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세 나라에 걸쳐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폭포인 이구아수 폭포.
파라과이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같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위치해 있었다. 때문에 이들로부터의 침공 위협에 대비하고 자체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강력한 독재정권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파라과이는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에서 장기 독재자들의 지배에 의한 폐해가 가장 심했던 비극적인 역사를 갖고 있는 국가였다.
파라과이는 1776년에 라플라타 부왕청이 신설됨으로써, 페루 부왕청에서 라플라타 부왕청 관할 지역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그 후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구성된 평의회가 라플라타 부왕청이 관할하던 전 지역을 통치하려고 하자, 파라과이는 자체적으로 정부평의회를 구성하여 정부를 수립했다. 그런데 강력한 중앙집권주의 형태의 통합을 주장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의견과, 자치정부 수립에 따른 연방 결성을 생각하고 있던 파라과이의 의견이 서로 달라서 양국 간에 갈등이 생겼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리오데라플라타 하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라과이는 자유로운 교역을 위해서라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리오 델 라플라타 지역에 침공한 스페인군과 포르투갈군과의 전투를 위해 파라과이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파라과이가 이를 거부하고 대신에 우루과이의 독립을 지원했다. 이에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는 파라과이에 경제적 제재 조치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개의치 않고 파라과이는 1813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파라과이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닥터 프랑스 -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
1814년 '닥터 프랑스'라고 불린 호세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데 프란시아가 5년 임기의 정부 수반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집권 후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행정기구를 개편하고 국가 방위에 힘을 쏟았다. 또 수입물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하고 정부가 목재 수출을 독점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1816년 '총통'이라 불리면서, 비밀경찰이나 밀고자들을 동원하여 자신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투옥 또는 사형하거나 추방했다. 그는 의회를 두지 않고 장관도 임명하지 않았으며 재판소도 없이 혼자서 나라를 통치했다. 프란시아는 종교행사를 제외하고는 공중집회를 금지하고 관리들의 부정을 엄격히 처벌하였다. 한편 그는 공공교육을 강화하고 수도원 제도를 폐지하여 그 자산을 징발했다. 또한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불법 입국 시에는 그들의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상의 침투를 막기 위해 모든 항구와 국경을 봉쇄하고, 다른 나라와의 무역이나 여행, 심지어는 우편마저도 금지하는 등의 쇄국정책을 폈다. 이는 파라과이가 스페인에 이어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는 이런 자신의 쇄국정책을 국가주의 고양의 구실로 삼았다.
'닥터 프랑스'라고 불린 프란시아는 1814년에서 1840년 그가 죽을 때까지 26년간 파라과이를 통치했다. 그는 비록 정치적인 탄압으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확고한 민족주의자로서 파라과이를 주변 강대국에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파라과이 공화국으로 만들어 경제적인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프란시아는 말년에 노이로제 증상을 보여, 자신의 암살을 극도로 두려워한 나머지 공관 정원의 풀숲을 모두 베어버린다거나 밤마다 침실을 바꾸는 등의 병적인 증상을 보였다. 그가 죽은 후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으나, 몇 개월이 지나 그의 묘는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져 유골이 여기저기 흩뿌려졌다고 한다.
부자(父子)의 통치
프란시아가 사망한 후, 1844년 의회가 소집되어 공화국 형태의 신헌법을 제정하고, 안토니오 로페스를 임기 10년의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안토니오 로페스는 군부를 개편하여 국가의 방어체계를 확고히 했으며,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와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파라과이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아울러 교황청과도 화친협정을 체결하여 성직자의 임명권을 얻기도 했다.
1857년, 10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다시 선출된 안토니오 로페스는 임기 중 경제, 사회 및 문화 부문에서 많은 업적을 이룩했다. 우선 경제발전을 위해서 면화, 담배 및 마테 차와 같은 수출산물의 증산에 주력했다. 또한 조선소와 제철소를 건립하는 한편, 교육 재정 확보에 힘을 기울여 임기 말까지 많은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1862년 안토니오 로페스 대통령은 임기를 1년 남기고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를 부통령으로 지명하여 사망 후 즉시 계승토록 했다. 하지만 이는 파라과이는 한 개인이나 가문에 의해 세습될 수 없다고 명시한 독립선언서의 구절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이에 의회는 특별회의를 개최하여 솔라노 로페스를 10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는 일찍이 15년간 아버지 안토니오 로페스와 함께 외교관, 국방상, 부통령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국내외 문제에 정통해 있었다. 솔라노 로페스는 아버지 안토니오 로페스로부터 그 당시 남미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당한 경제적 부와 강력한 군부를 물려받았다. 그는 이를 토대로 강력한 파라과이 제국의 건설에 힘을 쏟았다.
삼국동맹전쟁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은 군대를 약 14만 명으로 증강하고 현대화해 파라과이를 군사 대국으로 급성장시켰다. 1864년 브라질이 우루과이 연안에 함대를 파견하여 우루과이 사태에 개입했다. 이에 파라과이 정부는 브라질에 더는 개입하지 말 것을 경고하면서 브라질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또한 항해를 금지했던 파라나 강과 우루과이 강을 지나던 브라질 함정을 나포했다. 더 나아가 1864년 12월 파라과이는 마투그로수를 침공한 후 남부에서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히우그란지두술을 침공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서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에게 코리엔테스 주 통과를 요청했으나 아르헨티나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의 선박을 나포하면서 코리엔테스 지방을 침공했다.
이에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우루과이와 함께 비밀리에 삼국동맹조약을 체결하여 파라과이와 전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1865년 아르헨티나의 바르톨로메 미트레 대통령의 지휘 아래 파라과이를 공격했다. 이어 브라질 함대가 파라과이를 침공했다. 결국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5년 동안 계속되었던 삼국동맹전쟁은 끝이 났다.
이 전쟁에서 패한 파라과이는 전비 배상과 영토 상실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인구의 절반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어 전쟁 후 남녀 성비가 1대 4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전쟁 이후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이 구축했던 경제적 기반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소비재가 부족해 온 나라가 큰 곤경을 겪었다. 이에 파라과이는 재정 확보를 위해 영국에서 1871년과 1872년에 300만 파운드의 차관을 도입했고, 부족한 부분은 교회의 재산과 철도 및 기업자산의 매각으로 충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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