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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구름위 2014. 9. 19.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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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타소와 라 비올렌시아

 

콜롬비아

 

 

 

보고타 시내(2007년 1월).
군인들이 거리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위문 공연을 하고 있다. 콜롬비아는 1902년에 천일전쟁이 끝난 후 정치적인 안정을 되찾았으나, 1948년 가이탄의 암살로 인해서 사상 최악의 폭동이었던 '보고타소'가 일어나는 등,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가이탄의 암살과 보고타소

 

천일전쟁이 끝난 후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간의 타협으로 1930년까지는 보수주의자가, 1930년부터 1946년까지는 자유주의자가 집권하여 콜롬비아는 비교적 정치적인 안정을 구가했다.

 

1946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공식 후보인 가브리엘 투르바이와 사회개혁을 주장하던 민중주의자 가이탄이 동시에 출마함으로써, 보수당의 단일후보인 마리아노 오스피나 페레스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16년 만에 다시 정권을 잡은 보수당의 마리아노 오스피나 정부는 의회의 다수가 자유당이었기에 통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자유주의 지도자 가이탄이 과두 지배적 정치 사회구조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면서 정부를 강하게 압박했다. 가이탄은 1929년 미국의 연합청과회사의 파업사태를 조사했고, 의회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고발함으로써 보수주의 정권에 타격을 입혀서 전국적인 명성을 떨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활조건 향상과 극심한 빈부 격차 해소를 위해 투쟁했다.

 

이에 오스피나 대통령은 1947년에 위수령을 선포하면서 의회를 해산시키고, 보수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료에 자유주의파 인사들을 대거 임명했다. 계속되는 정치불안과 폭력사태 속에서 1948년에 가이탄이 암살되었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가게를 약탈하고 감옥을 습격했으며, 보수당 내 강경파들의 집, 교회, 공공건물들을 불태웠다. 이 사태가 바로 사상 최악의 도시폭동이었던 이른바 '보고타소(Bogotazo)'다. 30시간 동안 보고타를 완전히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던 이 폭력사태로 인해, 보고타 시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과 교회가 파괴되었으며 2,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라 비올렌시아

 

이 폭력사태는 결국 전국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1960년대 초반까지 2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이른바 '라 비올렌시아(La Violencia, 폭력)'라는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라 비올렌시아는 보수주의 공권력, 특히 자유주의자에 대한 경찰의 공격과 또 이에 대응하는 자유주의 게릴라 세력의 보복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보수당과 자유당이 각각 지원하는 무장 농민단체까지 개입하여 사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보수주의자가 강력한 독재를 통해 질서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지만 농촌의 폭력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여기에 일부 지역에서는 공산당의 지도하에 농민들이 자신들만의 독립된 국민정부를 만들기까지 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53년에 구스타보 로하스 피니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는 집권 후 모든 무장집단에게 화해를 제안했다. 이 제안을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집단이 수락하여 무력 행동은 많이 줄어들었다. 이로써 구스타보 로하스 피니야는 국민에게 크게 지지를 받았다. 또한 국제시장에서 커피 가격이 상승하면서 얻어진 재원을 바탕으로 많은 공공사업이 추진되었고, 서민계층을 위한 국영기업을 설립하여 곡물과 생활필수품 등이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그러나 구스타보 로하스 피니야는 자신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 독립된 정치집단 결성과 별개의 노동조합 창설을 시도하려 했다. 자유당과 보수당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시도가 군사 독재의 장기화를 위한 포석이라 생각하고 강력히 반발했다. 더욱이 커피 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경제적 위기를 맞고, 1957년 전국적인 학생시위와 기업주 및 양대 정당이 대대적인 파업을 하며, 자유, 보수 두 정당이 조직적인 반대활동을 펴자, 구스타보 로하스 피니야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동등 배분'과 '교대' - 국민 전선

 

구스타보 로하스 피니야 정권의 붕괴 후 보수, 자유 양당은 군사평의회와의 협상을 통해, 국민전선 구축을 위한 개혁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국민전선체제는 보수와 자유 양당이 동등하게 정권에 참여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었다. 즉, 이 체제는 16년 간 각료, 국회의원, 주지사 등 주요 공직을 득표와 관계없이 '동등하게 배분'하고, 보수당과 자유당이 4년마다 '교대'로 집권하는 것이었다. 또한 제3당이 선거에 참여할 수 없고, 법률안은 국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통과하며, 여성에게도 남자와 똑같이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양당의 지도자들은 국민전선체제가 콜롬비아에 만연해 있던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주장했으나, 급진자유혁명과 같은 반대파는 이 체제가 제한적 민주주의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58년 의회의 비준으로 개정헌법이 확정되어, 10년 이상 지속된 장기적인 폭력사태는 사라지는 듯했다. 1958년 자유당 정권을 시작으로 4년에 한 번씩 정권이 바뀌면서, 1970년의 보수당의 집권까지 16년간 국민전선 체제는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쿠바혁명의 영향을 받은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1) 등 많은 게릴라 집단의 군사행동이 빈번해졌다. 특히 1970년 보수당 정권하에서 도시에서는 실업자가 증가하고,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대지주의 토지를 강점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특히 '4·19운동(M-19)'의 테러가 극성을 부렸다.

 

게릴라와 마약 테러집단과의 전쟁

 

1974년의 선거에서는 신헌법에 따라 국민전선체제가 종식되어 자유 및 보수당 이외에도 국민연합(UNO)과 대중민족동맹(ANAPO)이 참여했으나 자유당이 집권했다. 자유당 정부하에서는 국제시장에서 커피 가격의 인상에 따라 실업문제를 개선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으나, 인플레이션과 생필품값의 상승으로 파업이 자주 일어났다. 한편 외교적인 면에서는 미국 일변도의 외교정책에서 벗어나 쿠바,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는 등 다변화 정책을 추구했다. 그러나 1979년 1월 M-19 게릴라 집단의 무기고 탈취, 보고타 주재 도미니카 대사관 습격, 마약밀매 집단의 납치, 고문, 파괴 활동 등으로 인해 국내 정국이 혼란에 빠졌다. 더구나 1980년 중엽부터 국제시장에서 커피 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외채가 증가하여 경제사정이 악화되었다.

 

1982년 선거에서 당선된 보수당의 베탄쿠르 쿠아르다스는 게릴라 단체들과 화해를 시도하면서, 민족주의적 독자 외교노선인 비동맹정책을 추구했다. 베탄쿠르 쿠아르다스의 뒤를 이어 1986년 집권한 자유당의 비르힐리오 바르코 바르가스는 1990년 1월 전력, 광산, 석유산업 시설의 폭파 등의 행위를 했던 최대 국제마약밀매단인 메데인 카르텔의 소탕에 힘썼다. 이를 위해 미국의 협조를 얻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게릴라 및 마약 테러집단의 소탕에 힘을 기울였다.

 

34년간의 내전 종식

 

1994년에는 에르네스토 삼페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삼페르 대통령은 8년간 계속된 경제적 호황과 낮은 실업률을 유지한 전임 자유당 정권의 덕으로, 파스트라나 대통령에게 2만 표도 안 되는 근소한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 직후 파스트라나 후보는, 선거 기간 동안 삼페르 진영이 콜롬비아 최대의 마약조직인 칼리 카르텔로부터 600만 달러의 자금을 제공받았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1996년 삼페르 대통령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 후 1998년 선거에서는 전 보고타 시장이자 기자 출신인 44세의 파스트라나가 지난 1994년 대선에서의 패배 이후 재출마하여 12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며 당선되었다. 삼페르 정권의 부패에 염증을 느낀 국민에게 철저한 개혁과 경제성장, 그리고 좌익반군과의 평화협상을 공약으로 내세워, 집권여당인 자유당의 세르파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98년 당시 재정적자가 국민총생산(GNP)의 4.8%에 달하고 실업률은 15.8%, 국민의 36%가 빈곤층에 속해 있는 등 콜롬비아의 경제상황이 악화되어 있었다.

 

또한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이 1만 4,000명의 게릴라에 14대의 경비행기와 80척의 보트, 351개의 기업을 소유하면서 남부 아마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민족해방군(ELN)은 약 5,000명 정도의 게릴라에 242개의 기업을 보유하면서 북동부의 석유 생산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등, 게릴라 단체의 존재는 콜롬비아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파스트라나 대통령은 악화된 경제를 해결하고 지난 34년간 지속된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좌익반군 지도자와 회담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각주
1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Fuerzas Armadas Revolucionarias de Colom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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