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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의 보호자 라틴아메리카

구름위 2014. 9. 1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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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마르틴

 

 

 

페루의 독립을 선언하는 산 마르틴.
그는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를 해방시킨 후, 페루의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페루의 보호자'로 불리게 되었다.
 
라플라타 부왕령

 

1806년과 1807년, 라플라타(지금의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의 크리오요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을 몰아내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특히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크리오요들은 스페인 상인의 독점을 지지했던 라플라타 부왕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스페인 본국에서 프랑스의 침공과 나폴레옹의 왕위찬탈 등이 일어나 정치적 공백이 생겼다. 이 틈을 타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민들은 1810년 라플라타의 부왕을 추방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을 장악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의 지도자들은 라플라타 전 지역을 단일국가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반면에 그 이외의 지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통치하고 있던 지역의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려고 1816년 투쿠만에서 모여,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 독립과 '라플라타 연합주'의 결성을 선언했다. 이러한 두 세력 간의 갈등은 아르헨티나의 정치사에 중앙집권주의자(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와 연방주의자(내륙 13개 주) 간의 대립을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세 데 산 마르틴

 

중앙집권주의자와 연방주의자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라플라타 부왕령 지역은 혼돈에 빠졌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호세 데 산 마르틴'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산 마르틴은 어렸을 때부터 스페인에서 부모와 살면서 스페인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스페인 군대의 장교로 나폴레옹 전쟁과 아프리카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회는 라플라타 부왕령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완전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페루와 알토 페루(지금의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지에 남아 있던 스페인군과의 일전이 불가피했다. 페루의 공략에 고심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회는 1812년에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산 마르틴에게 이 위업을 맡겼다. 스페인에 있을 때 스페인군의 일원으로서 프랑스군과 싸운 적이 있었던 39세의 산 마르틴은, 스페인의 군대가 페루에 남아 있는 한 독립이 달성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먼저 칠레에 있는 스페인군을 남측에서부터 기습,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814년부터 1816년까지 산 마르틴은 칠레의 접경지역에서 무기를 모으고 병력을 훈련시켰다. 그는 군사력 강화를 위해 특별세를 징수했고 병기창, 화약공장, 섬유공장을 세웠다. 그리고 첩자 1명을 칠레에 보내, 아콩카과 산 정상 남측의 원주민 땅부터 공격할 것이라는 허위정보를 유포시켜서 스페인군을 혼란에 빠트렸다. 원주민들은 이 소문을 듣고 즉각 스페인군에 알렸다.

 

안데스를 넘어

 

1817년 1월, 산 마르틴은 약 5,000명의 군대와 1,600마리의 말을 이끌고 안데스산맥을 넘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그는 이 강행군이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 판단하여 석공들, 빵 굽는 사람들, 물을 실은 마차들까지 동행시켰다. 산 마르틴의 군대는 남아메리카의 최고봉인 아콩카과 산을 통과하면서 바람, 얼음, 화산재와 맞서고, 또 한편으로는 고산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강행군을 해야 했다. 무사히 산맥을 넘은 산 마르틴 군대는 마침내 새벽녘에 샤카부코에서 스페인군과 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1818년에 산 마르틴은 마이푸 전투에서 승리하여 칠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시민들은 산 마르틴을 해방자로서 환영하고 칠레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이를 칠레 독립의 지도자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양보하고, 자신의 최종 목표인 페루의 해방을 준비했다.

 

페루의 보호자

 

스페인의 관심이 비교적 적었던 라플라타 강 유역과는 달리, 페루 부왕령은 스페인 경제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때문에 스페인의 강력한 군대가 페루 부왕령에 버티고 있었다. 아울러 많은 수의 병력이 아타카마 사막을 지나 산티아고 북부에서 리마까지 행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에 산 마르틴은 칠레에서 페루까지 바다를 통해서 침입하기로 했다.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 배를 사들이고 바다에서는 스페인 선박을 나포하면서 전력을 보강해나갔다.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상인도 앞으로 좋은 조건으로 장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 무기와 탄약을 지원했다.

 

1820년, 드디어 산 마르틴이 지휘하는 함대가 칠레의 발파라이소 항을 떠나, 페루의 카야오 항 남쪽에 있던 피스코 항에 상륙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바로 리마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보다는 군사작전과 협상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가능한 한 무력충돌을 피하려 했다. 이는 아직도 페루가 스페인의 강력한 통제 아래 있었고, 일찍이 페루에서 발생했던 무력 봉기가 스페인군에게 무참하게 진압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 마르틴의 군대는 적당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마침 스페인 본국에서 왕정체제에 반기를 든 자유주의자들의 반란이 발생했다. 더욱이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스페인 함대의 출항이 반란군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페루 리마에서는 주민들 사이에 폭동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 마르틴은 이 기회를 틈타 1821년 리마로 진격하여 페루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페루 부왕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산 마르틴의 군대는 페루의 일부 지역만을 장악했다.

 

'페루의 보호자'의 칭호를 받은 산 마르틴은 광산에서 원주민의 강제노동 폐지, 교역협정 체결, 금과 은의 수출 금지 등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신생 페루 독립국의 정치, 경제적 기반을 확립했다. 그러나 페루의 지배층은 원주민에게 자유를 주면 그들은 광산이나 대농장을 이탈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토지소유에 기반을 둔 식민지 체제는 와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산 마르틴은 이러한 식민지 기득권 세력의 뿌리 깊은 인식에 실망했다. 그는 페루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볼리바르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과야킬에서 볼리바르와 만났다.

 

과야킬 회담

 

1822년,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은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남미지역의 독립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었던 산 마르틴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만이 목표였고,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한 나라가 '행운을 가진 한 명의 군인'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고, 강력한 지배자가 아닌 강력한 정부를 원했다. 이에 대해 볼리바르는 인종적인 불평등이 횡행하는 아메리카 대륙에 '효과적인 전제주의', 즉 법적인 평등을 강제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강력한 행정기관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비록 그들이 자유를 말하고 또 자유의 보장을 말하지만, 그것은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하층계급의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에 있고자 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지위만을 높이기 위해서 평등을 원한다"라고 말하면서 '지위, 직업, 부에 입각한 귀족정치'에 반대했다.

 

회담이 끝난 후,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에게 "나는 내 과업을 완수했네. 뒤에 오는 영광은 다 자네 것일세"라는 말을 남기고 아르헨티나 멘도사의 농장에서 은거하다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다시 돌아가서는 일체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후 1824년 딸과 함께 영국과 벨기에에서 살다가 자신이 해방시켰던 라틴아메리카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한 채, 72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역사적인 과야킬 회담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회담은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하나의 나라로 묶는 강력한 대통령제 실시를 주장한 볼리바르와, 대통령제를 시행하기에는 아직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상황이 맞지 않다고 판단해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산 마르틴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끝났다.

 

그 후 볼리바르는 산 마르틴의 당부에 따라 페루의 완전 독립을 위해 더욱 매진했다. 결국 1824년 12월, 아야쿠초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페루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독립시켰다. 그리고서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와 함께 알토 페루(Alto Perú, '높은 페루'라는 의미로 지금의 '볼리비아'에 해당한다)를 해방시켰다. 여기에서도 볼리바르는 페루와 알토 페루를 하나로 묶는 대 페루국 구상을 제시했으나, 결국 알토 페루의 크리오요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스페인으로부터 해방된 알토 페루는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서 '볼리비아'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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