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작은 베네치아
'베네수엘라'는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아마존 강 유역을 탐사하고 북상하던 중 수상가옥에서 생활하는 원주민들을 보고는, 이탈리아의 수상도시 베네치아를 연상해서 '작은 베네치아'라는 의미로 붙인 명칭이다. 이곳은 멕시코나 페루 지역처럼 고도로 발전된 원주민 문명이 없었다. 때문에 초기의 정복활동이 북부와 동부 해안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후 1576년에 건설된 카라카스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과의 무역이 이루어졌고, 여러 수도회가 이곳에 들어와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폈다. 1776년에는 베네수엘라에 총독청이, 1786년에는 아우디엔시아가 설치되어 베네수엘라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독립의 선언
시몬 볼리바르의 초상화.
'해방자' 볼리바르는 "이 세상에는 가장 멍청한 바보가 3명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 두 번째는 돈키호테,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나다"라는 말을 했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의 통일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위해서 평생 동안 투쟁했던 자신의 무모한 열정을 자탄하는 말이기도 하다. 볼리바르가 원했던 하나로 통합된 라틴아메리카의 이상은 달성되지 못하고, 21세기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808년 프랑스의 스페인 침공 후 나폴레옹이 호세 보나파르트에게 스페인의 왕권을 넘겨 주었다는 소식이 라틴아메리카에 전해졌다. 그러자 카라카스 지역의 크리오요들은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811년에 카라카스 지역의 크리오요들은 의회를 구성하여 독립을 선언, 제1공화국을 탄생시켰다. 그 후 베네수엘라 의회는 프란시스코 미란다를 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스페인군 축출에 나섰다. 그러나 1812년 독립군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약 2만 명가량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반면에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지역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독립군은 예기치 못한 천재지변으로 인해서 1812년 스페인군에게 항복하고 해체되었다.
그 후 시몬 볼리바르가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스페인군을 격퇴하여 1813년에 카라카스에 입성했다. 1814년 베네수엘라에서 제2공화국이 탄생되었다. 볼리바르는 '해방자'의 칭호를 받으며 베네수엘라 공화국의 수반이 되었으나 스페인군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이에 볼리바르는 다시 콜롬비아로 후퇴하여 정부를 수립하고 그곳의 정부 수반이 되었으나, 스페인군의 공격이 계속되자 자메이카를 거쳐 아이티로 건너갔다. 1816년에 시몬 볼리바르는 아이티의 지원을 받아 다시 베네수엘라로 돌아왔고 독립운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 지역의 카우디요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의 지원을 받아 오리노코 강 유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리고 1818년 앙코스투라에서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다시 선포했다. 하지만 스페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카라카스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이에 볼리바르는 병력을 재정비하여 1821년 카라보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베네수엘라 지역을 완전히 독립시켰다.
파에스와 모나가스 형제들
1819년 베네수엘라를 포함한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포되고 시몬 볼리바르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 후 볼리바르는 1821년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지에서 독립전쟁을 계속했다. 그 사이 1825년 베네수엘라 지역의 카우디요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가 분리 독립운동을 하면서 보고타의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서 베네수엘라의 지도자로 부상한 파에스는 카라카스 의회의 지원을 받아 그란 콜롬비아로부터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언했다.
볼리바르의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던 파에스는 원래 야네로1)의 우두머리였다. 파에스는 1830년 이후 약 30년간 군부 지도자, 농장주 및 교회세력과 결탁하여 여러 차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에 비록 많은 반란과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났지만, 파에스는 이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그는 병사들의 창끝에 적군의 피가 묻어 있지 않으면 가차없이 벌을 주었을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다. 이렇듯 그는 독립 후의 혼란했던 베네수엘라의 질서를 확립하여 평온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독립 이후 베네수엘라의 주요 수출품이었던 커피의 가격 하락으로 경제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러자 전통적인 지지집단이었던 평원지대의 주민들은 파에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러한 사회, 정치적 불안을 틈타 1847~1858년 사이에 모나가스 장군 형제가 집권했다. 보수주의자 호세 타데오 모나가스는 집권 후 자유주의파를 모두 사면하는 등 자유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통치했다. 이로 인해 파에스는 모나가스의 자유주의 정책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함으로써 1850년에 추방되었다.
1851년에 호세 그레고리오 모나가스가 정권을 잡았고, 1857년에 다시 집권한 타데오 모나가스는 1830년에 제정된 후 27년간 시행되어오던 헌법을 개정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제에 기반을 둔 정부를 조직했다. 하지만 모나가스 형제의 권력 남용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 모나가스 정권은 결국 1858년에 붕괴되었다. 이에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는 베네수엘라 금융인을 주축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1861년 재집권에 성공했으나, 보수주의자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사임했다.
이렇게 카우디요 안토니오 파에스와 모나가스 형제의 집권으로, 베네수엘라는 지방자치제를 요구하는 자유주의자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주의자 간의 극심한 대결로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이때 연방제 아래에서 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던 안토니오 구스만 블랑코 장군이 자유동맹을 결성하여 1870년 대통령이 되었다.
구스만 블랑코
안토니오 구스만 블랑코는 1870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1888년까지 직접 또는 추종자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19년간 집권했다. 블랑코는 베네수엘라가 해결해야 할 당면문제로, 공공질서의 확립, 경제 회복과 교역의 확대, 카라카스 지역의 근대화 등을 꼽았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과의 관계 증진, 중앙정부의 권력 확대 등 정치, 경제의 안정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블랑코는 집권 후 수도원 폐쇄와 성직자 및 교황청 대사의 추방, 카라카스 대교구청의 폐지, 교회 재산 몰수로 교회와 갈등을 빚었다.
그의 집권기에는 커피가 주요 수출품으로 부상하고 관세 인하를 통해 교역이 증대됨으로써 경제발전이 이룩되었다. 1880년 재집권한 블랑코는 대학교육 개선, 철도, 전신 등의 공공사업 확충 등을 통해 베네수엘라를 근대화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1886년 세 번째로 집권한 블랑코가 유럽에 머물고 있을 때, 카라카스에서 반란이 일어나 블랑코 정권은 붕괴되었다.
그 후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각 지역의 카우디요 간의 갈등과 경제상황의 악화로 정치적 소요는 계속되었다. 또한 영국, 이탈리아, 독일, 미국의 간섭으로 베네수엘라는 국내외적으로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각주
1 야네로: 베네수엘라 오리노코 강 유역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지대에서 자란 소를 기르는 목부
'역사 ,세계사 > 아메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수와 자유의 각축장 - 니카라과 (0) | 2014.09.19 |
---|---|
통치는 교육이다" (0) | 2014.09.19 |
빵이냐 곤봉이냐 (0) | 2014.09.19 |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0) | 2014.09.19 |
페루와 볼리비아의 재앙 (0) | 2014.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