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 그 후(1991년 ~ 1994년)
1991년 12월 8일, 슬라브계 3공화국의 지도자가 벨로루시의 민스크에 모여 독립국가공동체 협정에 조인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소멸을 공식선언함으로써 소련은 역사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9월 2일에 열린 연방 인민대의원대회는 고르바초프와 10개 공화국 지도자들이 제안한 '과도 중앙기구'를 승인했다. 그에 따라 연방 대통령과 공화국 지도자들로 구성되는 '국가평의회'와 경제문제를 다룰 '공화국간 경제위원회'가 구성됐다. 고르바초프는 국가평의회를 통해, 발트 3국을 제외한 나머지 공화국의 연합으로 중앙정부를 구성하는 '주권국가 연합' 조약의 체결을 추진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반대로 조약은 타결되지 못하고 3개월이 흘러갔다.
12월 1일의 우크라이나 국민투표에서 독립 주장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강경 독립파인 크라프추크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러시아 공화국의 옐친은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의 지도자와 의견을 교환한 뒤, 12월 7일 마침내 고르바초프의 신연방조약안을 거부하고 공화국들이 독립국가 형태로 느슨하게 결합하는 '공동체'의 결성을 주창했다.
12월 8일, 슬라브계 세 공화국의 지도자가 벨로루시의 민스크에 모여 독립국가공동체(CIS) 협정에 조인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소멸을 선언했다. 고르바초프가 위헌이라며 잠시 저항했으나, 그는 이제 아무런 힘이 없었다. 중앙아시아 5개국과 자카프카스의 두 나라, 몰도바가 곧 공동체 가입 의사를 밝혀왔고, 12월 21일 카자흐의 알마아타에서 11개국 지도자가 모여 독립국가공동체의 발족을 선언했다.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크렘린을 떠났다. 크렘린의 깃대에서 소련의 적기가 내려지고, 백 · 청 · 적의 러시아 3색기가 내걸렸다.
그와 더불어 소비에트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은 모두 독립국가가 됐고, 그중 11개국으로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 독립국가공동체(CIS)가 생겨났다. 이로써 소련은 10월혁명 후 74년 만에 붕괴했고, 옛 소련 사람들은 국가의 보호막에서 나와 '생존경쟁'의 험난한 길로 들어섰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와 옛 소련 구성국들의 고난에 찬 새 역사가 시작됐다. 인류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뒤 사회주의 건설의 고동소리가 진동했던 러시아 땅에서, 이제 무너진 사회주의 체제 위에 자본주의 체제를 새롭게 구축하는 초유의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무자비한 해체와 파괴를 동반한 '체제의 전환'은 극심한 혼란과 부작용을 일으키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 인민의 소유였던 국가의 부가 약삭빠른 개인들에게 넘어가면서 벼락부자들이 출현하고 빈부격차는 극심해지고 있다. 중앙계획경제가 자유시장경제로 전환되면서 큰 혼란을 빚다가 10년쯤 지나고 나서야 겨우 시장이 조금씩 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고 있다. 사회주의 정치체제가 갑작스럽게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긴 했으나, 일찍이 자유민주주의를 경험한 적이 없는 러시아인들 사이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정착하고 사람들이 그에 적응하기까지는 아마도 상당한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풍비박산 난 복지제도하에서 대다수 러시아 민중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 많은 러시아인이 뒤늦게 땅을 쳤지만, 이미 둑은 터지고 물은 사방으로 흩어진 뒤였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우며 맨땅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후의 러시아 역사를 훑어보는 것은 사실 씁쓸한 일이다. 한때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미국과 어깨를 견주던 옛 소련의 위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2000년 이후 '위대한 러시아'의 재건을 추구하는 푸틴 체제하에서 어느 정도 나라의 틀을 잡아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예전의 소련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경제 규모로만 보아도 미국 다음으로 세계 제2위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던 경제가 이제야 고작 세계 10위권을 오르내리는 수준이다. 그래도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한 눈 질끈 감고 그동안의 역사를 일별해보자.
소련 붕괴 후 옛 소련의 지위는 독립국가공동체의 '맹주'인 러시아가 그대로 계승했다. 소련의 대외채무도 러시아에 이전됐고, UN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을 비롯한 국제지위도 러시아가 모두 이어받았다. 공동체 내의 국가들은 필요할 때만 협조할 뿐, 자기 일은 이제 자기가 알아서 처리해야 했다. 오히려 국가 간의 분업과 협력체제가 붕괴되어 원자재와 전력 등의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각기 제 살 길을 찾느라 정책상의 충돌이 빈번해지면서 갈등만 더욱 깊어갔다.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경제였다. 당국은 경제를 빠른 시일 내에 재편, 안정시키는 일에 온힘을 기울였다. 1992년 초두부터 옐친은 자유시장 경제를 세우기 위한 급진적인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상품가격의 자유화, 국가 보조금의 철폐, 국영기업의 사유화, 군수산업의 민수화 정책이 시행됐다.
서방 열강은 개방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창출을 전제로 IMF를 통한 대폭 지원을 약속했다. IMF는 2년간 240억 달러의 자금지원을 무기로 러시아 경제를 서방 열강의 구미에 맞도록 요리하고자 했다. 자유시장경제의 창출을 돕되 러시아 경제를 서방에 종속적인 체제로 만드는 것이 IMF의 의도였다.
1992년 말에는 국영 기업을 사유화하기 위한 조처로 국민 1인당 한 장씩의 '바우처(사유화 증권)'가 배당됐다. 자기가 원하는 회사의 주식을 구입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기 급한 많은 사람들이 약간의 웃돈을 얹어주는 투기업자들에게 증권을 팔아넘겼다. 그와 함께 기업의 관리자들에게는 자사 주식의 일정량을 구입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결국 주식은 소수 특권층과 사채업자들에게 집중됐다. 약빠른 사람들은 또한 일찍부터 개인경영이 허용된 상업이나 무역으로 눈을 돌려 많은 부를 쌓아갔다.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러시아에 신흥재벌(올리가르히)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부는 하루가 다르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들이 옐친의 급진적 자본주의화의 강력한 지지자가 됐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체제 전환'은 정책당국의 예상보다 훨씬 큰 혼란을 초래했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기본적으로 독점상태였던 기업들이 사유화되고 가격결정이 시장에 맡겨지면서 물가가 급등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들은 다투어 문을 닫았다. 1992년~1993년의 2년 동안에 물가가 166배로 치솟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기록됐고, 경제체제가 마비되면서 생산이 격감하여 1990년을 100으로 할 때 1993년의 국내총생산은 64로 떨어졌다. 공업생산은 절반 수준으로 격감했다. 실업자가 2,000만을 헤아리고, 국민의 90% 이상이 절대 빈곤선 이하로 전락했다.
민족분열도 더욱 심화되어, 공화국 간 · 민족 간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타지크, 러시아 내의 체첸 잉구슈와 크림 타타르인 거주지역 등은 전쟁터로 변했다. 특히 러시아 안의 체첸 공화국에서는 10년 이상 총성이 멎을 날이 없었다. 연대와 협력의 정신이 깨어진 곳에 갈등과 분열이 깊숙이 자리 잡은 탓이다.
러시아인들의 높은 자존심은 갈가리 찢겨졌다. 국제적으로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여기저기에 손을 내밀고, 거리에는 거지가 득실거리며, 젊은 여자들은 달러에 팔려 외국인들에게 추파를 던진다.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양심에 따라 떳떳이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치 보며 약삭빠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옐친도 싫고 신흥 졸부와 관료들의 작태도 역겹지만, 그렇다고 다른 특별한 대안도 없었다.
대중들이 자본주의화의 쓴맛을 겪고 있는 사이에 정치 지도자들 간의 갈등도 점점 증폭돼갔다. 급진개혁을 추구하는 정부로부터, 중추산업에 국가의 보조를 계속 유지하고 경제체제 전반에서 국가가 좀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집단이 갈라져 나왔다. 루츠코이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혁파가 형성된 것이다. 공산당도 '현실을 고려한 개혁'을 표방하며 재건됐다. 민족주의자들도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의회(인민대의원대회) 내에서 절대 다수를 형성한 반정부 세력은 '구국전선'을 중심으로 반옐친 연합전선을 결성했다. 옐친의 계획은 번번이 의회에서 거부됐다.
지지도가 점점 떨어지고 반대파의 결속이 강화돼가는 가운데, 옐친은 대국민 직접 호소에 나섰다. 1994년 4월의 국민투표에서 옐친은 유권자 62%투표에 58%의 지지로 가까스로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조기 대선과 총선 제안은 부결됐다. 옐친은 임의로 제헌의회를 구성해, 현재 국가최고기관으로 규정된 인민대의원대회를 폐지하고 연방의회와 국가의회의 상하 양원제를 도입하며 대통령에게 의회해산권을 인정하는 등 대통령을 헌법상 최고권력 기구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새 헌법안을 제정했다. 이에 의회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옐친은 초헌법적인 비상조치를 취했다. 9일~21일, 의회를 해산하고 12월에 선거를 실시해 양원제 새 의회를 구성한다는 포고령이 떨어졌다. 의원들은 탈법적인 조치에 항의하며 루츠코이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의사당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군대가 의회를 포위한 가운데, 10월 3일 반옐친 시위가 벌어져 62명이 사망했다. 옐친은 모스크바에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10월 4일에는 군대가 의회를 유혈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50여 명이 죽고, 반정부 지도자 루츠코이와 하스불라토프는 체포됐다. 1991년 8월 진압군의 탱크 위에 서서 쿠데타를 저지한 옐친이 2년 후 이제 탱크를 앞세우고 반대자들을 유혈 진압한 것이다.
러시아 내의 많은 지방의회가 의회 유혈점령에 항의했다. 그러나 반대자들이 더 이상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폭력과 위협이 기승을 부리는 속에 사태는 진정돼갔다.
1993년 12월, 주요 반정부 지도자들의 발이 묶인 가운데 새 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옐친과 급진개혁파는 새 선거에서도 안정 다수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하원 선거의 정당별 득표율은 러시아 국민들의 혼돈된 상황을 잘 보여주었다. 옐친의 급진개혁을 전폭 지지하는 '러시아의 선택'은 15%를 득표하는 데 그쳤고, 다소 온건한 개혁을 표방하는 3개 정파가 20%를 약간 밑도는 득표율을 기록했다. 따라서 옐친 정부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정파의 득표율은 넓게 잡아도 35%가 채 안 되었다.
러시아인의 정치 지향은 사실, 여러 여론조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 바 있다. 1991년 8월 이전부터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일관되게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것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관료적이고 획일적이며 중앙집중적인 요소들을 제거한 '민주적 사회주의'였다. '민주적 사회주의'의 지지율은 적게는 25%에서 많을 때는 45%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전의 국가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계층도 줄곧 10% 내외를 유지하여, 전 국민의 절반 정도가 사회주의 체제를 지지했다. 반면에, 옐친이 추구하는 제한 없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지자는 20~3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북유럽과 같은 조절된 형태의 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조화롭게 결합된 사회를 지향한다.
1995년을 전후하여, 자본주의로 전환된 경제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성장 추세로 돌아서긴 했으나 그 기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97년 말의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러시아의 취약한 경제에 전이되면서, 1998년 러시아는 모라토리움(채무 불이행)을 선언한다. 경제 위기에 따른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정치적 위기까지 맞게 된 옐친은 1999년 말 임기를 조금 남겨둔 상태에서 전 KGB 출신의 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고 사임한다. 체첸 반란을 강경진압하며 대중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긴 푸틴은 200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공산당과 자유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후 지금까지의 러시아는 푸틴의 러시아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푸틴은 '위대한 러시아'의 재건을 내걸고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러시아를 이끌어가고 있다. 푸틴이 생각하는 '위대한 러시아'의 위상과 성격은 옛 소련과 표트르 치세 러시아의 혼합이다. 푸틴 체제하에서 공산당과 자유주의, 민족주의 정당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져 왔다. 푸틴은 국가주의와 중도 성향의 정당들을 두루 합친 '통합 러시아당'을 만들어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국민경제를 질식시키고 있는 신흥재벌들을 견제하면서 석유와 가스 등의 에너지 산업을 재국유화하는 정책을 폈다.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자원 부국인 러시아의 부는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세계 최대의 에너지 기업인 가즈프롬이 러시아 국부의 3분의 1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푸틴의 러시아는 풍부한 가스와 석유 자원을 무기 삼아 옛 소련의 다른 공화국들이 품 밖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한편, 유럽 여러 나라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푸틴은 2008년 자신의 후계자인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총리직을 맡아 여전히 실권을 휘두르고 있다.
그러나 경제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고는 해도, 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니 러시아 민중들의 삶은 말이 아니다. 거기에다 수도인 모스크바에 국부의 4분의 3이 집중되면서 국민의 다수가 살고 있는 농촌 지역과 소도시 지역 주민들의 삶은 더 팍팍하다. 삶이 팍팍하니 출산율도 낮고 해외로 뜨는 인구도 많아, 러시아 인구는 매년 약 50만 명 정도씩 줄어들고 있다.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떠나는 바람에 거의 빈 땅이 되다시피 한 극동 지방과 시베리아 지방에는 중국인들이 떼로 몰려와 둥지를 틀고 있다. 이미 러시아 인보다 중국인의 수가 더 많은 곳도 많다. 부자들 중에도 유럽식 삶을 찾아 런던이나 베를린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러시아의 경제가 조금씩 살아나면서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도 조금씩 상승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자본주의화된 경제체제에 편입된 4분의 1 인구의 이야기일 뿐, 나머지 4분의 3의 국민들에게 지금의 러시아는 사실상 국가라고 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아무리 가스와 석유가 많이 난다 해도 난방용 연료조차 대줄 수 없는 국가가 온전한 우리나라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여 러시아의 미래에는 다시 의문부호가 찍힌다. 러시아는 어디로 갈까? 직접, 간접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두 체제를 두루 겪어본 러시아인들의 미래의 선택은 어디일까? 우선 당장은 주린 배를 채우는 게 급하겠지만, 자유로운 공동체 안에서 평화롭게 사는 삶은 현 체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수 러시아인들이 갈수록 더 분명하게 느껴가고 있는 것 같다.
러시아 외의 옛 소련 공화국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토록 바라던 탈소 독립과 자본주의화가 가져다준 것은 경제의 파괴와 빈부격차, 대량실업, 구겨진 자존심뿐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복잡 다양한 움직임들이 태동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다시 옛날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관료주의가 판을 치던 왜곡된 사회주의 체제가 또 다시 추구할 이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 앞에는 다시 지금까지 아무도 겪지 않은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체제 전환을 하는 가운데서 발생한 숱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그 속에서 살고 싶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들 앞에 주어진 과제다.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자신의 역사와 경험을 무시하고 환상을 추구하는 국민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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