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차코전쟁

구름위 2014. 9. 1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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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차코의 석유.
차코지역의 석유를 사이에 두고 미국(달러$)과 영국(파운드£)의 석유회사들의 이익 쟁탈전을 풍자하고 있다.
 
차코전쟁차코(Chaco)는 브라질 서쪽, 그리고 아르헨티나 북쪽에 있는 넓은 저지대인 그란 차코(Gran Chaco)의 일부였다. 당시 볼리비아는 칠레와의 태평양 전쟁에서 패해 태평양으로의 진출이 막힌 상태였기 때문에 또 다른 바다인 대서양으로의 진출이 절실했다. 또한 이곳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면, 삼국동맹전쟁에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게 상당한 면적의 국토를 빼앗긴 파라과이로서는 더는 국토 상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8년 12월 차코지역에서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양국의 소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이의 해결을 위해 아르헨티나, 미국, 쿠바, 멕시코, 우루과이, 콜롬비아 대표들이 모여서 중재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결국 1932년에 차코전쟁이 일어났다. 차코의 보케론 지역에서 볼리비아군 1,200명에 대항하여 파라과이군 5,000명이 집결했다. 결국 1933년 파라과이는 볼리비아와 전쟁을 시작해서, 1935년에 차코의 분쟁지역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전쟁을 끝냈다.

 

당시 인구, 병력, 무기 면에서 볼리비아군이 우세했으나 전쟁의 결과는 정반대였다. 전투에서 파라과이 병사들은 국가 방위를 위해 적극적으로 싸웠지만, 볼리비아군은 강제로 징집된 원주민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식이 결여된 상태였다. 또한 파라과이군은 전투지역의 지세와 기후에 익숙해 있었으나, 볼리비아군은 고산지대 출신들로서 열대 저지대인 차코지역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했다. 3년간의 전쟁기간 중에 황열병, 말라리아, 이질 등으로 인해 볼리비아는 6만여 명, 파라과이는 4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1938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양국은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차코전쟁을 공식적으로 종결했다.

 

35년간의 통치

 

차코전쟁으로 파라과이는 차코지역의 75%에 해당하는 방대한 영토를 확보했으나, 약 4만여 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상당한 전비를 소모해서 국민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졌다. 전쟁이 끝난 후, 파라과이에 많은 망명자가 귀국하고 내분상태에 있던 군부도 통합되었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아직도 많은 갈등 요소가 남아 있었다. 파라과이는 차코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02년부터 1932년 사이에 21명의 대통령이 집권했을 정도로 정치상황이 매우 혼란했었는데, 차코전쟁이 끝나고도 여러 번 정권이 바뀌는 등 그 혼란은 여전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54년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당 후보로 나선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장군이 당선되었다. 그는 1989년 군사 쿠데타로 브라질에 망명할 때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35년간 파라과이를 통치했다. 독일 이민의 후예인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은, 전(前)정권이 아르헨티나와 경제 동맹체를 결성한 것과는 달리 브라질과 경제동맹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파라과이는 브라질의 최대 채권국이자 최대의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스트로에스네르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1961~1967년 사이에 4억 4,100만 달러를 지원받아 반공정책을 강화했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들을 탄압했다. 기존의 헌법으로 다시 출마할 수 없게 된 스트로에스네르는 헌법까지 개정, 재집권했다. 재집권 후 그는 비록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했지만 국내질서를 바로잡고 상·하수도 시설, 도로나 학교, 수력 발전소를 건설했으며, 내륙의 동북부와 볼리비아 국경지대를 개간하여 농민들에게 이를 분배하는 토지개혁도 단행했다. 그는 이러한 국내경제의 활성화에 힘입어 1988년의 선거에서도 89%라는 높은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스트로에스네르는 1989년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장군의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안드레스 로드리게스는 집권 후 경제발전과 정치안정에 노력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93년 후안 카를로스 와스모시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국민의 의사는 나의 약속보다 우위

 

1993년 파라과이 최초로 공정하게 치러졌던 대통령 선거에서, 육군 참모총장인 오비에도의 지원을 받은 와스모시 후보가 당선되었다. 와스모시 대통령은 민간정부를 구성했으나 오비에도의 영향으로 국정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로드리게스 장군의 측근이었던 오비에도는, 쿠데타 과정에서 한 손에 수류탄을 들고 다른 손에는 권총을 든 채 지하 벙커에 숨어 저항하던 스트로에스네르를 체포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후 오비에도는 군 사령관이 되었고 권력의 실세로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이에 와스모시 대통령은 오비에도에게 전역을 명령했으나, 오비에도는 이에 불복하고 자신의 병력을 앞세워 대통령의 사임을 촉구했다. 대통령은 쿠데타 위협을 느껴 오비에도 장군에게 국방장관직을 약속하고 사태를 수습했다. 그런데 파라과이 국민은 이러한 대통령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거세게 저항했다. 와스모시 대통령은 '국민의 의사가 나의 약속보다 우위에 설 것'이라며 장관의 임명을 번복했다.

 

국민의 저항에 일단 후퇴한 오비에도는 1998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와스모시 대통령은 군부의 협조를 얻어 오비에도를 특별군법회의에 군사반란죄로 전격 기소하고, 10년 형을 언도하여 대통령 후보 자격을 박탈했다. 이에 부통령 후보였던 쿠바스가 53%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쿠바스 대통령은 오비에도 장군을 석방했으나, 대법원은 오비에도 장군을 다시 수감토록 했다. 그러나 쿠바스 대통령은 이를 무시했다. 이에 의회는 대통령의 탄핵을 결정했다. 교회도 이를 지지했다. 그런 와중에 대법원장, 외무장관을 역임하고 같은 콜로라다당 소속이면서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던 아르가냐 부통령이 암살되었다. 쿠바스 대통령과 오비에도 장군이 암살을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수많은 시위대가 의사당을 에워싸고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했다.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이에 마치 상원의장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마치 대통령은 여야 모두가 참여하는 거국내각을 구성했다. 이는 50년 만에 야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것으로써, 파라과이는 20세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군사독재의 잔재를 청산하는 나라가 되었다.

 

볼리비아 혁명

 

차코전쟁 이후, 볼리비아는 여러 정치, 사회적인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볼리비아의 진정한 변화는 1952년 볼리비아 혁명에서 시작되었다. 1952년,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노동자, 민병대, 학생, 시민 및 민족혁명운동(MNR) 세력들이 대대적으로 군부 쿠데타 세력에 저항해서 봉기했다. 무장한 광산 노동자들이 정부군을 물리침으로써 민족혁명운동은 좌익성향의 경제학 교수였던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를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미국도 그를 급진세력을 막을 수 있는 인물로 생각하고 승인했다.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 대통령은 21세 이상의 남녀 모두에게 선거권을 주었고, 대농장과 주요 광산지대 등의 인구밀집지역에 민족혁명운동 지부를 설치했다. 또 정규군을 해체하고 반혁명세력의 준동을 막기 위해 민병대를 조직했다. 이어 외국인 소유의 3대 주석광산회사들을 국유화했고,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원주민들에게 농지를 분배했다. 그러나 국유화된 광산은 높은 생산비용과 외국인 주석업자들의 방해로 인해 적자를 보이기 시작했고, 농지개혁도 철저한 준비 없이 시작한 탓에 농업 생산성의 저하만 가져 왔을 뿐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의 뒤를 이어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가 대통령이 되었으나, 대규모의 폭력적인 반미, 반정부 시위와 국제시장에서의 주석 가격 하락으로 정국은 매우 혼란했다.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는 개헌을 통해서 1960년 다시 집권했다. 그는 국제통화기금의 계획에 따라 재정지출의 삭감, 임금동결 등을 실시했으나, 학생들의 시위와 노동자들의 파업이 계속되었다. 1964년 부통령이었던 레네 바리엔토스 오르투뇨가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로써 12년간 지속된 볼리비아 혁명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때가 바로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를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중심으로 삼기 위해 볼리비아에서 투쟁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후 볼리비아에서 군부의 쿠데타가 계속 이어졌다. 특히 1978년부터 1982년 사이에 5년간 7명의 대통령이 볼리비아를 통치하는 등 혼란한 정국이 계속되면서 경제 또한 극심한 위기를 겪었다. 1985년에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가 다시 집권했다. 그는 국영기업의 축소, 시장 개방, 재정적자의 축소, 임금과 봉급 동결 등 신경제정책을 실시했지만, 인플레이션이 12,000%가 되는 등 경제가 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그 후 평화적 선거를 통해서 민간정부가 들어섰으나 경제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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