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의 독립
1822년 1월 9일 "내가 여기 있노라".
동 페드루는 포르투갈 본국의 귀화 지시에 응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안녕과 국가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여기에 머물겠노라'는 선언으로 브라질의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브라질로의 수도 이전
1703년 이후 경제적으로 영국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던 포르투갈은, 1806년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영국 함대가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에게 영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포르투갈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1807년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침공을 당한 포르투갈 왕실은 영국 해군의 보호 아래, 동 주앙을 비롯한 1만 5,000명의 왕실 가족, 귀족 및 관리들과 함께 두 달 동안의 고달픈 항해 끝에 브라질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식민지 출신 엘리트 계층의 저항에 부딪혔다. 이에 동 주앙은 소요사태를 수습하고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개혁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우선 1808년에 브라질 항구들을 개방하여 300년에 걸친 포르투갈의 독점적인 중상주의 정책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써 브라질은 다른 국가들과의 자유로운 교역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동 주앙은 브라질에 공장 설립을 자유화했고, 화약공장, 조선소, 식물원, 의학학교, 도서관, 국립박물관, 왕실 인쇄소, 은행과 조폐국 등도 설립했다. 그 결과 1827년까지 리우데자네이루는 인구 10만의 화려한 대도시로 탈바꿈했다. 이러한 모든 조치는 식민지의 발전에 유익한 것이었지만,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재원을 세금으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식민지인의 부담이 매우 컸다.
한편 영국인은 포르투갈 왕실에 제공한 협조에 대해 대가를 요구했다. 이에 포르투갈은 1810년에 영국의 특혜관세를 인정했다. 이로써 영국 함대가 브라질의 항구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고, 영국 상품은 브라질에서 타국의 상품보다 적은 관세를 물고 수입되었다. 이로 인해서 저질의 브라질 상품은 양질의 값싼 영국 상품과의 경쟁에서 밀려났고, 그들이 기대했던 공업 발전은 실현되지 못했으며, 브라질은 결국 영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었다.
한편 동 주앙은 1815년 브라질을 통합왕국의 범주로 승격시켰고, 1816년 도나 마리아 1세가 서거하자 동 주앙 6세의 칭호로 왕위에 올랐다.
혁명의 발생 - 동 주앙 6세의 귀국
1820년 포르투갈의 오 포루투 시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은 브라질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부유층은 보다 많은 자치권을 주장했고, 포르투갈 상인은 영국에 대한 특혜조처에 반대했다. 또한 포르투갈 본국의 혁명정부는 동 주앙 6세의 본국 귀환을 요구했다. 이에 동 주앙 6세는 자기 대신 장남인 동 페드루를 보내는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했다. 동 주앙 6세는 "브라질에 머무르면서 포르투갈을 잃느냐, 포르투갈로 돌아가면서 브라질을 잃느냐"라는 갈림길 속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 1821년에 15년간의 브라질 생활을 청산하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동 주앙 6세의 귀환 이후, 포르투갈 입헌의회는 동 페드루가 브라질에서 독립을 선언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으로 그의 귀환을 종용했다. 하지만 동 페드루는 입헌의회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계속 브라질에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포르투갈 입헌의회는 브라질의 모든 법원을 폐쇄했고, 각 지역 관공서는 동 페드루의 지시에 따르지 말고 포르투갈 본국의 지시를 직접 받도록 명령했다. 이는 각 지방이 수도였던 리우데자네이루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보다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이 제안에 찬동했으며, 그 결과 동 페드루의 통치영역은 리우데자네이루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재식민화 정책에 반발하는 자유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포르투갈에 대한 반감이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표출되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민족주의자들은 동 페드루 왕자의 브라질 잔류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1822년 동 페드루의 귀환을 지시하는 포고령이 도착했을 때, 브라질 상원 의장인 주세 클레멘치 페레이라는 동 페드루의 체류를 요청하는 연설을 했다. 그리고는 리우데자네이루, 상파울루 그리고 미나스제라이스 주민들의 동조 서명을 받아 동 페드루 왕자에게 전했다.
머무름의 날
동 페드루는 이에 대해 "모든 사람의 안녕과 국가의 전체적인 행복을 위해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여기 머물겠노라고 국민에게 말하라. 이제 나는 오직 단결과 평정을 여러분께 부탁하노라"고 답했다. 1822년 1월 9일은 동 페드루의 발언 중 '내가 여기 있노라'라는 의미를 상징하는 '머무름의 날'로 불리는데, 이 날이 브라질 독립의 첫 시발점이 되었다.
같은 해, 내각이 구성되고 동 페드루는 브라질 독립의 대부 주세 보니파시오 지 안드라다 이 실바를 총리에 임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포르투갈의 법령이나 조치도 집행하지 말라는 칙령을 내렸다. 또한 브라질에 파견된 모든 포르투갈인 관리와 군대는 적으로 간주되었다.
이피랑가 강가의 외침
동 페드루가 산투스를 순방하고 상파울루로 귀환하던 1822년 9월 7일, 왕의 일행이 이피랑가 강가 유역에 다다랐을 무렵, 동 페드루에게 포르투갈로부터 긴급 전문이 전해졌다. 이 문서에는 '최근에 브라질에서 취해진 모든 결정을 인정치 않음과 동시에, 그와 같은 결정에 대한 책임자를 색출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겠다'는 것과 '동 페드루가 취한 모든 조치를 무효화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곧 동 페드루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격분한 동 페드루는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할 결심으로 "단결하라 군인이여! 포르투갈 입헌의회는 브라질을 노예화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독립은 이미 선포되었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포르투갈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독립이냐, 아니면 죽음이냐, 이것이 우리가 분명히 취해야 할 문제다"라고 외쳤다. 동 페드루가 '독립이냐 아니면 죽음이냐'라고 '이피랑가 강가'에서 외쳤던 1822년 9월 7일이 바로 브라질의 독립기념일이다. 그 후 동 페드루는 같은 해 12월, 동 페드루 1세로 브라질의 황제에 즉위했다.
브라질의 독립
'독립이냐, 아니면 죽음이냐'라는 이피랑가 강가의 외침을 통해 브라질은 포르투갈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완전한 독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상파울루와 미나스제라이스 주는 동 페드루의 독립정부에 즉각적인 동참을 선언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이 지배하는 북동부 지역의 바이아와 마라냥, 파라, 피아우이 그리고 오늘날의 우루과이 영토에 속하는 남부의 시스플라티나 주는, 포르투갈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고 동 페드루의 독립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이아 주에서는 소요사태가 발생했고, 살바도르에서는 군인 숙소, 민간인 주택 및 수도원 등이 공격을 받았다. 이에 동 페드루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군대의 지원을 받아 소요사태를 진압하여 브라질 황제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동 페드루는 1824년 먼로 대통령의 '아메리카인에 의한 아메리카 국가들의 지배'를 주장한 소위 '먼로 독트린'에 의해서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유럽 열강들은 동 주앙 6세의 통치하에서 두 나라가 통합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브라질의 독립을 인정하는 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포르투갈과 오랜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포르투갈에 압력을 가하며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주장했지만, 결국 브라질과 포르투갈 간의 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되어 브라질의 독립이 정식으로 인정되었다. 포르투갈에 이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영국이 브라질의 독립을 인정함으로써 브라질은 대외적으로도 독립국임을 인정받았다.
'역사 ,세계사 > 아메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정과 '밀크커피' 정치 (0) | 2014.09.19 |
---|---|
독립 후의 라틴아메리카 (0) | 2014.09.19 |
멕시코의 독립 (0) | 2014.09.19 |
페루의 보호자 라틴아메리카 (0) | 2014.09.19 |
"바다를 경작하는 것처럼···" (0) | 2014.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