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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 드라마와 원주민 대통령

구름위 2014. 9. 1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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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부정선거

 

2000년 4월, 페루의 대통령 선거는 후지모리의 3선 연임이 주요 정치 이슈였다. 선거를 앞두고 야당후보는 9명으로 난립했다. 그중에서도 안드라데 리마 시장과 카스타녜다 후보가 강력한 야당후보로 떠올랐다. 톨레도 후보는 여론 조사 결과 겨우 6%의 지지만 받았을 뿐이었다. 이 2명의 후보는 후지모리와 정보부장이었던 몬테시노스의 무차별적인 인신공격으로 인해 지지도가 급속히 하락했다. 이와 반대로 1차 선거를 불과 3개월 앞둔 시점의 여론조사에서 6%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던 톨레도 후보의 지지는 급상승했다. 두 야당후보에 대한 지지가 톨레도에게 집중된 것이었다.

 

1차 투표 결과, 후지모리는 49.8%, 톨레도는 40.2%를 득표했다.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후지모리 후보는 결선투표를 해야만 했다. 6개의 모든 방송사와 주요 언론을 모두 장악한 후지모리는, 선거 기간 동안 원주민 출신의 톨레도 후보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또한 관권과 금권에 의한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이에 톨레도 후보는 결선투표 참가를 거부했으며, 미주기구와 유럽연합은 선거 감시단을 철수시켰다. 세계 각국도 후지모리의 재선은 정통성이 결여되어 있다며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톨레도 후보가 불참한 가운데 실시된 결선투표에서 후지모리는 74.6%의 득표를 했고, 출마를 거부한 톨레도 후보는 25.4%를 얻었다. 1차 투표에서 2.3%에 지나지 않았던 무효표가 무려 31.4%에 달했다. 이는 페루 선거법에서 투표에 불참할 경우 월 최저 생계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벌금을 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억지로 투표장에 간 국민이 투표용지에 '부정선거'라고 썼던 것이다.

 

'후지티보' 후지모리

 

 

 

몬테시노스의 처벌을 요구하는 페루 국민들.
후지모리의 오른팔이었던 정보부장 몬테시노스가 야당의원을 매수하는 장면이 찍힌 비디오가 공개되자, 후지모리 대통령은 해외 순방 중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당선된 후지모리 대통령의 취임식을 앞두고, 톨레도가 이끄는 반(反)후지모리 데모대의 시위는 리마뿐만 아니라 지방 도시에도 확산되어 페루는 그야말로 통치 불능 상태가 되었다. 후지모리는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수많은 의혹과 혼란, 그리고 취임 뒤에도 계속되었던 반대시위에 개의치 않고 야당성향의 후보를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또한 17명의 야당의원을 여당에 합류시켜 '여대야소'로 바꾸었다. 이로써 페루 정국은 서서히 안정되어갔다.

 

이렇게 정국이 안정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집권여당의 2인자였던 몬테시노스가 의회를 여대야소로 만들기 위해 야당의원에게 달러 뭉치를 건네며 여당으로 당적을 옮기라고 강요하는 장면이 2000년 9월 14일 저녁, TV에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몰래카메라에 찍힌 비디오테이프의 공개로 인해서 정국은 급변했다. 더구나 이 비디오가 몬테시노스 정보부장의 명령으로 찍힌 것이고, 다른 정치인, 언론인, 사업가들의 약점을 잡은 협박용 테이프가 2,500개나 더 있다는 사실에 페루 국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에 후지모리 대통령은 2000년 9월 자신이 출마하지 않는 새로운 선거를 조속한 시일 내에 실시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브루나이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을 마치고 일본을 방문해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다. '후지티보(fugitivo, 이는 스페인어로 '도망자'란 뜻이다)'는 바로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일국의 대통령이 국민을 속이고 국제회의에 참석한다고 출국한 뒤, 외국으로 줄행랑을 쳐 팩스로 달랑 대통령 사임서를 보내온 '후지모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도주와 몬테시노스 전 정보부장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2001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1차 투표에서 톨레도가 36.51%, 가르시아 후보가 25.78%, 플로레스 후보가 24.3%의 득표를 기록했다. 1위와 2위를 한 톨레도와 가르시아가 다시 결선투표를 치러서, 톨레도 후보가 53.08%의 득표로 가르시아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구두닦이 출신의 원주민 대통령

 

안데스 산골의 16형제 중 한 명으로 태어났던 톨레도는, 아버지를 도와 8세 때부터 구두닦이, 주유소 점원, 아이 돌보기 등을 했다. 톨레도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미국 유학 장학금의 기회를 얻어,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경제학(석사와 박사)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 연구원을 거쳐 유엔, 세계은행, 미주개발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했고, 또 하버드 대학 교환교수, 일본 와세다 대학 방문교수로 재직했으며, 페루의 대학원 등지에서 교수로 근무했다.

 

그는 1995년 대통령 선거에 처음 나와 겨우 3.2%의 표를 얻어 3위에 그쳤다. 톨레도는 20년 가까이 미국에서 생활한 탓에 스페인어가 매우 서툴렀다. 또한 5세 때 산골 안데스를 떠나 생활해서 인디오의 언어인 케추아어를 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톨레도는 이로 인해서 2000년 선거에서도 지지도가 바닥이었다. 그러던 중 계속되는 후지모리 대통령 진영의 불법, 탈법적 선거운동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커진데다, 마땅한 야당후보가 존재하지 않아서 그의 지지도는 단기간에 상승했다. 여기에 케추아어를 비롯해서 9개 국어에 능통한 벨기에 출신의 부인 엘리안 카프가 톨레도의 단점을 보완해주었다. 스탠포드 재학시절 만나 결혼한 카프는 중남미 원주민 문화를 전공해 페루의 역사와 전통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톨레도 후보는 자유시장경제와 가난한 자를 우대하는 정책을 혼합한 중도 노선으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리고 새로운 직업의 창출, 권력의 분권화와 지방정부의 활성화, 가난 극복, 의료 확대, 교육 기회의 확충, 여성의 권익 향상, 문화예술의 장려, 농업 장려, 부패척결 등 10가지 선거공약으로 원주민과 도시 빈민,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대통령에 당선된 톨레도는 1823년 독립 이래 최초 원주민 출신의 대통령이 되었다. 또한 톨레도는 미주기구 선거감시위원장이 '자유롭고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였다는 평가를 내릴 정도로 페루선거 사상 가장 공정한 선거에서 당선된 대통령이기도 했다.

 

잉카제국 전성기의 영광 재현

 

11세기경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서 발원한 잉카족은, 쿠스코를 수도로 정하고 인접 부족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5세기 전성기 시절에는 북으로 오늘날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까지, 남으로는 칠레 중부와 아르헨티나 북부까지를 포함하는 중앙집권제국을 건설했다.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는 금과 은으로 치장한 신전, 왕궁 등 웅장한 석조건물이 즐비한 풍요로운 대도시로 '지구의 배꼽'이었다. 2001년 6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최초의 원주민 출신 톨레도 대통령은, 같은 해 7월 28일 취임식을 가진 후 다음 날에 마추픽추에서 그 옛날 '잉카('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잉카제국 왕의 호칭)' 대관식처럼 상징적인 취임식을 가졌다. 그리고 잉카제국의 전성기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톨레도 대통령은 '오늘의 잔치는 내일의 부채'라고 국민에게 선포하면서, 인기 없는 긴축 재정, 공기업의 민영화, 세원의 발굴, 공공부문의 구조 조정 등의 정책을 제시했다. 또한 '가난한 자들에 뿌리를 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부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톨레도 대통령은 또한 후지모리 전임 대통령이 강력히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지양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강조하면서, 외채와 실업문제 해결, 전임정권의 부패척결,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불간섭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취임 당시 60%에 이르렀던 톨레도의 지지도는 1년 만에 20% 대로 떨어졌다. 그 이유로는 예산의 불법 전용, 친인척의 정부 요직 기용 등 톨레도 정부 자체의 문제점과, 후지모리 지지세력의 정부 개혁정책의 방해, 선거기간 동안 남발했던 포퓰리스트적인 공약 이행의 어려움, 고용창출과 경기회복의 저조 등을 들 수 있다.

 

최선 대신 차악 - 알란 가르시아

 

2006년 6월 4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중도 좌파성향의 미주인민혁명동맹(APRA) 소속의 알란 가르시아 후보가 상대후보인 민족주의 좌파 오얀타 우말라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가르시아는 1985~1990년에 페루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35세 때에 이어 정확히 21년 만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첫 집권 동안 그는 3,000%가 넘는 살인적 인플레이션에 심각한 식량난, 좌파 게릴라들의 무장활동, 만연한 부패 등의 정치, 경제적 위기와 외환위기를 초래한 '실패한 대통령'으로 통했다. 이러한 가르시아 대통령을 페루 국민이 선택한 것은 페루 국민에게 '최선 대신 차악'의 선택이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가르시아는 페루가 세계와 통합되도록 하고, 수백만 빈민들의 삶을 향상시키며, 공무원의 낭비적 임금체계를 개혁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과거 집권기간의 살인적 인플레이션 등 경제실정으로 공격받았던 가르시아 대통령 당선자는, 좌파계열이지만 지난 4년간 연평균 5.5%의 고성장을 유지해온 자유시장주의 경제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특히, 그는 페루와 미국 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파기할 것을 요구한 차베스 대통령을 강력 비난함으로써, 차베스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중남미 좌파대열'과는 일정한 선을 그었다.

 

지난 7년 동안의 경제호황에도 불구하고, 2008년에 들어 가르시아 대통령의 지지도는 26%까지 급락했다. 이에 그는 "괄목할 만한 성장의 혜택이 빈곤층에 돌아가도록 재분배를 강화할 것"이라며 "이제는 빈곤층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때가 됐다" "우리 정부의 목적은 빈곤층에 대한 지원 확대와 함께 인플레이션을 잡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과거 좌파 정치인으로 분류되기도 했던 가르시아 대통령은, 이제 자유시장 정책의 열렬한 신봉자로 변신하여 외국자본 유치에 힘쓰고 있다. 페루는 미국과 FTA를 체결한 데 이어, 중국과 멕시코와도 FTA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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