리바르가 승리함으로써 페루는 독립을 달성했다. 볼리바르는 페루의 통치를 정부평의회에 위임하고 볼리비아로 가서 1825년 볼리비아 공화국을 세웠다. 페루의 정부평의회는 볼리바르를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페루의 토착 지배계층들은 볼리바르가 페루와 볼리비아를 그란 콜롬비아에 합병할 가능성에 대해서 큰 우려를 나타냈다. 1826년 볼리바르와 그의 군대가 그란 콜롬비아로 귀국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페루인은 볼리바르가 설치한 정부평의회를 폐지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호세 데 라 마르 장군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당시 페루에서 자유주의 성향의 연방주의자들은, 지역적 이해관계나 자신의 신념으로 리마의 중앙집권적인 체제에 의한 통제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특히 남부 아레키파 지역에서는 리마지역의 보수주의 정권에 반대하면서 연방주의를 원했다.

 

페루 - 볼리비아 연방

 

1834년에 펠리페 산티아고 데 살라베리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살라베리 대통령은 1835년 칠레와 관세협정을 체결하여 칠레산 수입품에 부과되던 높은 관세를 철폐했다. 그러나 이 협정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이 상황에서 페루의 전직 대통령인 오르베고소가 볼리비아의 안드레스 데 산타크루스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살라베리 대통령을 축출했다. 그는 곧 페루를 남북으로 분리하여 오르베고소는 북부지역, 피오 트리스탄은 남부지역의 대통령이 되어서 페루-볼리비아 연방을 결성했다. 그리고 산타크루스 자신은 1836년 페루-볼리비아 연방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페루와 볼리비아의 연방 결성이 남미 남부지역의 세력 균형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들은 페루-볼리비아의 연방 해체를 강력히 요구했지만 산타크루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페루-볼리비아 연방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 전쟁은 1837년부터 시작되었는데, 1839년 칠레군이 융가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페루-볼리비아 연방은 해체되었고, 산타크루스 대통령은 에콰도르로 피신했다.

 

조류의 배설물, 구아노

 

 

 

 

 

 


페루 리마의 대통령궁.
구아노는 수천 년 동안 페루 해안에 쌓인 조류의 배설물로써 비료의 주원료로 이용되어왔다. 19세기 초 페루는 구아노의 수출로 국고 수입의 80%를 벌어들였다.
 
1839년 연방이 해체된 후 페루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은 바로 페루 최대의 카우디요인 카스티야 이 마르케사도였다. 그는 시몬 볼리바르의 종신제 대통령과 안드레스 데 산타크루스의 연방제에 반대한 인물이었다. 그가 1845년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페루의 정치는 혼란했고 경제는 파산 상태였다.

 

구아노의 수출이 활성화되면서 페루의 경제가 크게 발전했지만, 비효율적이고 무계획적인 수출로 국가 재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구아노는 수천 년 동안 페루 해안에 쌓인 조류의 배설물로써 1840년경부터 비료의 주원료로 이용되었다. 1842년에서 1870년까지 페루는 약 900만 톤의 구아노를 유럽과 북미시장으로 수출했다. 페루는 국고 수입의 약 80%를 구아노로부터 벌어들일 정도로 구아노에 크게 의존하는 단일산물을 수출하는 경제체제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아노 수출 성장에 따른 수입이 당시 페루의 막대한 외채상환에 주로 사용됨으로써, 페루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카스티야 이 마르케사도는 집권 후 먼저 구아노의 수출정책을 개선하여,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중국 이민의 입국을 허용하여 그들을 흑인 대신 철도 건설 및 섬유공장에 부족한 노동력으로 충당했다. 또한 그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하여 농업발전에 기여하도록 했다. 그는 또한 방직, 유지 및 제지공장 등을 설립해서 산업발전에 힘썼으며, 대학교육 개선과 법 체제의 확립 등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55년 다시 집권한 카스티야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간의 이해를 잘 조정하면서 페루를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즉, 보수주의자에게는 강력한 중앙집권주의적 행정부의 우위체제를 실현하여 그들을 만족시키고, 자유주의자에게는 종교재판과 성직세 제도의 폐지, 공공교육기관의 설치를 통한 교회의 교육 독점 방지 등 실용주의 정책을 폈다.

 

카스티야는 페루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면에서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1862년 그가 사임하면서 페루는 다시 카우디요들 간의 무력을 통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은 1879년에서 1883년까지 일어났던 칠레와의 '태평양 전쟁'에서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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