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 있는 살보(Salvo) 왕궁.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혁명이 발생했을 때 우루과이는 여전히 스페인의 통치하에 있었다. 1811년 스페인군의 장교 출신인 케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농촌지역의 독립군과 합류하여 독립운동을 시작, 1812년에 우루과이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했다. 1813년 우루과이 의회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평의회에 대표를 파견해 우루과이의 자치 정부 수립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아르티가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에 전쟁을 선포했지만 오히려 점령당했다. 1816년에 아르티가스는 몬테비데오를 다시 점령하여 행정구역을 6개 주로 분할하고 몬테비데오에 도서관과 학교를 설립하는 등, 나름대로 국가의 형태를 갖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르티가스는 포르투갈군에 맞서 브라질 영토를 자주 습격하다가 패배하여 몬테비데오를 빼앗겼다. 이에 아르티가스는 아르헨티나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파라과이로 피신하여 독재자 프란시아의 도움으로 살다가 1850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한편 1821년 포르투갈 점령하의 몬테비데오에서 소집된 의회는 우루과이를 '시스플라티나 주'로 명명하여 포르투갈령 브라질과의 합병을 승인했다. 1822년 브라질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자 우루과이는 결국 1824년 브라질에 합병되었다. 그러자 1825년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온 우루과이인이 브라질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 후 우루과이를 사이에 두고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1828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양국은 영국의 중재에 따라 완충국으로서 우루과이의 독립을 보장하는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로써 우루과이는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블랑코와 콜로라도
1828년 독립한 우루과이는 이듬해 헌법을 제정, 공포했다. 1830년에 보수주의파의 푸룩투오소 리베라가 의회에서 최초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두 당, 즉 몬테비데오의 자유 직업인이나 유럽에서 온 이민자 그리고 중소상공업자로 구성된 콜로라도(Colorado, 원래 '약간 붉은색의'라는 의미로, 여기에서는 '자유주의자'를 가리킨다)당과, 대지주, 대상인, 고위성직자가 중심이 된 블랑코(Blanco, 원래 '하얀색'이라는 의미로, 여기에서는 '보수주의자'를 가리킨다)당 간의 갈등이 일어나면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1834년에 콜로라도당은 아르헨티나의 독재자 로사스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반란을 주도했던 라바예하는 브라질로 피신했다. 그 후 양측의 지지를 받아 마누엘 오리베 장군이 대통령이 된 후 잠깐 정치적인 안정기를 유지하다가, 초대 대통령이었던 리베라의 추종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마누엘 오리베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1839년 리베라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아르헨티나와 전쟁을 벌였지만 오히려 아르헨티나군이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를 점령하여 8년간이나 지배했다. 이 기간 동안 대전쟁이라고 불리는 내란이 발생했는데, 영국, 프랑스, 브라질이 개입하여 이 전쟁은 1851년까지 9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후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 브라질과 삼국동맹조약을 맺어 파라과이와의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콜로라도당은 1865년부터 1958년까지 우루과이를 통치하면서 19세기 중반부터 영국과 스코틀랜드계 이민자를 대거 받아들였다. 이로써 근대적인 영농법, 가축의 품종개량, 축산물 가공업의 근대화를 통한 수출 증대에 기여토록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영국 자본가들이 철도 건설에 주력하여 교통이 발달했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졌다.
투파마로
20세기에 들어 경제가 발전하고 헌법 개정으로 정치가 안정되면서 우루과이는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1929년 세계대공황과, 우루과이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바트예 대통령의 사망, 제2차 세계대전,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에 대한 지지문제를 둘러싼 폭동 발생 등으로 우루과이가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특히 1962년 급진적인 제당 노동자들 중 조합주의자와 사회당의 이탈자들이 투파마로(Tupamaro)라는 게릴라 집단을 결성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그들은 국가 통제에 의한 경제개혁과 민족주의적인 정치성향을 가지고, 도시 게릴라 전법을 이용해 몬테비데오 지역에서 활동했다. 여기에 중산층, 학생 및 전문직 종사자들이 조직적으로 가세하여 정부에 대항했다. 이에 1971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대통령은 이들에 대한 정치적 억압을 강화하고 파업자들을 탄압했다. 그는 또한 투파마로 게릴라 집단에 전쟁을 선포하여 1973년 그들의 조직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 대통령
게릴라 집단과 전쟁을 하면서 전통적인 정당 정치인에게 크게 불만을 가졌던 군부가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군부는 보르다베리 대통령에게 의회 폐쇄와 의원들의 체포, 공산당, 사회당 등 좌익정당과 노조의 해체, 노조 지도자들의 투옥을 요구했다. 그 후 군부는 보르다베리 대통령을 사임시키고 권력을 완전히 독점하여 전통적 정당들의 정치 참여를 봉쇄했다. 그리고 고위장교들이 이들 정치인을 대신하게 했다. 비록 민간인이 대통령직을 맡고 있긴 했지만 그는 명목상의 통치자일 뿐이었다. 실질적인 권력은 군사혁명평의회와 고위장교단의 구성원들이 장악했다.
1985년에 콜로라도당의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가 집권했다. 상기네티는 집권 후 국민화합을 위해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또한 군부와 경찰을 장악해줄 것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군부의 규모와 기구의 축소를 단행했다. 그러나 상기네티 대통령은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외채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89년 선거에서는 콜로라도당이 아닌 블랑코당의 라카예 에레라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의회가 여소야대의 의석 분포를 보임에 따라 효율적인 국정운영이 어려웠다. 이에 에레라 대통령은 안정된 국정운영을 위해, 콜로라도당이 블랑코당의 경제개혁안에 동의하고 대신 콜로라도당이 내각에 입각하는 타협안을 제시하여 국정을 운영했다. 그 후 1994년 선거에서는 상기네티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