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아메리카....

비바 칠레

구름위 2014. 9. 1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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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의 탄생

 

1970년에 아옌데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보수세력과 좌파세력이 칠레를 번갈아 통치했다. 1950년대 정권을 잡은 보수정권들은 외국자본의 도입을 통해 경제발전을 모색하는 대외의존적인 경제정책을 폈다. 1958년에는 칠레에 대한 전체 외국투자 중 미국의 투자가 점하는 비율이 80%가 넘었다. 이는 칠레경제에 대한 미국계 다국적 기업의 지배력이 더욱 강화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 과정에서 외채가 급증하면서 이의 상환을 위해 신규차관을 또다시 도입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 후 이를 개혁하려는 정책이 시행되었으나, 1960년대 중반에는 칠레의 100개 기업 중 61개가 외국인 투자 참여 업체일 정도로 칠레경제의 대외적 종속은 더욱 심화되었다. 여기에 보수정부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등 근본적인 개혁을 외면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970년 9월 대통령 선거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의 좌파정당들과 급진당의 온건중도당이 선거를 위해 결성한 선거연합체인 '인민연합'의 아옌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칠레는 빈번한 군사 쿠데타에 시달린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오랜 기간 동안 정치세력들 간의 타협과 협력의 정치문화가 존재해왔고, 국민의 민주주의 역량이 강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여러 정파의 '인민연합'이라는 선거연합 결성이 가능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아옌데 정권이 등장했다. 아옌데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사회복지와 민주주의 정책을 규정하는 '민중연합정권이 추진할 40개 정책'을 역설하며 사회 하층계급으로부터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인민연합을 통한 좌파정치세력들의 단결로 아옌데 지지층이 크게 확대되었던 반면, 중도파와 우파정치세력의 분열로 국민당과 기독민주당은 선거를 앞두고 선거연합 구축에 실패했다. 그 결과 인민연합은 선거를 통한 사회주의 정권 창출을 할 수 있었다.

 

아옌데의 실험

 

1970년, 아옌데 정권은 인민연합을 구성하고 있던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광업이나 국가기간산업, 금융업 등을 국유화했다. 특히 구리산업의 국유화 조치는 실질적으로 보상이 아닌 몰수라는 혁명적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농지개혁을 추진하여 1,300여 명의 대토지 소유자로부터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이를 분배했고, 그 결과 농민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와 함께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통한 소득 재분배 정책도 적극 시행되었다. 또한 의료시설과 교육시설의 확충, 주택개선 등이 추진되었다.

 

아옌데 정권의 개혁정책으로 연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7%였고, 물가인상률은 37%에서 18%로 떨어졌으며, 8.3%에 달했던 실업률도 4.8%로 낮아졌다. 이렇게 칠레 국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인민연합 집권 이후 처음 실시된 1971년 지방선거에서 칠레 국민은 좌파정부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아옌데의 좌절

 

그러나 아옌데의 급격한 개혁정책은 기득권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우선 미국이 소유했던 구리 광산의 국유화는 미국의 경제봉쇄를 초래했으며, 국제 구리가격이 하락하면서 초기에 호조를 보이던 경제상황이 악화되었다. 여기에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적 정책 추진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보수 야당들은, 반혁명적인 법률제정과 내각탄핵 등으로 아옌데 정부의 개혁을 좌절시키려 했다.

 

자본가 계급 역시 생산을 위한 자본을 투기 자본화하고 상품을 제한적으로 출하함으로써 경제적 혼란을 부추겼다. 한 예로 트럭운수업자들과 상점주 등을 중심으로 한 파업이 일어났다. 칠레는 산악지대가 많아서 철도가 발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트럭운수업자들의 파업은, 식량과 자원의 유통이 불가능해져서 산업시설이 마비되고 생활필수품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함을 의미했다. 여기에 중소규모 제조업자, 은행원, 의사, 엔지니어 등의 연대 파업과 버스업자들의 동조파업이 더해져 국내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구리광산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킴으로써 아옌데 정권의 정통성에 큰 손상을 입혔다. 이는 칠레경제의 핵심분야인 구리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이 아옌데 정권과 노동자들 간의 갈등을 나타냄과 동시에, 노동세력의 일부가 보수 야당의 입장에 동의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계층의 반혁명 공세에 대해, 아옌데 정권은 공급과 가격위원회를 통해 부족한 물품을 공정가격으로 확보했다. 또한 생산감시위원회를 통해 자본가들의 투기와 생산거부 활동에 대한 감시 및 통제기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공산당과 사회당 간의 분열과 의회 내 보수 야당들의 제동 등으로 인해 아옌데의 노력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군부의 이탈로 아옌데는 쿠데타를 방지할 수 있는 핵심적인 세력을 상실했다. 이러한 인민연합 내부의 분열이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정치, 경제적 압박 등과 결부되면서, 의회를 통한 아옌데의 사회주의 혁명은 좌절되었다.

 

비바 칠레!

 

1973년 3월 총선에서 보수 야당들과 자본가들은 대통령 탄핵이 가능한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이들은 이에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퇴역장교들이 아옌데 대통령에 서한을 보내, 계속 헌법을 위반한다면 군부가 독자적으로 행동하겠다고 협박했다. 마침내 1973년 6월 29일 대표적인 우파조직인 '조국과 자유'가 주도한 청년장교들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일어났다. 우발적이었던 이 쿠데타는 전체 군부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하고 3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아연데 정권은 점차 구체화되는 군부의 쿠데타 위협으로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이에 아옌데 정권은, 최후의 정치적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는 제헌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의 실시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일정을 피노체트 장군을 비롯한 주요 육군 지휘관들에게 알렸다. 이는 국민의 지지여부에 따라 아옌데 정권이 칠레 국민을 대표하고 있지 못하다는 우파의 주장이 무력화될 수 있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3월 총선으로 남은 임기 3년을 법적으로 보장받은 아옌데 대통령이 조기 하야되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는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피노체트를 비롯한 쿠데타 주모세력들은 결과가 불확실한 국민투표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애초 9월 14일로 계획했던 쿠데타 일정을 국민투표 실시 발표 직전인 9월 11일로 조정했다. 9월 11일 새벽, 해군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군이 발파라이소를 점령했다. 3군 참모총장과 경찰국장은 마르크스주의 정권에 유린당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고 선언하면서, 아옌데 대통령은 24시간 이내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9월 11일 아침 8시 직후, 쿠데타군의 항공기가 대통령 집무실이 있던 모네다(Moneda) 궁 상공을 선회하면서 아옌데 대통령에게 외국으로 망명할 것을 요구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한 대 국민 담화에서, 칠레노동자들이 사임을 요구하기 전에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칠레 만세!(¡Viva Chile!), 민중 만세!(¡Viva el Pueblo!), 노동자 만세!(¡Viva los Trabajadores!)'를 외쳤다.

 

지금 이 순간 폭격기가 머리 위를 날고 있습니다. 나는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칠 것입니다. 칠레 민중이 보여준 충성심에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나는 칠레 대통령으로서 명예로운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군부 쿠데타에 의해 사망하기 직전,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연설 중에서
 
곧이어 대통령궁을 향한 쿠데타군의 폭격이 가해졌고, 아옌데 대통령은 경호부대를 대통령궁 밖으로 보내고 40여 명의 민간인과 함께 지하 벙커에서 최후를 맞았다.

 

 
썩은 사과 골라내기1973년 9월 11일에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날, 미국 국무성은 논평을 통해 "거듭 강조하거니와 미국정부와 미국정부 내 어떤 기관도 연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최근 비밀 해제된 미중앙정보국(CIA)과 국무부, 국방부 등의 관련 극비문서에 의하면, 미국의 아옌데 정부 전복공작은 지난 1970년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닉슨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됐음을 밝히고 있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키신저의 지시를 CIA 칠레지부에 전한 비밀전문은, '아옌데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는 것은 확고한 정책'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비밀문서들에는 1973년을 전후해서 6년간 집중적으로 행해진 미 정보기관의 비밀공작의 실상이 낱낱이 적혀 있다. '뒷일을 걱정 말고 48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 쿠데타 계획을 세워라' '쿠데타 전문가를 총동원하라' '칠레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고 공작금은 1,000만 달러로 하되 필요한 경우 더 사용해도 좋다'는 등의 충격적인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처럼 미국은 자신의 국가 이익에 반하는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편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는 데 다양한 공작을 폈다. 이러한 미국의 대응은 이웃의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역시 칠레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즉, 칠레의 아옌데 정권에 대한 공작은 사과상자 속의 썩은 사과 하나 때문에 옆에 있는 다른 모든 사과도 썩게 된다는 '도미노 이론'처럼, 칠레로 인해 라틴아메리카 전체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한 미국의 '썩은 사과 골라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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