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팍아마루
식민제국에 저항한 원주민의 반란들
식민지 본국에 대한 원주민들의 반란도 일어났다. 원주민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스페인의 정복자들에게 복종했던 것은 아니었다.
잉카제국을 점령한 피사로는 1533년부터 1536년에 걸쳐 망코 카팍을 꼭두각시 황제로 임명했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망코 카팍을 사슬에 묶고 끌어내 신하들 앞에서 그의 몸에 오줌을 누거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등, 그에게 치욕스런 모욕을 주었다. 이런 모욕을 더는 참지 못한 망코 카팍은 결국 1536년에 쿠스코를 탈출하여 옛 잉카의 군대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 후 그는 안데스의 깊은 곳에 들어가 게릴라전으로 스페인 정복자들과 투쟁하다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멕시코에서도 광산마을인 사카테카스 북쪽 산지에 살았던 치치멕족이 1541~1542년에 스페인의 정복자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스페인 부왕의 군대를 잇달아 무찌르며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갔다. 이에 멕시코의 부왕인 멘도사가 직접 진압에 나서 이 치치멕족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외에도 페루 부왕령의 남쪽지역인 칠레 중부에 살고 있던 아라우칸족이 스페인의 침입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소규모의 게릴라 전술로 막강한 스페인 군대를 괴롭혔다. 피사로의 부하이자 칠레 지역의 식민지 확장에 큰 공을 세웠던 페드루 데 발디비아가 아라우칸족에게 잡혀서 처형당했다. 그 후 1557년, 페루의 부왕 안드레스 우르타도 데 멘도사는 자신의 아들을 보냈으나 역시 그들을 괴멸시키는 데 실패했다. 스페인의 식민통치시대 동안 아라우칸족의 저항은 계속되어, 칠레가 독립한 후 1850년에야 비로소 칠레와 아라우칸족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대의 원주민 반란으로는, 잉카제국의 후예인 투팍아마루가 1780년에 일으킨 반란을 들 수 있다.
투팍아마루 반란
투팍아마루 2세의 처형 장면.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780년, 쿠스코 출신의 원주민 지도자였던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가, 원주민들에게 신화적인 존재였던 투팍아마루의 이름을 따서 자신을 '투팍아마루 2세'로 명명했다. 그리고 스페인의 정복자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안데스 지역의 광산에서 원주민들은 노예처럼 혹사당했다. 투팍아마루 2세는 이러한 압제를 타파하고자 했다. 그는 놀라운 지도력을 보이면서 6만에 가까운 원주민으로, 잉카의 수도 쿠스코를 중심으로 남부 페루 및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 북부까지 점령했다. 투팍아마루 2세는 체포한 스페인 총독에게 녹인 금을 먹게 한 뒤 처형시켰다. 이는 황금에 굶주린 스페인의 정복자들에 대한 상징적인 보복이었다.
그러나 1781년, 투팍아마루 2세를 포함해서 그의 아들, 아내, 친지, 측근이 모두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처벌은 가혹했다. 투팍아마루 2세는 아내와 아들이 처형되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그는 혀가 잘렸고 양편에서 끄는 말들에 의해 팔과 다리가 갈기갈기 찢겨졌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광장 한가운데로 끌려 나온 그는 혀가 잘렸다. 그의 두 팔과 두 발을 네 마리의 말에 연결시켜 각기 네 방향으로 돌진시켰다. 그러나 그의 몸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서 거미처럼 공중에 매달린 채 있었다. 이에 그의 머리를 베고 몸통을 교수대 밑에 놓고는 그의 수족을 절단했다'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투팍아마루 2세는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의 투쟁으로 인해 스페인의 식민 지배층은 원주민들의 반란을 처음으로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의 투쟁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옛 잉카제국의 영화를 꿈꾸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살아 있다.
가까운 예로 1960~1970년대 우루과이의 게릴라 단체는 자신들을 '투파마로'라 불렀고, 1990년 중반까지 활동한 페루의 한 도시 게릴라 세력도 자신들을 '투팍아마루 민족해방운동'으로 칭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안데스에서는 초목의 씨앗까지도 '투팍'의 이름을 침묵 속에서 반복하여 부른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안데스 원주민들의 가슴 속에 '투팍아마루'의 존재가 깊이 새겨져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브라질의 치과의사 티라덴테스
1750년 이후 브라질에서 금과 다이아몬드의 산출량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 왕실은 미나스제라이스 지역에 사탕수수 농장의 건설을 금지시키고, 금을 채굴하기 위해 낮은 임금의 노동력을 동원했으며, 세금을 과다하게 징수했다. 그러나 미나스제라이스 주민들은 포르투갈 왕실에 내던 5분의 1 세금을 제때 내지 못했다. 이에 포르투갈 왕실은 이 세금을 강제로 징수함과 동시에 일명 '데하마(derrama)1)'를 또다시 부과했다. 이에 미나스제라이스 주민들은 포르투갈 왕실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불만이 유럽에서의 유학을 통해 자유주의 등의 신사조를 접한 브라질 부유층 자녀들의 민족주의 의식과 합쳐져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의 주동자는 주아킹 주제 다 실바 사비에르(일명 '티라덴테스')였다. 그는 의사, 상인, 군 장교 그리고 치과의사 등의 직업을 가졌는데, 그는 그의 마지막 직업인 '치과의사'라는 의미의 '티라덴테스'로 불렸다. 그는 노동자, 군인, 사제, 그리고 법률가의 지원을 받아 싸우면서 공화정 선포, 대학의 설립, 노예제도의 폐지, 그리고 브라질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요 주동자 중 3명의 포르투갈인의 배반으로 주모자였던 '티라덴테스'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792년에 사지가 절단되는 참형을 받았고, 그의 머리는 경고를 목적으로 해서 많은 사람에게 공개되었다. 그러나 이 반란사건으로 인해 포르투갈 정부는 '데하마'의 징수를 중지시켰다.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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