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봉 왕조의 개혁과 크리오요들의 반발
독립운동
제2의 라틴아메리카 정복 - 부르봉 왕조의 개혁
1700~1713년의 왕위계승 전쟁으로 스페인 왕실은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부르봉 왕조로 바뀌었다. 부르봉 왕조의 카를로스 3세는 1765년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던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부르봉 왕조의 개혁' 또는 '제2의 라틴아메리카 정복'이라는 개혁조치를 시행했다. 이것의 주요 골자는 식민지의 행정 및 경제체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왕실의 수입을 증대시키고 식민지에서의 통치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카를로스 3세는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시행되었던 복잡한 행정체제를 감독관제(인텐덴시아, Intendencia)로 바꾸었는데, 이 감독관에 스페인 본토 출신의 스페인 사람인 페닌술라르들을 임명했다. 또한 그동안 크리오요들이 장악해온 식민지의 지방재판소들 역시 페닌술라르의 통제하에 두었다. 이는 식민지에서 국왕의 통치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해외교역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밀무역을 통해 크리오요들이 수익을 올리던 많은 상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해 왕실의 수입을 증가시켰다.
이러한 개혁정책은 일시적으로 식민지 통치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한편으로는 크리오요와 페닌술라르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크리오요들은 식민사회의 토착 엘리트로서 기반을 다졌지만, 정치적 지위나 경제적인 면에서 불이익을 받아왔다. 때문에 스페인 본국의 개혁정책에 강하게 반발했으며,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다.
아시엔다의 크리오요(신대륙에서 태어난 스페인인).
이러한 국내외의 여러 요인이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무엇보다도 1807년 나폴레옹의 이베리아반도 침공이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 침공 이후 자신의 형 호세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추대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이를 정통성이 없는 왕이라고 규정하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스페인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배의 진공상태를 의미했다. 그 후 스페인에서 다시 왕정복고가 이뤄졌지만, 그 사이 왕실의 권위와 세력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크리오요들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독립운동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가 1810년부터 1825년 사이에 독립을 했다. 1810년 한 해에만 4월에 베네수엘라, 5월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9월 16일에는 멕시코, 그리고 9월 18일에는 칠레 등 당시의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현재의 멕시코)부터 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걸친 지역까지 동시에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운동에는 많은 독립영웅이 나타났다.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를 독립시킨 후 이들을 통합해 '그란 콜롬비아 공화국'을 결성하여 '아메리카의 해방자'라는 칭호를 얻은 시몬 볼리바르, 그리고 아르헨티나를 독립시키고 해발 4,000미터의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의 독립을 달성한 후 페루를 거쳐 에콰도르까지 진격해 이들 나라에 독립의 초석을 세운 산 마르틴 등이 바로 그들이다.
카우디요의 출현
그런데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은 한 국가의 독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독립전쟁의 영웅들 또는 특출한 개인과 소집단의 독립이었다. 독립 후에도 각국은 험난한 지리적 여건과 불분명한 국경선으로 인해 국경분쟁이 빈번히 일어났다. 이로 인해서 군부의 역할이 더 중요시되었는데, 그 역할은 바로 각 지역의 군벌 독재자들이었던 '카우디요(caudillo)'의 몫이었다.
카우디요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의 선봉에 서서 많은 공을 세웠던 '지도자' 또는 '군벌'을 의미한다. 이들은 대부분 사적인 군사력을 갖춘 정치 두목이자 가부장적인 권위로 정치를 했던 독재자들이었다. 또한 독립 후 통치의 진공상태를 정치적인 규율이나 공식적인 제도에 의존하기보다는, 폭력에 호소하여 채우려 했던 존재가 바로 이 카우디요였다.
독립 당시, 라틴아메리카 각국은 아직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리마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같은 곳의 인구가 고작 수만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곳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지방의 작은 우두머리를 자신의 밑에 두기만 하면, 그 지역의 권력을 모두 장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독립 후 라틴아메리카에서 빈번히 발생했던 쿠데타는, 한 카우디요가 정권을 잡고 있는 동안 또 다른 카우디요가 사병(私兵)을 일으켜 이를 뒤엎고 정권을 빼앗는 것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19세기 라틴아메리카는 '카우디요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사병화된 군대가 정치에 미친 영향이 상당히 컸다.
독립 후 50년간 지속된 이 카우디요 체제(caudillismo)는,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정치적인 경험이 축적되고 막대한 해외자본과 기술의 유입에 따른 민족국가의 건설이 진행되면서 쇠퇴기를 맞았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 정치의 전형적인 모습인 강력한 카리스마의 개인 통치, 강압적인 통치, 권력의 장악과 유지를 위한 군사력 이용, 권력 중앙집중화 등이 바로 이 '카우디요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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