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 마르티
라파엘 마리아 데 멘디베 선생님
'라틴아메리카 전통의 완성자' '확실한 탈출구를 제시해주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 '영웅이자 성자이며 현인이자 순교자' '아메리카 대륙이 배출한 최고의 천재', 쿠바의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에 대한 평가들이다. 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쿠바 민중에게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다.
1853년에 태어난 호세 마르티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친척의 도움으로 중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라파엘 마리아 멘디베를 만났다. 호세 마르티는 그에게 조국 쿠바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가치 등을 배웠다. 그는 멘디베 선생님과의 토론을 통해서 조국의 독립을 꿈꾸었고, 셰익스피어와 바이런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갔다. 호세 마르티가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망과 멘디베 선생님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훗날 호세 마르티는 멘디베 선생님에 대해서 "선생님은 나에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는 힘을 주신 분이셨다"고 술회할 정도로 그는 호세 마르티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수형생활과 유배
호세 마르티는 16세에 발표한 시 〈절름발이 악마(Diablo Cojuelo)〉와 〈자유 조국(La Patría Libre)〉에서 쿠바 독립의 정당성을 표현했고, 서시시 〈압달라(Abdala)〉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혁명가이자,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시인이었다. 이러한 그의 천재성은 혹독한 수형생활을 통해 더욱 성숙해졌다. 호세 마르티는 1870년 필화사건에 휘말려 6년 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새벽 4시에 기상해 밤늦게까지 채석장에서 돌덩이를 나르는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정신적으로도 고통받아야 했다. 하지만 권력과는 무관하고 경제적, 육체적으로도 아무 능력이 없는 약자의 삶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871년 친구의 도움으로 6개월 만에 수형생활을 끝내고, 그는 스페인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비록 스페인에서의 유배생활(1871~1875년)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이를 배움의 기회로 활용하여 법학과 문학, 철학 등을 공부해 학위를 취득했다. 호세 마르티는 대학에서 19세기 당시 스페인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크라우제의 기독교적 사회 윤리사상과 스페인의 전통적인 무정부주의 사상을 접했는데, 이는 그의 정치, 경제, 사회사상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1875년 호세 마르티는 가족이 살고 있던 멕시코로 이주했다. 멕시코에 체류하면서 호세 마르티는 인종문제와 토지문제 등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적인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암울한 현실을 경험했다. 또한 소수의 카우디요의 횡포,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연계된 소수 권력자의 착취, 이들로 인해서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수많은 원주민과 메스티소의 소외된 삶을 목도했다. 멕시코에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이 들어서자, 호세 마르티는 과테말라를 거쳐 쿠바로 1878년에 돌아왔다. 쿠바에 도착한 호세 마르티는 조국의 암울한 정치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결국 그는 스페인 식민정부에 문제인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1879년에 산티아고 데 쿠바 부근에서 스페인에 대항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나자, 호세 마르티는 체포되어 1879년 스페인으로 또다시 유배되었다. 호세 마르티는 그 후 쿠바에 공식적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미국에서의 생활과 독립운동
두 번째 스페인에서의 유배생활 중에 호세 마르티는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탈출했다. 그는 1880년 혁명위원회의 임시의장직을 맡아서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때부터 1890년까지 10여 년 동안 각종 신문에 글을 기고하면서 조국 쿠바의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호세 마르티는 처음에는 미국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에서의 체류가 길어지면서 미국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미국의 물질문명같이 부도덕한 번영은 민중을 천하고 무감각하게 만들어 민중을 부패시키고 해체시킬 것'이며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는 그 탐욕스러움, 정도를 벗어난 번영, 비도덕적인 풍요로움으로 인해 멸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의 장래에 대해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호세 마르티는, 쿠바를 미국과 합병시키자는 합병론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미국과의 경제적인 합병은 곧 정치적인 합병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속셈일 뿐 진정으로 쿠바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호세 마르티는 그의 문학작품 중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질박한 노래(Versos Sencillos)〉를 1891년 발표한 이후, 라틴아메리카에 적합한 새로운 사회공동체 설립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1892년 쿠바혁명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체시키고 쿠바혁명당을 결성했다. 그는 또한 기관지 《조국(La Nación)》을 창간하여 적극적인 선전과 함께 쿠바의 독립혁명을 가시화하는 작업에 뛰어들었다. 1895년 진정한 쿠바의 독립을 위해서 쿠바 동부해안에 잠입한 호세 마르티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스페인군의 기습을 받고 도스 리오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호세 마르티의 말, 말, 말
-대지의 불쌍한 사람들과 더불어 나의 운명을 던지고 싶네. |
'역사 ,세계사 > 아메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과 라틴아메리카와의 첫 만남 (0) | 2014.09.19 |
---|---|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0) | 2014.09.19 |
미국과 멕시코의 영토전쟁 (0) | 2014.09.19 |
긴 나라 (0) | 2014.09.19 |
콜롬비아 (0) | 2014.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