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긴 나라

구름위 2014. 9. 1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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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칠레 북부의 아타카마 사막
 

 

칠레 남부의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남북 길이 4,200킬로미터, 해안선은 1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나라 칠레에는 위도에 따라 사막, 지중해성, 온대, 한랭기후 등 다양한 기후가 있다.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1817년 1월, 산 마르틴은 약 5,000명의 군대와 1,600마리의 말을 이끌고 안데스산맥을 넘어 샤카부코에서 스페인군과 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1818년에 산 마르틴은 마이푸 전투에서 승리하여 칠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산티아고의 시민들은 산 마르틴을 해방자로서 환영하고 칠레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했으나, 그는 칠레 독립의 지도자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이를 양보했다.

 

베르나르도 오이긴스는 먼저 독립국가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해군을 창설, 영국과 미국에서 전함을 구입하여 군사력 증강에 힘을 쏟았다. 그는 또한 귀족 칭호와 장자 상속제를 폐지하고 초중등 교육기관을 확대했으며, 이를 위해서 영국에서 많은 수의 교사를 초빙했다. 반면에 그는 성직자를 임명할 때 국가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반(反)교회정책을 폈는데, 이는 보수주의자의 반발을 샀다. 반발은 1822년의 흉작과 대지진에 따른 생활고로 인해 더 커져만 갔다. 반발은 결국 폭동으로 변하여 1823년 오이긴스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는 1824년 페루에서 사망했다.

 

정치의 안정 - 디에고 포르탈레스 팔라수엘로스

 

오이긴스가 사임한 후 칠레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신생국이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주, 성직자, 대상인 등 보수주의자와, 소시민이 주축이 된 자유주의자의 갈등으로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1830년에 결국 보수주의자의 승리로 일단락되어, 이후 30년간 보수주의자가 집권했다.

 

이 보수주의자의 중심에는 디에고 포르탈레스 팔라수엘로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보수파와 자유파 간의 갈등이 심할 때 반란에 참여했던 군 장교들과 자유주의자들을 공직에서 추방했다. 또한 그는 민주주의나 지방분권화가 초래할 혼돈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세력을 철저히 제거함으로써 혼란했던 칠레 정국을 안정시켰다. 한편 그는 영국의 제도나 문화 등을 칠레에 흡수시키기도 했으며, 아르헨티나 출신의 사르미엔토나 베네수엘라 출신의 안드레스 베요를 초치(招致)함으로써 칠레가 최상의 교육제도를 갖추는 데 공헌했다.

 

이처럼 디에고 포르탈레스 팔라수엘로스라는 의회가 부여한 권한을 최대로 행사했던 사실상의 독재자였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을 딴 '포르탈레스 헌법'이라 불리기도 하는 '1833년 헌법'을 기점으로, 칠레는 이후 1880년대의 발마세다 정권까지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이 기간 동안 권력은 10년 임기의 대통령들에 의해 평화적으로 계승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독립 이후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가 군사독재나 쿠데타, 그리고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갈등으로 극단적인 정치적 불안정을 보인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같은 시대 산타안나나 로사스와 같은 독재자 밑에서 억압당하고 있던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와는 달리, 칠레는 의회와 행정부, 공업화와 농업화, 민영과 국영 사이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서 칠레는 라틴아메리카를 통틀어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팽창주의 정책 - 영토의 확장

 

독립 이후 대부분의 신생국가들은 1810년에 소유하고 있던 기존의 영토를 경계로 국경선 설정의 원칙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는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의 신생국가들을 침공할 수 있는 구실을 주었다.

 

칠레는 남북의 길이가 4,200킬로미터로 매우 긴 나라다. 칠레는 남북으로는 북부 아타카마 사막에서 남부 오르노스 곶까지, 그리고 동서로는 안데스산맥에서 태평양까지를 자신들의 영토로 선언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영토는 북쪽으로는 코피아포, 남쪽으로는 칠로에 섬까지였다. 심지어 콘셉시온 아래 지역으로 내려가도 칠레인의 존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것은 칠레에 이주해온 백인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지역에 거주하는 아라우칸 원주민들이 칠레에 편입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1840년 볼리비아-페루 연방의 해체에 성공한 이후, 칠레는 본격적인 영토확장에 나섰다. 북쪽 광산지역에는 주로 주민들이 식민사업에 자발적으로 참가했지만, 남쪽지역에서는 국가가 식민사업을 의도적으로 추진해야 했다. 특히 칠레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마젤란해협에는, 그곳의 기후가 워낙 춥고 삭막했기 때문에 군대를 제외하고 민간인은 이주를 거부했다. 1843년에는 칠레가 마젤란해협지대에 불네스 요새를 건설하자 아르헨티나 측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외교분쟁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칠레는 파타고니아의 영토권까지 주장하면서 1847년에는 마젤란해협지대에 푼타아레나스 시를 건설했다. 한편 칠레는 1845년에 발디비아 지역에서 아라우칸 원주민의 저항을 진압하여, 1850년부터 남쪽으로는 발디비아에서 푸에르토몬트 지역, 북쪽으로는 발디비아에서 콘셉시온에 이르는 지역까지 유럽 이민을 장려했다.

 

1891년의 내란과 의회민주주의

 

1883년 칠레의 승리로 끝난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서, 칠레는 전체 영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북부지역을 차지했다. 이곳은 구리와 초석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어서 초석과 구리의 수출로 칠레 경제가 번영기를 맞이했다. 또한 부를 축적한 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산티아고와 발파라이소의 전통적인 보수세력에 반기를 들었다. 1886년에 집권한 발마세다는 초석 수출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철도, 도로, 항만, 학교, 주택 및 위생시설 등의 대규모 공공사업을 전개했다. 특히 교육개혁을 단행하여 많은 대학을 세웠으며, 독일에서 많은 교사가 칠레로 들어와 교육 발전에 공헌했다.

 

이러한 대규모의 공공사업을 추진하면서 북부의 초석광산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지만 주민과 의회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당시 의회 내의 자유주의자들의 반발로 발마세다는 1886~1890년 사이에 13번에 걸쳐 내각을 교체해야만 했다. 결국 의회에서 소수의 지지파를 갖고 있던 발마세다가 제출한 예산안 통과가 거부되었고, 1891년 의회의 승인 없이 예산집행을 선언하고 각료를 임명했다. 이에 의회는 발마세다의 불신임안을 통과시키고 호르헤 몬트를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지명했다. 이는 결국 내란으로 이어져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호르헤 몬트가 북부의 광산지대와 항구들을 점령하고, 초석광산과 동광에 세금을 부과해 재정 수입을 확보했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협하던 발마세다 정권에 반대했던 북부의 광산업자들도 호르헤 몬트에 동조하여, 결국 호르헤 몬트 측이 정부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발마세다 대통령을 지지하던 육군이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약 8개월간 지속된 내란 기간 동안, 1만여 명이 희생되고 큰 재산 손실을 입어 국가경제는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발마세다 정권의 붕괴는 칠레에서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 종식을 의미했다. 1833년 헌법에서는 대통령이 사실상 지방정치 및 국회의원 선거에 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1891년의 내란에서 반란군이 승리함으로써 소위 의회체제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내란이 끝난 후 의회는 호르헤 몬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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