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독립 후의 라틴아메리카

구름위 2014. 9. 19. 10:58
728x90

 

먼로 독트린

 

미국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1823년 12월 초 의회 연설에서 남북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거부하는 상호불간섭원칙을 선언했다. 이 정책은 라틴아메리카 제국(諸國)의 독립과 맞물려 나왔던 일명 '먼로 독트린'으로 불렸다. 이 정책의 골자는 '유럽은 라틴아메리카의 내정에 더는 개입해서는 안 되며, 미국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간섭을 강력히 저지하겠다'는 것이다. 즉, 라틴아메리카에서 미국이 패권을 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미국은 이 먼로주의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신들의 활동영역을 세계로 넓히기 위한 명분으로 삼았다.

 

 

 

'먼로 독트린'을 풍자한 만화.
미국은 어미 닭으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는 그 뒤에 서 있는 왜소한 모습의 어린 닭들로 형상화되어 있는 이 만화에서 먼로 독트린의 의도를 알수 있다.
 
카우디요 체제

 

독립을 성취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독립전쟁으로 인해서 농촌이 황폐화되었고, 국가의 행정체제가 여전히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 등장했던 계층이 바로 카우디요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던 '지도자' 또는 '군벌'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사적인 군사력을 갖춘 정치 두목으로서 가부장적인 권위로 정치를 했던 독재자들이었다. 카우디요는 국가 건설과 통합에 기여한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한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법과 같은 이성적인 방법보다는 무력에 의존했던 카우디요들의 지배는 독립 이후 186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축적된 정치적 경험과 지속적으로 유입되는 해외자본과 기술, 그리고 근대 서구사상으로 인해서 이 카우디요 체제는 쇠퇴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독립 당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와의 대립이 존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유럽에서 이룩한 모든 정치 과정과 기술의 발전을 이해하고, 지적 자유의 수호,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했다. 또한 의무교육의 실시, 투표권의 확대, 무역과 이민의 장려 등의 사회개혁과, 중앙정부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반대하는 연방주의를 고집했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전통적 가치관과 교회의 특권을 옹호했다. 즉, 식민시대와 유사한 전통적 가치체계를 유지하면서 교회와 국가의 통합을 지지했고, 자유무역 사상이나 외국자본의 유입에는 반대했다. 이들은 또한 행정부가 국가 권력을 강력하게 장악하기를 기대했던 중앙집권주의자들이었다.

 

초기에는 보수세력이 중앙아메리카 연방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우세했지만, 19세기 후반부터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자유주의자들이 연방주의에 기초해서 통치했다.

 

가톨릭주의와 반(反)가톨릭주의

 

이러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대립과 함께 가톨릭교회 내부의 분열로 인한 갈등이 나타났다.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헌법에서 가톨릭을 국교로 선언했다. 하지만 독립운동 기간 중 가톨릭 성직자들의 분열로 교회는 식민시대에 지니고 있었던 권위를 상실한 상태였다. 대부분의 주교들은 계속해서 스페인 왕실에 충성한 반면, 상당수 지역의 교구 사제들은 독립군을 지원했다. 일부 국가는 소규모 수도원을 폐쇄하고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방대한 토지를 수용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교회를 장악하려 했다. 더 나아가 1850~1900년 사이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자유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교회의 자산과 토지를 징발하는 법령을 제정하고 시민 결혼법과 이혼법을 제정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보수주의 세력의 가톨릭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의 반(反)가톨릭주의 간의 갈등을 불러왔다.

 

유럽의 이민

 

19세기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유럽에서 라틴아메리카로 많은 수의 이민자가 들어왔다. 유럽 이민자들의 대다수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남부 및 칠레 등으로 갔다.

 

당시의 이민은 식민시대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지역에 집중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아르헨티나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부터 약 600만 명의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그들 중 최소한 절반은 아르헨티나에 영구 정착했다. 우루과이는 50만 명, 브라질은 300만 명을 받아들였다. 그들 대부분은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및 스위스에서 온 이민자들이었다. 칠레는 이탈리아, 스페인 및 독일에서 5만 명을, 그리고 파라과이는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에서 4만 명을 받아들였다.

 

이들 유럽 이민자는 자신을 받아들인 나라들에 유럽의 문화와 농업, 목축 및 공업 기술을 전파했다. 그러나 이민자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이들 활용에 대한 경험이 미숙했고, 이민자들의 국가의식 결여로 정치, 사회적인 갈등과 민족문제 등이 발생했다.

'역사 ,세계사 > 아메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페루와 볼리비아의 재앙   (0) 2014.09.19
왕정과 '밀크커피' 정치   (0) 2014.09.19
브라질의 독립  (0) 2014.09.19
멕시코의 독립  (0) 2014.09.19
페루의 보호자 라틴아메리카   (0) 2014.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