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독립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이후, 스페인 왕실은 스페인과 아메리카 식민지를 프랑스에 양도했다. 그로 인해 나폴레옹의 형 호세 보나파르트가 1808년부터 1814년까지 스페인과 아메리카 식민지를 통치하게 되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지금의 멕시코 지역)은 스페인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또 다른 식민지들에 비해 거리상으로 가깝기도 했다. 때문에 아메리카의 식민지 중에서 스페인에게 가장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스페인 본국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을 많이 통제했다. 당시 멕시코 지역의 크리오요들은 나폴레옹의 침입과 페르난도 7세의 퇴위 소식을 듣고, 스페인 왕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심을 나타내기 위해 정치위원회(훈타, Junta)를 구성할 것을 부왕에게 간청해 동의를 얻었다. 이에 멕시코 지역에 주둔했던 스페인군은 크리오요들의 세력강화를 우려해 부왕을 쫓아내고, 자신들의 뜻을 따를 만한 페드루 데 가리바이를 부왕으로 추대했다.
돌로레스의 절규 - 미겔 이달고 신부
'돌로레스의 절규'.
1810년 9월 16일 돌로레스에서 이달고 신부의 주도로 일어난 반란은 멕시코 독립운동의 발단이 되어, 후에 이 날은 멕시코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스페인 식민 당국은 크리오요들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감시를 더 철저히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크리오요들은 각지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이 중 케레타로 지방의 비밀결사조직에 소속된 크리오요들은 1810년 12월 8일을 기해서 페르난도 7세의 이름 아래 멕시코의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이 누설되어 이 비밀결사조직의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 사실이 멕시코시티에서 북서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돌로레스라는 마을에 전해졌다. 그러자 이 마을의 미겔 이달고 신부는 1810년 9월 16일 일요일 새벽, 성당 마당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교구민들에게 스페인 식민정부를 전복시키는 운동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는 교구민들과 함께 "우리의 과달루페 성모마리아 만세! 악정을 때려 부숴라! 스페인인을 죽여라!"고 외치면서 당시의 식민통치체제에 반기를 들었다. 이날 새벽에 행한 신부의 강론과 외침이 바로 멕시코 독립운동의 발단이 되었던 '돌로레스의 절규'다.
돌로레스 교구의 신부였던 미겔 이달고는 루소의 저서들을 통해 개혁 지향의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는 교회가 빈곤계층을 구제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원주민과 메스티소로 구성된 교구민들의 열악한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이들에게 새로운 영농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처럼 평소에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이달고 신부가 스페인의 식민정부에 대항하여 600명의 신자들과 함께 봉기한 것이다. 이 봉기에 참여한 사람의 수가 며칠 만에 10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광산, 농장 등지에서 일하는 원주민과 메스티소였다. 이들은 전쟁의 경험도 없었고 무장도 되어 있지 않았지만 주변의 여러 도시를 해방시켰다. 이달고 신부는 과나후아토에서 스페인군을 상대로 전투하는 도중 주교로부터 파문을 당하기도 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멕시코 시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멕시코 시의 스페인인과 크리오요들은 이달고의 이러한 독립운동이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크리오요들은 이달고의 독립운동에 등을 돌리고 스페인군과 손을 잡고 진압에 나섰다.
결국, 독립에 대한 열정은 매우 컸으나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이달고의 군대는 스페인군에 쉽게 패배했다. 그 후 과달라하라로 피신한 이달고 신부는 과달라하라에서 노예제도 폐지, 특정 품목에 대한 정부의 독점 폐지, 원주민에게 토지 환원 등과 같은 여러 가지 개혁적인 조치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었을 뿐 실제적인 힘은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아울러 무지하고 격노한 원주민들의 폭동 앞에 대다수의 크리오요들은 자신들의 방어를 위해 이달고 신부에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의욕은 앞섰지만 철저한 준비가 부족했던 이달고 신부의 독립투쟁은 실패로 끝났다. 이달고 신부는 1811년 3월 체포되어 종교 재판소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달고 신부의 독립투쟁과 순교는 이 지역의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사실 그가 멕시코의 독립을 선언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달고 신부는 오늘날까지 멕시코 독립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멕시코는 '돌로레스의 선언'을 한 9월 16일을 멕시코의 독립기념일로 정했다.
모렐로스 신부
멕시코 북쪽에서 이달고 신부의 독립운동은 실패로 끝났으나, 남쪽지방에서는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이 파본 신부가 독립투쟁을 계속했다.
하사에게는 1레알(real)을
상사에게는 멕시코 은화
내 장군 모렐로스에게는
내 마음 전체를 드리겠노라
이 노래는 조직력이 뛰어났던 모렐로스 신부의 가치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렐로스 신부는 혁혁한 전과를 세우면서 1813년 아카풀코를 점령했다. 그는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크리오요들을 모아 1813년 칠판싱고에서 국민의회를 소집했다. 모렐로스는 이 의회의 개회식에서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자유국가고, 가톨릭만이 멕시코의 유일한 종교다. 그리고 주권은 바로 국민에게서 나오고 법률은 부와 가난을 잘 조정해야 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에 스페인군은 보수적인 멕시코 시 크리오요들의 도움을 받은 모렐로스의 군대를 공격했다. 이에 칠판싱고 의회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814년에 아파싱간에서, 국교는 가톨릭이고 주권재민정신과 삼권분립의 원칙을 기본으로 한 헌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1815년에 모렐로스 신부는 스페인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모렐로스 신부가 처형당한 후 독립군은 멕시코의 독립을 위한 의지가 약화되고 구심체를 상실했다. 그들은 약 5년간 소규모의 게릴라 형태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이달고와 모렐로스의 봉기는 원주민과 메스티소가 중심이 되는 사회를 추구했지만, 그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반면에 이들의 봉기는 오히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청이 병력을 더욱 증강하게 만들어, 보수적인 크리요오들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투르비데
1814년에 카디스 헌법이 폐지되고 절대왕정이 복구된 스페인은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서의 독립운동을 더욱 탄압했다. 그러나 1820년 스페인에서 자유주의자들이 페르난도 7세에 대항하여 자유주의 체제의 회복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누에바에스파냐의 크리오요들은 스페인 본국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점차 독립의 의지를 품게 되었다. 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 지금까지 스페인 본토 출신의 스페인인(페닌술라르)이 소유하고 있던 광산, 토지, 자본 등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기대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멕시코의 독립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크리오요이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청 소속의 군인이었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였다.
이투르비데는 이달고와 모렐로스의 봉기에 맞선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당시 고위성직자, 크리오요 출신의 광산주, 지주들의 지지를 받았던 그는, 1820년 모렐로스 신부의 잔당 토벌을 구실로 부왕으로부터 2,500명의 군대를 지원받아 자신의 세력으로 키웠다. 그리고 당시 스페인에서 페르난도 7세가 자유주의적인 카디스 헌법의 부활을 선언하자,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크리오요들과 교회 성직자들, 그리고 본토 출신의 스페인인이 이에 일제히 반발했다. 그들은 스페인의 자유주의 정책이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으로 파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독립을 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투르비데는 바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1821년 '이괄라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첫째 가톨릭을 국교로 하고, 둘째 페르난도 7세를 국왕으로 추대하는 입헌군주제를 세우고, 셋째 출생국가와 관계 없이 모든 사회 구성원이 동등한 권리를 향유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이 이투르비데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의 제의를 거부함으로써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투르비데는 누에바에스파냐 신임 부왕과의 협상을 통해 1821년 코르도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스페인은 이투르비데에게 정권의 이양을 약속했다. 그런데 당시 멕시코 의회에는 부르봉 왕가가 멕시코의 왕권을 계승해야 한다는 집단, 이투르비데가 왕에 즉위해야 한다는 집단, 그리고 멕시코 연방공화국을 창출해야 한다는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의회를 장악한 이투르비데는 1822년에 아구스틴 1세로 황제에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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