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빵이냐 곤봉이냐

구름위 2014. 9. 19.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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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피리오 디아스

 

1861년 1월, 후아레스가 공화정의 승리를 환호하는 시민들의 갈채를 받으며 멕시코 시로 들어오는 날,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웠던 위대한 군인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오악사카 근교의 한 농장에서 군에서의 은퇴를 선언했다. 같은 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후아레스와 맞붙었지만 패하고 다시 농장으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38세에 연방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1871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또다시 실패했다.

 

그러나 당선된 후아레스가 대통령에 오른 지 7개월 만에 죽자, 그의 뒤를 이어서 레르도 데 테하다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았다. 이에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반란을 일으켜 테하다를 추방하고, 1877년 2월부터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대통령이 되어 멕시코를 통치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830년 오악사카에서 태어나 멕시코 내란과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자유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싸웠지만,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보수주의자로 변했다. 1880년에 1차 임기를 마친 디아스는 1880~1884년 사이에 꼭두각시 정부를 내세워 통치했다. 이는 그가 전임자들의 재선에 반대하여 주도했던 반란에 대한 명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디아스는 1884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어, 1887년에는 연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과 1890년에는 중임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을 통해 1911년까지 30여 년 동안 멕시코를 통치했다. 이 33년간의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집권기간을 '포르피리아토(Porfiriato)'라고 부른다.

 

빵이냐 곤봉이냐

 

디아스는 그의 통치기간 동안 강력한 독재체제를 수립하여, 독립 이후 멕시코가 결코 누려보지 못했던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이로써 외국자본과 대지주들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자유주의적인 개혁은 후퇴하고 다시 지주계급과 대(大)상인, 그리고 외국자본을 바탕으로 하는 과두지배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비록 정치, 경제 및 사회적으로 많은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경제적 근대화의 기반이 구축되었다.

 

디아스는 멕시코의 정치안정과 경제성장을 위해 전문기술 관료들을 기용하여, 행정의 효율화, 교육 개혁, 경제의 근대화 및 산업화 그리고 외자의 유치 등을 적극 추진해나갔다.

 

디아스는 또한 국내 질서의 회복을 위해서 '빵이냐 곤봉이냐(pan o palo)'라는 구호를 내세워, 체제에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각종 정치 및 경제적인 혜택을 부여하고, 체제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서슴지 않았다. 디아스는 "야수적인 멕시코에서 민주주의는 어울리지 않으며 독재만이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독재정치를 정당화했다. 디아스는 이러한 강력한 독재정치를 통해서 행정, 입법, 사법 및 지방행정조직과 군부, 교회 및 대지주 등의 보수세력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만들었다. 반면에 디아스는 지방경찰을 창설하여 자신의 지지세력 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국민생활을 구석구석 감시하는 등 철저한 통제와 감시체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디아스의 강력한 통치는 평화와 경제발전을 원했던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디아스는 멕시코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많은 외자를 유치했다. 또한 경제의 하부구조 개선에 힘을 쏟아서, 취약했던 철도와 베라크루스, 탐피코, 살리나 크루스 등지에 항만시설을 건설했다. 이로써 생산량이 배로 증가된 목화와 광물 등의 수출을 쉽게 했다. 또한 우편, 전신, 전화 등의 통신망을 확장했고, 석유, 금속 및 섬유공업 등 2차 산업을 발전시켰다.

 

"멕시코! 외국인에게는 어머니, 멕시코인에게는 계모"

 

이러한 정치, 경제의 안정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대중을 정치에서 배제한 채 일부 특권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통제와 감시 속에서 이루어진 정치적 안정은 필요 이상의 인권 탄압을 초래했다. 또한 경제발전의 실질적 수혜계층도 일반 대중이 아니라 일부의 소수 특권층만이 이익을 독점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또한 열등한 인종으로 규정했던 원주민들의 생활은 독립 이전의 상태로까지 후퇴하고, 많은 농민의 생활도 농업구조의 변화와 함께 더욱 악화되어갔다. 또한 지나친 외자 유치는 오히려 국내 산업기반을 약화시켜 외국기업들이 멕시코 경제를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에 원주민, 농민, 산업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졌다. 농민들은 토지를 강탈당함에 따라 사실상 대농장(아시엔다)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치와와 주의 한 아시엔다는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합친 것보다 컸고, 그 부지를 횡단하는 데 기차로 꼬박 하루가 걸릴 정도였다. 외국인의 소유지도 넓어서 1910년까지 미국인이 멕시코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는 거의 1억 에이커에 달했다. 그것은 멕시코 전체 면적의 22%를 점하고 있었다. 이로써 멕시코 농경지의 98%가 아시엔다의 소유였고 멕시코 농민의 90%는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다. 그 농민들이 인구의 80%를 점하고 있었고 읽고 쓸 수 있는 자는 10%도 채 못 되었다. 이로 인해서 수많은 농민과 전통 수공업자들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로 전락했다. 이들의 불만은 쌓여 갔지만 디아스는 이들을 잔인하게 탄압했다.

 

이러한 노동자, 농민에 대한 탄압은 반정부 세력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철도, 광산 및 산업노동자들도 노동단체를 결성하여 반정부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1906년 12월 베라크루스 주 리오 블랑코의 한 방직공장에서 '자유노동자연합'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열악한 주거환경, 공장 내의 신분증명서의 휴대와 사용, 그리고 독서물의 검열 등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렸다. 이에 디아스는 외국의 군대 대신에 연방군을 출동시켜 노동자들에게 총알 세례를 퍼부었고, 시체들을 화물차에 실어 베라크루스까지 운반한 뒤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러한 무자비한 탄압에 대해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이 반대했고, 디아스 정권의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면서 저항했다.

 

이처럼 디아스의 통치 기간 중 멕시코는 어느 정도 근대화를 달성했지만, '멕시코는 외국인에게는 어머니고 멕시코인에게는 계모'라는 자조적인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치게 외국자본에 의지했고 또 이들에게 특혜를 주었다. 이는 디아스 정권하에서의 멕시코 경제성장이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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