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통치는 교육이다"

구름위 2014. 9. 19. 11:14
728x90

 

아르헨티나

 

독립기의 아르헨티나

 

식민지 통치 시대 내내 아르헨티나 지역은 스페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땅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카우디요들이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은 이곳으로 많은 관료를 파견할 이유가 없었다. 이것이 바로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멕시코 지역)이나 페루 부왕령이 식민통치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설치되었던 것과 달리, 리오 데 라플라타 부왕령이 식민통치가 시작된 지 한참 뒤인 1776년이 되어서야 생긴 이유였다. 일단 부왕청이 설립되자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주변 국가와 영국, 프랑스, 미국 등과의 교역이 활발해졌다.

 

그 후 1806년과 1807년 우루과이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의 크리오요들은, 이렇게 활발해진 경제활동을 바탕으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모색했다. 1809년에 새로 부임한 시스네로스 부왕이 스페인과의 독점 교역을 주장했는데, 이는 자유로운 교역을 주장했던 크리오요들과 대립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1810년 라플라타 부왕체제의 붕괴로 이어졌다. 1816년 투쿠만에서 각 지역 대표자 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일부 지역의 참여 거부에도 불구하고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라는 명칭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스페인 최후의 부왕령이었던 라플라타 부왕령이 붕괴된 후, 우루과이, 볼리비아 및 파라과이 지역이 아르헨티나 지역에서 분리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식민시대 동안 이어져 온 전통과의 완전한 단절을 통해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자유주의자들과 각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던 카우디요들 간의 대립이 발생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은 소위 아르헨티나 '목축 문명'의 3개 축이라 할 수 있는 '내륙과 유럽을 연결하는 무역과 관세 수입' '대목장 경영', 그리고 '살라데로(saladero, 목장에서 자란 소를 대량으로 처리할 수 있는 소금절임 공장)'의 영향력에 기반을 둔 강력한 중앙집권주의를 추구했다. 반면에 원주민이 많이 거주했던 안데스 문화권의 투쿠만이나 살타, 칠레와 가까운 산후안이나 멘도사 등은, 육로로 몇 달씩 걸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보다는 칠레의 산티아고와 더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때문에 이들은 각 지역의 특성을 살리는 연방주의를 추구했다. 이처럼 당시 아르헨티나는 국가의 통합을 통한 근대국가 건설이 거의 불가능했다.

 

독재자 로사스

 

이처럼 독립기의 아르헨티나는 각 지역마다 고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동질감 있는 하나의 국가라기보다는 단순한 하나의 지역 단위에 불과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지역에서는 중앙집권주의자(이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및 그 주변의 연안지역이 실권을 잡는 것을 지지했다)와 연방주의자(이들은 각 지역의 자치를 주장하며 느슨한 연합을 지지했다) 사이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취임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문가 출신이었던 로사스는 상업적 수완을 바탕으로 15세 때 이미 많은 토지와 가축을 소유했다. 그는 또한 일찍이 팜파에서 아라우칸족과 싸운 경험이 있는 부친과 팜파에 살아왔기 때문에 가우초(팜파 지역의 목동)보다 더 뛰어난 기마술로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가우초들의 영웅이기도 했다. 1820년에는 내륙주의 지도자들 간에 벌어진 주도권 싸움에서 두각을 나타내 팜파 지역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1829년, 로사스는 2년 동안 무정부 상태에 있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장악하고 주지사 겸 총사령관으로 취임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몇몇 지방의 유력한 카우디요들이 있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장악한 로사스가 가장 강력한 카우디요였다. 183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에서 물러난 로사스는, 이듬해 남부 국경지역의 원주민 정벌에 참여하여 6,000여 명의 원주민을 사살하거나 노예로 만들었다.

 

그 후 로사스는 1835년 주민들의 절대적인 지지 속에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사가 되었다. 로사스는 원주민에게 빼앗은 토지를 자기의 측근들에게 분배했다. 로사스 자신도 80만 에이커의 대목장에서 50만 두 이상의 소를 사육했던 대농장주였다. 이처럼 로사스는 겉으로는 연방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중앙집권주의자였고, 이 두 그룹의 대립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다.

 

이러한 로사스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이루었다. 그가 진정으로 아르헨티나 국민을 위해 정치했으며 유럽에 대항해서 아르헨티나의 정서를 유지시키는 데 노력한 인물로 평가하는 반면, 로사스의 반대파인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잔인하며 모순덩어리인 악의 화신으로 생각했다. 로사스는 '이 나라를 집어삼키고 있던 무질서를 극복했다'는 점은 인정받았지만, 불행하게도 또 다른 극단으로 자신을 몰고 갔다. 그는 전 국민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숭배하게 했고, 교회에서는 자신의 초상화 앞에 향을 피우도록 했으며, 여자들에게 자신의 마차를 끌도록 했다.

 

1868년에 대통령에 취임했던 사르미엔토는 로사스를 "목장에서나 통용될 법을 공화국 정부에 도입했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여러 가지의 비유를 사용해서 로사스의 폭력적인 독재정치를 비난했다. 로사스의 통치 방식을 목장을 운영하는 방법에, 연방파의 상징 휘장을 전 국민에게 두르게 한 것을 가축에게 낙인 찍는 것에,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칼로 처형하는 것을 가축의 목을 따는 행위에, 국민을 이유 없이 구금하거나 마소르카(mazorca, más horca, 더 많은 교수형)라는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길거리에서 국민을 매질하는 것을 가축을 길들이기 위한 로데오에 비유했다.

 

1829년부터 1852년까지 23년간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유지했던 로사스는, 185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중앙집권론자들에 의해 추방되어 영국으로 망명해 살다가, 1877년에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통치는 교육이다 - 사르미엔토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
그는 '통치는 교육이다'라는 정치 철학을 갖고 아르헨티나의 교육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국부로 숭상받고 있다.
 
미트레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던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는 교육자이자 사상가이며 정치가였다.

 

그는 연방제를 주장했던 로사스에 반대하는 반독재 투쟁으로 구금되었다가 1841년에 칠레로 망명했다. 이 망명생활 동안 사르미엔토는 타고난 재능과 박식함을 바탕으로 칠레의 정계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유럽, 북아프리카, 미국 등지를 여행했다. 사르미엔토가 여행에서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1851년은, 아르헨티나가 극도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프랑스,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등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또한 로사스의 지지자였던 우르키사가 오히려 로사스 독재 타도를 외치는 등 독재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시기였다.

 

결국 1852년 로사스는 축출되고 우르키사의 주도하에 제헌의회를 구성하여 1853년 헌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각 지방 사이의 이해가 엇갈려 다시 내분에 빠졌다. 1862년 대통령이 되었던 미트레는 국가의 통합을 이룩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상인 부르주아들을 중심으로 외국과의 무역이나 외국자본의 도입을 적극 장려하고 문화적으로도 서구화를 적극 추진했다.

 

미트레의 뒤를 이어 국무장관 겸 외무장관으로 활동했던 사르미엔토가 186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사르미엔토는 '통치는 교육이다'라는 자신의 정치 철학을 갖고 교육에 중점을 두어서 아르헨티나 교육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보호무역을 폐지하고 자유무역을 활성화했다. 또한 사르미엔토는 총 52권에 달하는 작품집을 남긴 저술가이기도 했다. 그는 국가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엘리트 집단이 나서야 하며, 계몽이 덜 된 국민은 끊임없이 교육을 받고, 이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과감히 도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아르헨티나에 바다로 나가는 출구가 라플라타 강 하나뿐이므로 연방주의가 아닌 중앙집권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대 아르헨티나의 초석을 다졌던 사르미엔토는 극단적인 사대주의자, 인종차별론자, 약육강식의 적자생존을 신봉하는 진화론자 등 국내외의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르헨티나의 국부로 숭상받고 있다.

 

중앙아메리카 연방의 탄생

 

중앙아메리카(1)

 

 

 

 

아티틀란 호수.
과테말라에 있는 이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 중 하나다. 중앙아메리카 연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과테말라는 정치와 경제의 불안으로 인해서 여전히 그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중앙아메리카 연방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중앙아메리카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청(지금의 멕시코 지역) 아래의 과테말라 총독령에 속해 있었다. 이 지역은 식민지로서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매우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멕시코의 이투르비데 황제는 1522년에 군대를 파견하여 중미지역을 멕시코에 통합시켰다.

 

그러나 1823년 이투르비데 황제 체제가 몰락하면서, 중미지역의 지배계층은 멕시코로부터의 독립과 중앙아메리카 연방의 결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이듬해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했다. 이 헌법에는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등으로 구성된 연방제의 확립과 노예제도의 폐지 및 가톨릭교회의 특권 인정 등을 담고 있었다. 이 연방헌법에 따라 엘살바도르 출신의 마누엘 호세 아르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연방헌법은 각 지역의 자율권 행사를 제약하는 중앙집권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유주의자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갈등이 격화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 두 세력 간의 갈등은 1829년 자유주의자들이 과테말라 시를 점령하여 온두라스 출신의 자유주의자 프란시스코 모라산이 집권하면서 종식되었다. 모라산은 집권 후 보수주의자의 주된 지지세력인 가톨릭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힘썼다. 이에 대항해 대지주와 가톨릭 사제들을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은 1836년 말에 발생된 콜레라에 대해서, 신앙심이 없는 자유주의자가 원주민을 말살할 목적으로 콜레라균을 살포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분노한 과테말라 산악지역의 원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 반란은 즉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이 반란의 중심에는 과테말라에서 양돈업을 하는 호세 라파엘 카레라가 있었는데, 그는 1838년 모라산의 자유주의 정부를 붕괴시키면서 중앙아메리카 연방을 와해시켰다.

 

모라산 정부가 붕괴된 후 소집된 중앙아메리카 연방의회는, 각 주가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하여 독립국가로서의 역할을 하게 했다. 그러자 니카라과, 온두라스, 코스타리카가 연방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중앙아메리카 연방은 15년 만에 해체되었다. 결국 중미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등 5개국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초 파나마는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했고, 1981년 벨리세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중앙아메리카는 모두 7개국으로 나뉘게 되었다.

 

과테말라

 

과테말라는 멕시코와 인접해 있으면서 마야문명이 발생된 곳이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중앙아메리카 연방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정치 불안과 경제의 후진성으로 인해 여전히 그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

 

중앙아메리카 연방을 붕괴시킨 장본인이었던 라파엘 카레라가 바로 과테말라 출신이었다. 그는 '교회의 부활, 외국인 추방(여기에서 외국인은 온두라스 출신의 '모라산'을 지칭한다)'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1838년 모라산 정부가 붕괴되고 정권을 잡은 카레라는 1865년에 사망할 때까지, 소수의 지배계층, 외국기업, 그리고 교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유주의자를 탄압하는 강력한 보수주의 정책을 폈다. 이로써 과테말라의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또한 카레라는 가톨릭을 국교로 선포하고 추방되었던 예수회를 다시 불러들였으며,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를 인정하는 등 가톨릭의 특권을 회복시켜 교회의 부활을 꾀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과테말라는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온두라스에 내정 간섭을 해서 중미 각국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1865년 카레라가 사망하자 자유주의자들은 루피노 바리오스를 앞세워 1871년에 권력을 잡았다. 바리오스의 통치는 같은 시기의 멕시코 집권자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통치와 상당히 유사했다. 그는 소위 '정치적 보스'로 불리는 각 지역의 관리를 중용하여 이들에게 질서 유지 및 지역 내의 농민과 노동자를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그는 또 예수회를 추방함으로써 교회의 영향력을 극소화시켜 교회가 각 지역 관리의 통제하에 놓이게 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룩한 바리오스는, 철도 건설, 도로, 전화, 전신시설의 확대, 국가의 주산물인 커피와 바나나의 생산 증대와 재배작물의 다양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바리오스는 원주민들의 생활 향상에는 등한시하고 오히려 유럽의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한편 바리오스는 대외적으로 멕시코와의 국경문제를 해결하는 등 외교적 역량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중앙아메리카 연방을 재건하기 위해 인접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1885년 바리오스는 과테말라가 중앙아메리카 연방의 중심국가이므로 자신이 군의 최고 사령관이라는 선언을 했다. 이에 엘살바도르를 포함한 주변의 다른 국가들은 반발했다. 바리오스는 이러한 반발에 맞서 엘살바도르와 전투를 벌였으나 그 해 사망했다. 이로써 중앙아메리카 연방의 재창출은 무산되었다.

 

과테말라는 1871년부터 1885년까지 14년 동안의 바리오스의 집권기를 거쳐, 1898년부터 1920년까지 22년 동안의 에스트라다 카브레라의 장기 집권을 경험했다.

 

엘살바도르

 

엘살바도르는 중미 7개국 중 가장 작고, 유일하게 대서양 연안과 면해 있지 않은 나라다. 중앙아메리카 연방을 이끌던 모라산 정권이 붕괴된 후, 엘살바도르는 헌법을 제정하여 1841년 독립을 선언했다. 엘살바도르는 국토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아서 토지문제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소수의 지주들이 자신들의 토지를 유지하면서 토지가 없는 농민을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사병(私兵)을 육성하는 등, 엘살바도르는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었다.

 

1861년 헤라르도 바리오스가 집권하여 개혁을 실시했다. 그는 헌법에서 국가와 종교를 분리했는데, 이에 반발하여 산살바도르 주교가 헌법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고 과테말라로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1876년에 집권한 라파엘 살디바르는, 1880년에 원주민 공동체인 에히도(ejido)가 집단적으로 토지를 갖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로써 소수 귀족, 즉 전통적인 '14가문(Las Catorce)'이 원주민 토지를 강탈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그 후 통치자들은 이렇게 소수의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개혁하려는 정책을 폈으나, 잦은 정권교체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여기에 1872년, 1875년, 1885년 및 1898년 네 차례에 걸쳐 토지 없는 농민들의 대규모 유혈봉기가 발생하는 등, 엘살바도르에서는 토지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끊이질 않았다. 특히 엘살바도르의 '14가문'은 결혼이나 상호출자 등을 통해서 국가의 정치, 경제적인 권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역사 ,세계사 > 아메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충국   (0) 2014.09.19
보수와 자유의 각축장 - 니카라과  (0) 2014.09.19
베네수엘라  (0) 2014.09.19
빵이냐 곤봉이냐  (0) 2014.09.19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0) 2014.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