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몰락(1989년 ~ 1990년)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
동유럽 국가들은 종교와 역사와 문화에서 많건 적건 서유럽 세계와 공통된 기반을 갖고 있었고,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도 짧았다. 사회주의 체제 성립과정에서도 소련의 지원을 많이 받았고, 건설과정에서도 소련의 모델과 경험이 거의 그대로 이식되어, 대부분의 국가에 관료주의가 팽배한 스탈린 편향의 왜곡된 사회주의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지리적으로도 서유럽과 접해 있어 자본주의의 현란함에 현혹될 기회가 많은 반면에, 사회주의는 아직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다. 요컨대, 동유럽 사회주의는 소련 사회주의보다도 훨씬 기반이 취약했다.
일단 개혁의 발동이 걸리자 동유럽 국가들은 금세 소련을 앞질러 나갔다. 나라마다 진도는 달랐으나, 시장경제와 사유화는 곧 일반적인 추세가 됐다. 정치적으로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부정하는 단체와 주장들이 속속 출현했다.
'새로운 사고'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선언하면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한 이후,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 대한 불간섭 정책을 거듭 천명해왔다. 동유럽 전체가 들썩거리기 시작한 즈음인 1989년 8월 1일, 고르바초프는 최고회의 연설에서 자신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나의 완벽한 사회주의 모델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 한 국가의 장래와 그 체제는 그 나라 국민들만이 정할 수 있다. 어느 나라고 타국의 국내상황에 간섭하거나 압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
이미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요소를 대폭 도입하고 있던 폴란드에서는 9월 12일 연대노조를 근간으로 하는 비공산계열 연립정부가 구성되어 자본주의화에 박차를 가했다. 헝가리에서도 '민주광장'이 정당으로 발전하여, 이미 탈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선언한 헝가리 사회당의 개혁을 계속 압박했다.
동독에서는 사태가 극적으로 발전했다. 같은 민족인 서독이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자본주의를 고도로 발전시키고 있던 것이 동독인들을 크게 자극했다. 동독 역시 동유럽의 선두주자로 사회주의 체제를 착실하게 발전시켜가고 있었으나, 관료주의에 절망한 동독인들에게는 서독의 좋은 점만 눈에 들어왔다. 8월 말부터 서독을 동경한 동독시민들의 집단탈출이 시작됐고, 10월에는 각 도시에서 민주화와 여행의 자유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됐다. 11월 9일, 위기에 처한 동독정부가 여행의 자유화를 발표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2월에는 집권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부가 전원 퇴진하고 개혁사회주의자들이 새 지도부를 구성하면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갔다.
1968년에 자유화 운동을 겪은 바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개혁요구 시위가 줄을 잇는 가운데 시민광장의 세력이 급속히 팽창했고, 급기야 공산당 정부가 붕괴되고 개혁사회주의자들과 여러 정파의 대표로 구성된 '민족화해정부'가 구성됐다. 불가리아에서도 권력남용과 부패로 지탄을 받던 공산당 지도부가 퇴진하고 개혁파로 전면 교체됐다.
1989년 동유럽 변혁의 대미는 루마니아가 장식했다. 마지막까지 스탈린적 통치방식을 고수하며 개혁을 차단해온 차우세스쿠 정권이 대중봉기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12월 25일 차우세스쿠는 전격 처형됐고, 구국전선이 새 정부를 구성했다.
이후 동유럽은 '민주주의의 확대'와 '민주적 사회주의'의 차원을 뛰어넘어 시장경제의 전면 도입, 사회주의의 폐기 방향으로 달음질쳐갔다. 동독은 1990년 서독에 흡수 통합됐고, 다민족 국가였던 유고슬라비아에서는 피 튀기는 내전이 시작됐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제의 대혼란과 정정의 불안이 계속되면서 인민들은 미증유의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편, '새로운 사고'에 따른 소련의 대서방 평화외교정책은 2차대전 이후 팽팽한 균형을 유지해온 양극체제의 해체를 가져왔다. 인류파멸의 위기에서 계급이나 국가의 이익보다 '전 인류적 가치'가 우선한다는 판단하에 자본주의권과의 화해 협력을 추진해온 고르바초프의 평화외교는, 미 · 소간의 군축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온 세계에 평화와 화해 무드를 조성하는 등 많은 성과를 낳았으나, 한편으로 소련의 자진 '무장해제'는 상호 견제하던 양극체제를 깨뜨리고 세계를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로 바꿔놓았다.
미국은 이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고 나섰다. 미국에 저항하는 나라들은 가차없이 응징됐다. 리비아, 그레나다, 파나마가 미국의 위력시위 무대가 됐고, 니카라과는 정보전의 현장이 됐다. 1991년 1월의 '걸프 전쟁'은 그 극치를 보여주었다. 아랍 민족주의를 내걸고 미국에 맞선 이라크의 후세인은 세계평화를 어지럽히는 현대판 마녀가 됐고, 미국은 11개국의 다국적 '십자군'을 조직해 수백만의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전자오락 게임'을 벌였다. 견제력을 잃어버린 소련은 팔짱 끼고 사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루기 위한 미국의 시도는 경제분야에서도 가속화됐다. 1986년부터 시작된 '우루과이 라운드'는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조 하에 협상이 진전됐다. 작은 나라들의 생명줄은 가볍게 무시됐다. 단극화한 세계에서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이용하여 세계를 자신의 입맛대로 요리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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