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왕실에 대한 반역
태어난 땅에 대한 사랑의 감정 - 토착주의
18세기 중엽부터 프랑스의 사상계를 풍미했던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등 계몽주의 사상이 브라질에서 그들의 민족주의 의식과 어울려 '토착주의 의식'으로 나타났다.
이 토착주의 의식은 자신이 태어난 땅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다. 이는 17세기 초 네덜란드인이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브라질을 침략했을 때, 브라질에 살고 있던 원주민과 흑인 그리고 포르투갈인이 함께 힘을 합쳐 네덜란드인의 침공에 대항하는 투쟁과정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브라질에서 금이 발견됨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의 절대군주제와 중상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을 넘어 브라질의 독립을 요구하는 반(反)포르투갈 혁명으로까지 비화되었다.
반(反)포르투갈 혁명들
이러한 토착주의 의식은 브라질에서 반(反)포르투갈 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르 부에누의 환호' '마라냥 반란' '엠보아바스의 전쟁' '마스카치스의 반란'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먼저 1641년 상파울루에서 '아마도르 부에누의 환호'라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포르투갈에 반대하고 브라질의 독립을 요구하는 일련의 혁명적인 사건들의 단초가 되었다. 1640년에 스페인으로부터 포르투갈이 독립하고 동 주앙 4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남부지방에 위치해 있던 상파울루의 주민들은 스페인 식민지 국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동 주앙 4세를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들이 지지했던 지방의 유지이자 많은 부(富)를 소유한 아마도르 부에누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아마도르 부에누는 포르투갈 왕실에 충성을 맹세하며 피신했다. 이에 상파울루 주민들은 하는 수 없이 아마도르 부에누의 의견을 존중하여 동 주앙 4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
1684년 마라냥에서 일어난 반란은, 원주민 노예화를 적극 반대했던 예수회 선교사 비에이라 신부에 의해 일어났다. 현지의 포르투갈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비에이라 신부의 활동에 심하게 반발했다. 이에 포르투갈 왕실은 원주민에 대한 노예화를 전면 금지시키는 대신, 1682년에 '마라냥 무역회사'를 설립, 이를 통해서 향후 20년간 1만 명의 노예를 수입하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이에 1684년 이 지역의 시인이자 변호사, 그리고 농장주였던 마누엘 베크만은 주정부에 반기를 들어 마라냥 무역회사를 없애고 예수회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1년 후 베크만은 포르투갈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면서 폭동은 끝났다. 이 반란의 진압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은 다시 복귀했다.
1708년에는 미나스제라이스에서 '엠보아바스(emboabas)1)의 전쟁'이 발생했다. 1700년대 초 미나스제라이스 지역에서 상당한 금광이 발견되면서 많은 수의 포르투갈인과 바이아 주민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어 제각기 금광의 소유권을 나눠 가졌다. 이들과 이미 금광을 발견한 상파울루 출신 사람들 사이에 잦은 대립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대립 속에서 상파울루 주민 300여 명이 엠보아바스군에게 잡혀 모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상파울루 주민들이 군대를 조직해서 전쟁을 벌였으나, 엠보아바스군이 승리하여 전쟁은 끝났다.
그밖에 1710~1712년에는 페르남부쿠에서 '마스카치스(mascates)2)의 반란'이 일어났다. 올린다 시는 네덜란드의 지배 전까지만 해도 사탕수수 농업으로 레시페 시보다 경제적으로 매우 윤택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인이 식민통치의 중심을 레시페 시로 옮긴 이후, 올린다 시는 상대적으로 경제발전의 속도가 느렸다. 이로 인해 경제적 우위에 있었던 레시페 시의 포르투갈인은 올린다 사람들을 경멸하고 얕보았다. 그러던 중 동 주앙 4세가 레시페 시를 주의 수도로 승격시키자, 올린다 시민들은 분노하여 레시페 시를 공격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인의 반격으로 주모자는 체포되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그 후 레시페 시는 페르남부쿠의 주도로 확정되었다.
식민지 시대 말기의 브라질
포르투갈은 1640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다시 독립한 후,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해외 식민지를 되찾았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상권이 네덜란드와 영국에게 넘어가자,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브라질에 대한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그 결과 18세기 초 미나스제라이스와 바이아 지방에서 금과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브라질 경제의 중심이 해안에서 내륙으로, 북부에서 남부로 옮겨졌고, 18세기 중엽에는 식민지의 수도가 살바도르에서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겨졌다.
이렇게 브라질에서의 활발한 식민개척과 금의 유입으로 인해 포르투갈의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식민지로부터 들어오는 부(富)를 이용해 포르투갈 왕실은 또다시 사치에 빠져들었다. 여기에 포르투갈 국민은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이주하여 심각한 경제,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고, 영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는 포르투갈의 경제를 다시 위축시켰다.
1750년에 즉위한 동 주제 1세에 의해 재상으로 기용된 폼발 재상은 '왕의 권력은 신의 이름으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철저한 절대주의 왕권정치에 바탕을 두고, 먼저 수출입과 노예의 교역, 해운의 독점권 등을 전담할 회사의 설립과 채굴된 금에 대한 세금의 부과 등을 통해서 포르투갈 본국과 식민지 간의 관계 변화를 추구했다. 또한 재정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금과 다이아몬드의 밀매를 억제하고, 1771년에는 직접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에 나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후에 미나스제라이스에서 금의 가격이 떨어지면서 포르투갈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매년 무겁게 부과되는 세금으로 인해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또한 1755년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 시를 재건하기 위해 지출된 엄청난 경비와, 영토문제로 인한 스페인과의 전쟁 등으로 포르투갈의 경제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악화된 경제상황 속에서도 폼발은 중앙집권정책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비대해지는 종교단체를 통제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 예수회를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이 몰수한 예수회 재산의 대부분을 대상인과 농장주들에게 경매에 붙여서 매각했다. 그런데 이 예수회의 추방은 포르투갈의 식민지 교육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 이는 스페인의 식민지에 많은 대학이 세워진 것에 비해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에는 한 개의 대학도 세워지지 않았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포르투갈 왕실에 대한 반란의 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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