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의 심화(1989년 ~ 1990년)
'이념'이 빛바래면서 소비에트 연방은 핵분열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탈소 독립을 주장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고 있다.
소련은 본래 120여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였다. 인구의 약 절반이 러시아인이고, 거기에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을 합친 슬라브계가 약 70%이다.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은 원칙적으로 민족단위의 공화국이고, 연방구성 공화국들 안에도 20개의 민족 단위 자치공화국이 있다. 그보다 더 작은 단위로 8개의 자치주, 10개의 민족 관구가 있고, 별도 행정단위를 갖지 못한 민족도 많았다.
이 많은 민족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이념과 소련시민으로서의 평등성, 그리고 소수민족의 자치권과 그들에 대한 정치 경제적 배려였다.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에 소련은 사회주의의 실현과 더불어 민족문제는 해결됐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해결된 게 아니라 잠복하고 있었던 것임이 곧 드러났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고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봉합돼 있던 민족문제가 폭발적인 양상을 띠며 표출되기 시작했다.
1986년에 카자흐 공화국 공산당 제1서기가 러시아인으로 교체되면서 일어난 폭동은 민족문제의 해소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카자흐 청년들의 주장은 러시아인의 지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1988년 2월에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아르메니아와의 통일을 주장하면서 소요를 일으켰다. 곧 아제르바이잔인과의 충돌이 시작됐고, 숨가이트에서 다수의 아르메니아인이 습격 ·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태는 날로 확산되면서, 인근지역에까지 번져갔다. 당 지도부는 사태의 진전을 주목했으나, 이때까지도 민족문제는 부차적인 관심사였다. 당 중앙위원회에서 고르바초프는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천명했다.
1989년 인민대의원대회가 창설되고 각 공화국과 자치단체에서도 선거가 실시되면서 민족문제가 전연방 차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가장 앞서 나간 것은 서유럽과의 동류의식이 강하고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오랫동안 분리, 반목한 경험을 갖고 있는 발트 연안 3개 공화국과 몰도바, 그리고 전통적으로 독립의식이 강한 그루지야였다. 발트 3국은 2차대전 직전의 발트 3국 합병 자체를 문제 삼기 시작했고, 그루지야에서는 1921년 소비에트 정부로의 반강제 합병, 고르바초프의 반 알코올 투쟁으로 인한 포도 생산업의 파괴가 문제화됐다.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에서는 '민족 우선'을 내세우는 인민전선이 조직되고 자발적인 대중운동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규모로 발전해갔다. 1989년 7월 발트 3국은 마침내 사실상 독립을 의미하는 주권선언을 했고, 8월 23일에는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 50주년을 맞아 200만 주민이 세 공화국의 수도를 잇는 총연장 600㎞의 '인간사슬' 시위를 벌여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이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소련정부와 공산당은 민족주의 감정을 자제하라는 경고를 발하는 한편으로, 공화국들의 주권이 형식에 그친 것이었음을 인정하면서 공화국에 더 많은 주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민족강령'을 발표했다. 국방과 당 부문을 제외하고 '연방의 헌법이나 이해와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든 권한의 행사를 공화국에 위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미 완전 독립으로 방향을 굳힌 발트 3국 인민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1989년 말의 동유럽 사태는 발트 3국의 독립운동을 더욱 부추겼다. 12월에는 리투아니아 공산당마저도 소련공산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다음해 1월 고르바초프가 직접 리투아니아로 건너가 더 진전된 '새로운 연방'을 만들겠다며 설득작업을 폈으나, 이미 상황은 물 건너가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민족 간 유혈투쟁으로 수백 명이 죽었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의 독립선언을 계기로 발트 3국은 1940년 병합의 무효를 선언하고 독립의 길로 달음질쳐 갔다. 소련 중앙정부는 거의 100% 연방에 의지하고 있던 에너지 공급을 차단하며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발트 3국의 독립운동을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발트 3국은 2차대전 이전의 발트 위원회를 복원하고 사실상 소련에서 이탈해갔다.
거기에 또 한 가지 중대한 변화가 발생했다. 6월에 옐친과 급진파가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 공화국이 공화국법을 소련헌법에 우선시키겠다면서 주권선언을 하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 공화국은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의 하나이기는 했으나, 사실상 많은 기구가 연방정부와 중첩되는 허구적인 공화국이었다. 이 러시아 공화국이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모스크바에 고르바초프의 소련과 옐친의 러시아가 공존하는 이중권력 상태가 출현했다.
이어 몰도바와 우즈베크 공화국의 주권선언이 있었다. 이제까지 소련의 한 주와 같았던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이 제각기 실질적인 권력으로 부각되면서 소비에트 연방에 예리한 균열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설득과 위협을 병행하면서 연방을 유지해야 페레스트로이카가 성공하고 우리 모두가 잘살 수 있다고 호소했으나, 공화국들의 탈소 원심력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공화국들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혁신적인 신연방안을 내놓았다. 새 연방조약안은 "각 공화국은 주권국가로서 자신의 영토 내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며, 연방은 조약 가맹국이 위임하는 범위 내에서 권력을 집행한다"고 규정해, 연방보다 공화국의 권력이 우선함을 인정했다. 연방의 권한은 국방, 대외정책, 전략자원관리, 재정 · 통화정책으로 축소 조정됐다.
1990년 12월에 열린 인민대의원대회는 이 안을 승인하면서, 이와 함께 연방 존속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발트 3국과 몰도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의 6개 공화국은 즉각 신연방조약에의 불참을 선언했다.
1991년 1월, 분리독립운동이 가장 치열하던 리투아니아에서 소련군부의 강경파가 독단으로 빌뉴스 텔레비전 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던 시민 1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사전에 이를 몰랐으나, 사건발생 후 점령을 사후 승인했다. 이어 라트비아에서도 소련군과의 충돌로 시민 5명이 죽었다. 민족문제의 해결에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셈이었다.
3월 17일, 6개 공화국이 불참한 가운데 소련 존속을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투표 결과, 총투표자의 77%가 소련 존속에 찬성했으나,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를 비롯한 몇몇 대도시에서는 찬성률이 50%를 약간 웃도는 데 그쳤다.
사태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갔다. 소련이 점점 실체를 잃고 껍데기로 변해가는 가운데, 경제는 계속 악화되고 인민들의 불만은 고조돼갔다. 2월 19일 옐친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독재국가로 몰아가고 있다고 맹비난하면서, 마침내 고르바초프의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후 옐친을 지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보수파의 맞불 작전이 전개되면서, 소련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안개 정국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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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3일천하
좌익 쿠데타의 실패와 옐친의 대두(1991년)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 쿠데타 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시민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1991년 8월 19일
곧, 8인 비상사태위원회 위원의 면면이 밝혀졌다. 야나예프 부통령, 파블로프 총리, 바클라노프 국방위원회 제1부의장, 크류츠코프 KGB(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야조프 국방장관, 푸고 내무장관, 스타로두부체프 농민연맹 위원장, 티지야코프 국가기업협의회 의장. 체제유지를 적극 옹호하던 온건 보수파가 총결집돼 있었다.
이들은 하루 전인 8월 18일, 크림 반도의 별장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비상사태선언 동조냐 사임이냐의 선택을 요구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르바초프는 별장에 감금됐고, 다음 날 쿠데타가 결행됐다.
최고권력을 눈앞에 두고 있던 옐친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쿠데타가 발생한 지 몇 시간 안 돼서, 옐친은 주저 없이 러시아 공화국의 통제권을 자신이 전면 장악한다고 선언하고 불법 쿠데타에 대한 시민항쟁과 총파업을 촉구했다.
비상사태위원회는 그제서야 옐친과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들을 검거하려 했으나, 이들은 이미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으로 피신해 있었고, 의사당 주변에는 옐친 지지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오후에, 시위와 야간통행, 일부 국영신문을 제외한 모든 출판물의 발간 금지령이 내려졌다. 밤에는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 부근에서 시위대와 군대 간에 작은 충돌이 있었다.
8월 20일 오후, 주요 도시에서 총인원 80만이 참여하는 반쿠데타 집회와 시위가 전개됐다. 모스크바에서는 옐친, 레닌그라드에서는 시장 소브차크의 주도하에 각각 20만 규모의 쿠데타 규탄집회가 열렸다. 군대는 시위를 적극 봉쇄하지 않았고, 일부 병사들은 시위에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그날 밤, KGB 특수부대에 러시아 공화국 의사당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다음 날 새벽, 전차부대가 의사당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의사당 앞의 시민들은 인간사슬을 만들어 탱크에 저항했다. 시민과 군대의 충돌로 5명의 청년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이 방어태세를 굽히지 않자, 군대는 진압을 포기했다.
일단 거사하면 시민들이 묵묵히 사태를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한 쿠데타 지도부는 의외의 사태전개에 당황했다. 비상사태위원회 멤버들 사이에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이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탐지, 옐친에게 알려주었다. 옐친은 자신감을 갖고 저항을 총지휘했다. 8월 21일 오후, 비상사태위원회 멤버 7명이 모스크바 탈출을 기도하고 푸고 내무장관이 자살하면서 쿠데타는 싱겁게 막을 내렸다. 군 병력은 곧 모스크바에서 철수했고, 고르바초프는 러시아 공화국 루츠코이 부통령의 호위하에 모스크바로 무사귀환했다.
이것이 '3일천하'로 끝난 8월 19일 소련 보수 쿠데타의 전말이다.
소련에 쿠데타 가능성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말부터다. 1990년 말,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이 부여됐고, 민족분리운동이 격화되고 식량난이 발생하면서 고르바초프의 보수회귀 경향이 감지됐다. 내무부 장차관에 보수 강경파인 푸고와 그라모프가 임명됐고, 당 부서기장과 부통령에도 보수파인 이바슈코와 야나예프가 선임됐다. 이로써 고르바초프는 보수파들에게 포위됐다.
1991년에 들어서면서 경제위기가 점점 심각해졌다. 1990년에는 산업생산이 1920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1991년에는 초반부터 위기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옛 체제의 파괴가 가속화된 반면에 새 체제는 아직 만들어지지 못해, 대혼란을 빚기 시작한 것이다. 공화국 간, 지역 간, 기업 간의 협력관계가 무너지면서 원료와 자재 등의 유통 · 공급 시스템이 급속도로 파괴돼갔다. 많은 사람들이 장래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자신과 가족 · 국가의 운명에 공포와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가장 큰 불만은 예전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로 쏠렸다. 그 획일적이고 관료적인 체제가 우리 사회와 경제를 파탄 속으로 빠뜨리고 말았다는 주장은 이제 더이상 논거를 제시할 필요조차 없었다. 불만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주도세력에게도 쏟아졌다. 금방 좋아질 것처럼 말하더니, 지난 6년 동안 나아진 게 뭐냐는 얘기였다. 그 대안으로 옐친의 급진개혁, 즉 자본주의적 개혁에 대한 지지가 높아져 갔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빈부격차와 실업을 초래한다지만, 이렇게 꽉 막힌 체제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와 동경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온건개혁 주장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고, 급진파는 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도입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며 고르바초프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갔다. 3월 10일에는 옐친을 지지하는 50만 명이 혁명 이후 최대의 시위를 벌이면서 고르바초프의 사임을 요구했다. 분리독립을 추진하는 민족주의자들도 급진파와 함께 반고르바초프 전선에 가담했다.
한편, 체제수호 세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KGB와 군부, 일부 관료를 근간으로 하는 보수파들은 소련인민의 불행을 가져올 게 분명한 연방의 분열, 시장경제의 급속한 도입을 용납할 수 없다면서 고르바초프에게 더이상의 분열과 혼란을 막을 단호한 조치를 요구했다.
진퇴양난에 빠져 있던 고르바초프는 마침내 상황의 발전을 받아들이고, 4월 들어 옐친과 화해한 후 공화국들을 주체로 하는 새로운 연방을 구성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6월에 옐친이 러시아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두 사람의 협력관계는 더 다져졌다. 7월에는 연방정부와 각 공화국 간에 신연방조약에 대한 최종합의가 이루어졌다. 조약 체결일은 8월 20일로 잠정 타결됐다.
보수파는 다급해졌다. 연방권력의 대폭 공화국 이양을 규정한 신연방조약은 사실상 연방의 해체나 다름없었고, 각 공화국에 체제의 선택권까지를 위임한 조약이 체결될 경우 러시아와 각 공화국이 급속도로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체제수호 세력은 마침내 KGB를 중심으로 뭉쳐 쿠데타를 결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서방측에서까지 '정말 기이한 쿠데타'라고 부를 만큼 준비도 엉성하기 그지없었고, 상황판단도 치밀하지 못했으며, 불만으로 가득 찬 대중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즉각 제시하지 못한 채, 쿠데타는 3일도 못 버티고 무너지고 만다.
쿠데타는 옐친이라는 영웅을 탄생시켰다. 쿠데타 군의 탱크 위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그의 모습은 러시아인들의 뇌리에 그를 새로운 지도자 상으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대중들 사이에 옐친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반면에, 쿠데타 주모자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민주적인 방법을 지키려 한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급강하했다. 소련인들에게는 이제 고르바초프까지도 구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가장 참담한 파멸을 맞은 것은 공산당이었다. 74년간이나 소련을 이끄는 집단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누려온 공산당은, 쿠데타 실패 후 며칠 만에 구악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지탄받으며 무대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8월 23일 옐친은 러시아 공산당의 활동정지 명령을 내렸고, 24일 고르바초프는 소련공산당 서기장직을 사임하고 당 중앙위원회에 자진 해산을 요청했다. 이에 소련 공산당은 해산했고, 당의 자산은 국가에 몰수됐으며, 저항하는 당원들은 체포됐다.
쿠데타의 결행과 실패는 소련정국을 덮고 있던 안개를 깨끗이 걷어내고 옐친이 나아갈 길을 닦아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의 사실상 해체와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시간문제였다.
9월 6일, 전 세계에 생중계된 외국 언론사와의 합동 인터뷰에서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 땅에서 생겨난 공산주의 모델은 실패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옐친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 땅에서 그런 실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 국민들에게 큰 비극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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