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동 페드루 1세
브라질 제국의 동 페드루 1세와 그의 대관식 광경.
의회를 해산한 동 페드루 1세는 1824년 10명으로 구성된 국가위원회를 구성하여 '브라질 제국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에는 '황제는 신성하여 침해받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황제는 종신직 상원의원의 임명권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황제에게 조정권을 부여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황제가 의회의 결의안에 대한 거부권 및 내각의 승인 없이 하원을 해산할 수 있는 권리도 가졌다. 헌법에는 또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헌법은 일부의 조항만이 수정되면서 1889년 공화국 선포로 폐지될 때까지 65년간 존속되었다.
제2왕정의 시작 - 동 페드루 2세
1826년, 포르투갈의 동 주앙 6세의 서거로 동 페드루 1세가 동 페드루 4세의 칭호로 포르투갈 국왕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 브라질 국민은 포르투갈과 브라질 양국이 통합왕국이 될까 우려했다. 동 페드루 1세는 왕위를 자기의 딸인 도나 마리아 다 글로리아에게 양위하면서 동생 동 미겔과 결혼시켜 섭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미겔은 신성동맹의 지원을 받아 자신이 유일한 포르투갈의 왕임을 선언하고 질녀와의 결혼을 거부했다.
이 일로 인해서 동 페드루 1세가 브라질보다는 유럽에 더 큰 관심을 보이자, 브라질인은 동 페드루 1세에게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 후 계속되는 사회 불안정과 함께 동 페드루 1세를 지지하는 보수파와 이에 반대하는 자유주의파 간의 정쟁이 심화되었다. 결국 동 페드루 1세는 1831년 황제직을 사임하고, 아들인 동 페드루 데 알칸타라를 브라질에 남겨 놓고 가족과 함께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동 페드루 1세의 아들인 동 페드루 데 알칸타라가 왕위를 계승해야 했지만, 그의 나이는 고작 5세에 불과했다. 이는 헌법이 규정한 통치자로서의 성년인 18세에 훨씬 못 미치는 나이였다. 따라서 헌법의 규정에 따라 섭정이 1840년까지 동 페드루 데 알칸타라 대신 통치했다. 이 섭정기에 리우데자네이루를 비롯한 많은 지역에서 소요와 폭동이 발생했다. 1840년 동 페드루 데 알칸타라가 동 페드루 2세의 칭호로 황제에 즉위하면서 10여 년간에 걸친 섭정기는 끝났다. 동 페드루 2세의 등극으로 브라질에서 제2왕정이 시작되었다.
산업화와 노예제도의 폐지
노예제도 폐지의 대상이 되었던 아프리카의 흑인노예들이 브라질에 들어온 근본적인 이유는, 브라질 원주민들이 사탕수수 노동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채집생활과 자유로운 이동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유럽인이 적용하는 규칙적이고 고된 노동에 적합하지 않았다. 또한 원주민들은 백인과의 접촉으로 인해 황열병, 천연두, 독감과 같은 질병으로 많은 수가 사망한 상태였다. 이에 흑인노예들이 1538년부터 브라질의 페르남부쿠, 바이아와 리우데자네이루로 수입되었다. 초기에 수입된 흑인노예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1570년부터 사탕수수 경작이 확대되면서 빠르게 증가했다.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서 드넓은 소비시장이 형성되어, 산업분야에서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에 포르투갈에서 수학했던 엘리트들이 브라질로 귀환하여 유럽의 선진문화를 브라질에 뿌리내리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인 변화와 함께 브라질에 대한 최대의 투자국이자 공산품 수출국인 영국은 흑인노예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다.
원래 18세기에도 브라질 노예제도의 폐지가 거론되었으나 사회적인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1865년에 동 페드루 2세가 파라과이 전쟁에 참전한 흑인노예에 대해 논의하면서 노예제 폐지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그 후 브라질의 흑인노예들은 1850년 노예무역의 금지를 시작으로 파라과이 전쟁에 참여한 흑인노예의 해방, 노예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흑인의 자유 인정(자유출생법), 60세 이상의 흑인노예의 해방 등의 단계를 거쳐 1888년에 황금법(아우레아법)의 선포로 완전히 노예제에서 해방되었다. 이렇게 노예제가 완전히 폐지되었지만, 신분이 해방된 노예들은 또다시 대농장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반(半)노예로 전락했다.
제정 붕괴 - 제1공화정 수립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식민지가 공화정 형태로 독립을 이룩한 반면, 브라질은 동 페드루 1세의 왕정 아래에서 독립을 달성했다. 이에 대해서 공화주의자들은 "우리는 아메리카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메리카인이 되길 원한다"라고 외칠 정도로, 왕정 때문에 브라질이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주의파 의원들이 동 페드루 2세의 보수파 내각 구성에 반발하여 1871년 공화당을 창당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된 대통령이 브라질을 지배하고 연방주의 원칙에 의해 조직된 공화제를 희망했다. 이들은 1880년대에 농장주, 상인, 전문직 종사자 등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파라과이 전쟁에 참여했던 군부의 지도자들 역시 공화정 체제를 이해하고 공감했다. 그들은 라플라타 강 유역 국가들의 군인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라플라타 강 유역 국가들은 이미 공화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군부의 지도자들은 당시 전투에서 공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결국 1889년 11월에 데오도로 다 폰세카 원수를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동 페드루 2세가 임시정부의 요구에 따라 가족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망명함으로써 브라질에서의 군주제는 종말을 고했다. 데오도로 다 폰세카의 임시정부에는 대농장 소유주, 자유직업인 및 군인 출신의 대토지 소유주인 공화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임시정부는 국가와 교회를 분리했고, 제헌의회가 소집되기 전까지 지방의회, 자치 시의회 및 상하원을 해산했다. 또한 주의 공식 명칭을 프로빈키아(Provincia)에서 에스타두(Estado)로 바꾸었고, 연방 수도를 리우데자네이루로 결정했다.
카페 콩 레이치 정치
1890년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아르헨티나와 스위스 연방헌법을 토대로 미국헌법을 모방한 제1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었고, 이것이 1891년에 공포되었다. 이 헌법에는 임기 4년의 대통령 직선제와 재선 금지, 대통령 중심제의 연방공화국, 대통령의 내각 자유 조각권 등을 명시했다. 또한 상하원을 국민투표로 선출하고 삼권을 분립하며 각 주 정부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각 주정부가 시장, 경찰 및 교육기관을 조직, 관리하는 등 브라질의 주정부는 다른 나라에 비해 보다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1889년부터 1930년까지 계속된 제1공화국은, 허약한 중앙정부하에서 거의 자치적 권한을 누리는 강력한 주정부들이 연합한 형태의 과두지배체제였다. 비록 중앙정부가 국가의 재정을 상당 부분 통제하고 외교나 국방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브라질은 강력한 힘을 가진 '주지사들의 정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인구가 가장 많은 상파울루 주와 미나스제라이스 주가 브라질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다.
당연히 커피산업으로 부유해진 상파울루 주와 광산업과 목축업으로 번영한 미나스제라이스 주 정당의 지도자들이 교대로 대통령직을 맡았다. 이를 상파울루 주의 '커피(카페, Café)'와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우유(레이치, Leite)'라는 표현을 사용, 2개 주 출신의 대통령이 정치적 타협을 통해서 브라질을 번갈아 통치한다는 의미의 '카페 콩 레이치(Café com Leite, 밀크 커피) 정치'라고 불렀다. 이 정책에 따라 1889년부터 1930년까지의 제1공화정 기간 동안 집권한 12명의 대통령 중에 9명이 이 2개의 주 출신이었다.
나라 전체의 정치가 '주지사'들의 정치라면, 지방의 정치는 '코로넬(coronel)'의 정치였다. '코로넬'이라는 말은 원래 군인계급에서 '대령'을 뜻했지만, 지역 정치세력의 주요 역할을 담당했던 '각 지역의 수장(지방 토호인 카시케(cacique)에 해당)'을 의미했다. 이 '코로넬'은 각 지역의 대토지 소유자나,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 표를 몰아줄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지역의 정치적 세력가들이었다. 따라서 제1공화국 시대의 정치는, 경제적으로 부를 쌓았던 각 주의 주지사들과 각 지역 단위의 정치세력인 '코로넬'에 의해 움직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카누두수의 반란
이렇게 제1공화국 시대의 정치는 강한 지역주의 전통에다 소수의 지배층이 교대로 정권을 잡았다. 때문에 사회가 외형적으로는 비교적 평온해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렇게 안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 정치적 소요사태가 계속 발생했는데, 특히 1896~1897년 사이에 북동부 지역 바이아에서 일어난 폭동이 브라질 국내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바이아 주의 카누두수에서 안토니우 비센테 멘지스 마시엘('안토니우 콘셀예이루'로 알려져 있다)이란 사람이 스스로를 예언자로 지칭했다. 그러면서 교육과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오지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하며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고 또한 공화정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그의 이러한 전도활동은 당시 소외받던 빈민계층에게 급속히 파고들어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하지만 결국 1897년 10월 국방장관이 직접 지휘하는 진압군에 의해 주모자였던 안토니우 콘셀예이루와 그의 추종자 대부분이 사망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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