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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자유의 각축장 - 니카라과

구름위 2014. 9. 1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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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메리카(2)

 

보수와 자유의 각축장 - 니카라과

 

니카라과는 중미에서 면적이 가장 넓고, 다른 중미 국가들과는 달리 대서양과 태평양을 모두 면하고 있는 나라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니카라과는, 카리브 연안을 지배하려는 영국은 물론이고 팽창주의 전략을 실행하려는 미국에게도 관심과 개입의 대상이 되어왔다.

 

니카라과는 이런 외세의 관심 속에서 다른 중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립 후 그라나다 지역의 보수주의자와 레온지역의 자유주의자가 토지문제와 무역정책을 둘러싸고 크게 대립했다. 보수주의자가 중심이 된 그라나다 지역에는 스페인의 식민시대부터 목장주, 농장주, 거대 상인집단이 살았는데, 이들은 기존의 체제를 고수하고자 했다. 반면에 대학 도시인 레온지역은 태평양 연안의 상업도시로서, 이곳에서는 수공업자, 지식인, 중농들이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경제적 성장을 제한하려는 기존의 제도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사상을 부르짖었다. 레온과 그라나다 간의 적대감과 그에 따른 지역 간의 배타성은 다른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 비해 더욱 심했다. 이러한 두 세력, 양 도시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수도 마나과를 두 도시의 중간 지점에 건설하기까지 했다.

 

1855년 레온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라나다의 보수주의자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미국의 팽창주의 정책을 지지하던 미국인 윌리엄 워커를 고용했다. 그는 미국제 장비로 무장한 병력을 앞세워 그라나다를 점령했다. 그는 1856년에는 자신이 니카라과의 대통령임을 국내외에 선포했으나, 이에 분노한 니카라과인은 중미 인접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1857년 워커를 축출했다.

 

이 사건 이후 니카라과에서는 1857년부터 1893년까지 약 40년간 보수주의자가 권력을 장악했다. 1858년에는 새로운 헌법이 공포되었다. 1870년 이후 니카라과에서 커피 경작을 시작한 중소 규모의 지주들은, 국제시장에서의 커피의 급격한 수요 증가로 인해 부를 축적, 새로운 부르주아 계층을 형성했다. 보수주의자들의 집권기간에 니카라과는 정치적 안정과 함께 경제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1890년대 들어 호세 산토스 셀라야가 집권했다. 집권 후 그는 보수주의자의 정치적 활동을 철저히 금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하는 등, 1909년까지 16년간 강력한 독재정권을 시행했다. 그는 또한 커피와 바나나 산업을 활성화시켰고, 철도와 도로 등 사회 간접자본의 확충에 힘을 쏟아서 니카라과의 경제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특히 일본과 유럽의 지원으로 운하를 건설하여 파나마운하와 경쟁하고자 했는데, 이는 미국과의 외교적인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미국은 보수주의자들을 사주하여 반정부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니카라과 국내의 혼란을 틈타 니카라과 내 미국인의 인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셀라야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결국 1910년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니카라과의 대문호 루벤 다리오는 "바로 너, 미국이구나. 원주민의 피를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며 스페인어를 말하는 우리 선량한 아메리카를 침입할 자가 바로 너, 미국이구나"라는 말로 니카라과의 슬픈 미래를 예고하기도 했다.

 

바나나 공화국 - 온두라스

 

온두라스는 중미 7개국 중에서 니카라과 다음으로 큰 면적을 갖고 있지만 인구는 많지 않고, 전체 수출에서 바나나가 차지하는 비율이 65%에 달하는 나라다. 독립 이후 다른 나라에서처럼 온두라스에서도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사이의 대결이 있었지만, 다른 국가에 비해서는 그렇게 심한 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농촌지역의 지배층들이 과테말라와 니카라과에서처럼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38년 11월 온두라스는 중앙아메리카 연방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그 후 온두라스는 1876년까지 38년간 무려 82명의 대통령이 번갈아 통치했으며 약 170번의 내란이 일어났다. 온두라스가 국제 자본주의 경제에서 경쟁할 수 있는 산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로의 부족에 따른 고가의 수송비와 국내 자본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1870년대에 들어 온두라스는 커피와 바나나 등을 재배해 수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온두라스는 1877년대에 들어서도 정국이 혼란하여 1900년까지 200번 이상의 군사반란과 100번 이상의 정권 탈취 시도가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온두라스를 근대화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대통령은 마르코 아우렐리오 소토다. 1877년에 집권한 그는 사법과 행정의 개혁, 의무교육 확대, 외국자본의 유치 등을 위해서 광산과 바나나 농장을 개방하고 커피, 사탕수수, 카카오 재배를 위해 토지를 징발했다. 그는 또 1880년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화를 추진했고, 인접국가 및 미국과의 외교관계 확대를 위해서 노력했다.

 

풍요로운 해안 - 코스타리카

 

 

 

코스타리카의 해변.
코스타리카는 국민의 80%가 스페인계 백인이다. 북부에 있는 산악지형으로 인해서 이웃 국가와 격리되어 있어, 중미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관계없이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코스타리카(Costa Rica, '풍요로운(Rica)' '해안(Costa)')는 아스텍 문명과 마야문명, 잉카문명의 변방지역이었기 때문에 원주민이 거의 살지 않았다. 따라서 다른 중미 국가들과는 달리 메스티소가 17%, 흑인이 2%, 원주민이 1%, 그리고 국민의 80% 이상이 스페인계 백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 인해서 코스타리카는 문맹률이 매우 낮고 국민 통합이 비교적 잘 이루어졌다. 또한 북부의 산악지형으로 인해서 이웃 국가와 격리되어, 중미의 복잡한 정치상황과는 관계없이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1835년에 집권한 브라울리오 카리요는 코스타리카의 국부로 추앙받았다. 그는 집권 후 자유주의적인 개방정책을 수립하여 중산계층의 이익을 대변했고, 코스타리카의 민주주의를 위한 기반을 확립했다. 그는 특히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여 코스타리카에서 최초로 신문이 발간되는 데 노력했고, 산호세를 수도로 확정했다. 그 후 커피를 경작하는 엘리트들이 집권하면서 코스타리카는 언론과 종교의 자유가 확대되었다. 또한 공공교육의 강화, 식민 잔재의 청산, 정치·경제적 자유의 추구 등 중미의 다른 나라들과는 차별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870년에 집권한 토마스 과르디아는 1882년까지 모든 정적을 추방하고 일체의 정치적 논의를 허용치 않았으며,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등용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등 강력한 전제정치를 폈다. 그는 설탕과 커피 생산을 증대시키고 대서양 연안에 넓은 바나나 농장을 건설했는데, 그는 커피의 수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철도 건설에 관심을 가졌다. 일명 '양키 피사로1)'라 불리던 미국인 메이그스의 조카 케이스에게 1891년 수도 산호세에서 리몬항까지 철도를 부설토록 했다. 케이스는 1899년 코스타리카에 바나나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 연합청과물회사(United Fruit Company)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 후 코스타리카는 독재나 개인추종주의 등 전형적인 라틴아메리카 정치의 폐해가 나타나지 않았고 가장 민주적인 국가로 발돋움했다.

 

파나마운하 - 파나마

 

파나마는 원래 콜롬비아의 한 주였다. 그러나 파나마는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콜롬비아의 중앙정부와 접촉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치적인 성격이 강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파나마는 1821년 11월 독립을 선언했지만 곧바로 시몬 볼리바르의 그란 콜롬비아에 통합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다시 콜롬비아에 통합되었다. 이렇게 독립과 콜롬비아와의 통합이 계속되는 동안, 미국은 중미와 카리브 지역에서 영국이 영향력을 확대해나가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미국은 1846년에 콜롬비아와 비들랙-마야리노 조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파나마 지협에서 콜롬비아의 주권을 보장하는 대신, 향후 운하가 건설될 경우 미국 선박의 자유로운 통행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미국이 파나마 지역에 개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1850년 이후 금이 발견되면서, 파나마는 해상교통로로서 그 중요성이 갈수록 커졌다. 그 사이 1903년까지 파나마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에 대항하는 반란이 파나마 지역에서 수십 차례 일어났다. 이에 미국은 자국민의 생명과 자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미군을 파나마에 보냈다. 이렇게 파나마에 군사적인 개입을 했던 미국은, 군사 및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03년 파나마가 독립하면서 파나마운하의 공사가 시작되었고 1914년 8월 15일에 완공되었다.

 

각주
1 양키 피사로: 페루 안데스 산악지역의 철도를 부설한 인물로, 페루의 정복자 피사로의 이름을 빗대어 불렀던 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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