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볼리바르
병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몬 볼리바르.
1997년 미국의 《라이프》 지는 지난 1,000년간 세계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 100명을 선정하여 발표했다. 1위에 에디슨이 선정되었고, 콜럼버스가 2위, 그리고 시몬 볼리바르가 25위로 선정되었다. 토머스 제퍼슨(10위)과 나폴레옹(12위)이 바로 볼리바르와 같은 시대인 18세기 인물들이다.
시몬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태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루소의 자유와 정의, 기본권 사상 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다. 1799년, 16세의 시몬 볼리바르는 유럽 여행에서 프랑스 파리 혁명의 분위기를 경험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자신보다 두 살 연상이던 베네수엘라 출신의 마리아 테레사 로드리게스와 결혼해서 카라카스로 함께 귀국했다. 그런데 그녀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이러한 일을 겪은 볼리바르는 '라틴아메리카의 독립'만이 자신의 영원한 신부(新婦)라고 생각하여 그 후에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볼리바르는 "나 자신의 명예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내 조국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스페인의 권력을 무너뜨릴 때까지 나의 몸과 마음은 한시도 쉬지 않을 것이다"라는 결의를 다지면서 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볼리바르는 1810년 7월에 독립군 총사령관인 미란다 장군과 함께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독립군은 스페인군과의 일전을 앞두고 카라카스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던 카라카스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해 2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났다. 독립군은 '신이 도와주지 않는 전쟁'을 더는 수행할 수 없었다. 그 후 볼리바르는 1812년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베네수엘라 땅에서 스페인 세력들을 격퇴하고 카라카스에 입성했다. 이때 그가 받은 칭호는 '해방자(Libertador)'였다. 그러나 1814년 스페인군과 식민 당국의 반격으로 볼리바르는 카라카스를 내주고 자메이카로 피신해야 했다.
볼리바르는 1817년 다시 독립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자연이 우리의 의도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자연과 싸워서 자연을 복종시킬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독립군을 이끌어 1819년에 콜롬비아를, 1821년에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를 해방시켰다. 그 후 그는 베네수엘라, 누에바그라나다(지금의 콜롬비아), 에콰도르의 각 지역 대표로 구성된 의회를 만들고, 자신은 종신 대통령에 취임하여 '그란 콜롬비아'라는 단일국가를 세웠다.
볼리비아 - 볼리바르
볼리바르는 페루의 해방을 위한 독립전쟁을 계속했다. 1822년 남미 해방의 두 영웅인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이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만났다. 그 후 2년간에 걸친 전쟁 끝에 1824년 아야쿠초 전투에서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장군이 페루의 스페인 부왕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1825년 페루를 해방시킨 시몬 볼리바르는 페루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남부의 알토 페루지역을 독립시켰는데, 이 나라 이름을 시몬 볼리바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볼리비아'로 했다. 시몬 볼리바르는 1826년 라파스에 도착하여 "오늘로 진정한 볼리비아가 탄생한다"라고 선언하고 헌법을 제정, 공포했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그란 콜롬비아로 귀국하여, 1826년에 수크레 장군이 볼리바르의 뒤를 이어 볼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바다를 경작하는 것처럼··· 라틴아메리카 통합의 좌절
볼리바르는 남미대륙이 하나로 통일되길 원했다. 하나의 연방으로 성장하고 있는 미국에 대항해서 라틴아메리카도 하나로 합쳐야 하며, 만약 통일되지 못한다면 결국 미국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미 전체가 하나로 합쳐지기가 어렵다면, 적어도 남미 북부지역의 '누에바그라나다' 지역만이라도 하나로 통일되기를 바랐다.
볼리바르는 신생독립국들의 통합을 위해서, 또 유럽보다 넓은 지역의 해방을 위해서 활동했다. 이를 위해 볼리바르는 1826년 파나마에서 열린 동맹회의에서 라틴아메리카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서로 협의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것을 호소했다. 그 결과 연방 결성을 위한 조약과 그에 따른 군사 협력, 회원국 간의 동등한 주권 유지, 국가 정치의 질서를 파괴하는 공격 행위에 대한 상호 방위, 범인 인도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륙에 산재해 있는 국가들 간의 지리적 소통의 어려움과 각 국가의 다양한 정치적 입장, 그리고 각 지역 카우디요들의 욕심과 이들의 볼리바르에 대한 의심, 독립 직후 국가들 간의 대립, 미국과 영국의 라틴아메리카 분열정책 등으로 라틴아메리카는 하나의 강력한 연방국가가 아닌 20여 개의 국가로 나뉘게 되었다. 이렇게 한 손으로는 헌법을 기초하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칼을 휘두르면서 달성하려 했던 볼리바르의 노력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시몬 볼리바르는 "우리는 혁명을 위해서 몸 바치는 동안 배울 시간이 없었다" "아메리카 대륙 전체는 피비린내 나는 무질서가 난무하는 무서운 무대가 되고 말았다.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은 쓰러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고 있으며, 온 나라가 내전에 휩싸여 있다" "라틴아메리카에도, 아메리카의 국가들 간에도 신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약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헌법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삶은 고통이다"라고 탄식했다.
볼리바르가 1830년 5월 8일 밤 보고타를 떠날 때, 사람들이 발코니에서 그의 머리에 오물을 쏟아 부었다. 이에 볼리바르는 개의치 않고 "자! 갑시다. 사람들은 이제 우리를 원하지 않는 것 같소"라며 보고타를 떠났다. 그는 또한 산타마르타에서 삶을 마치면서 자신의 묘비명을 직접 구술했다. "아메리카는 이제 통치가 불가능하다. ···마치 혁명에 몸을 내던진 사람이 바다를 경작하는 것처럼···."
이렇게 해서 젊은 이상가이자 탁월한 군사령관이었던 볼리바르는 1830년 4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한 지 2년 만에 '그란 콜롬비아'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의 3개 국가로 분열되었다. |
'역사 ,세계사 > 아메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멕시코의 독립 (0) | 2014.09.19 |
---|---|
페루의 보호자 라틴아메리카 (0) | 2014.09.19 |
독립운동 (0) | 2014.09.19 |
식민제국에 저항한 원주민의 반란들 (0) | 2014.09.19 |
토착주의 라틴아메리카 (0) | 2014.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