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진출

구름위 2014. 11. 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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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진출

 

러시아제국이 중앙아시아 스텝으로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 황제 이반 4세 시대로 카잔제국과 아스트라칸국을 차례로 멸망시킨 이후였다. 1554년 이반은 시베리아의 원주민들로부터 항복을 받고, 우랄 산맥을 넘어 펼쳐진 방대한 미개척지로의 진출을 시도하여 그로부터 20년 후에야 비로서 우랄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이들은 시베리아에 진입하여 타타르칸 큐축(Tatar Khan Kuchuk)의 수도인 시비르를 점령함으로 러시아인들의 왕래를 공식화하였다. 1579년부터 1584년 사이의 대규모 침략을 통해 시비르를 점령함으로써 러시아인들의 중앙아시아 지역 이민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처음에 시베리아로 갔다가 점차 몽골족 거주 지역으로 유입되어 6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하였다.

1604년에 오브강 연안에 톰스크(Tomsk), 1632년에 야쿠츠크(Yakutsk), 1638년에 오호츠크(Okhotsk), 1648년에 캄챠카(Kamchatka)가 차례로 건설되었고, 1651년에는 이민온 러시아인들이 몽골인의 영토 바이칼호 근처에 도시 이르쿠츠크(Irkutsk)를 세웠고 1666년에는 만주족의 영토인 아무르강 유역에 알바진(Albazin)을 건설하였다.

러시아인들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로 팽창과 진출을 계속하였고, 이들의 시베리아 진출 과정은 앵글로색슨족의 아메리카 대륙 서부 개척과는 전혀 그 양상이 달랐다. 앵글로 색슨족의 개척이 그 곳의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의 씨를 말렸던 것과는 달리,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러시아인과 혼합되었고 다른 민족간의 결혼도 보통 이루어졌으며, 사회적인 편견도 오직 제한된 범위내에서만 존재하였다. 즉, 러시아인들은 원주민을 차별하지 않았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관리들의 원주민 정책은 러시아인과 전혀 차등없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인들의 시베리아 진출은 군사력 혹은 정치적 힘에 의한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고 단순히 생업을 위해 이민가는 형태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러시아인들의 생업을 위한 이민이 증가하면서,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앙 정부가 시베리아 자원개발계획과 함께 시베리아 통치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인들이 오브강에 도달할 무렵, 누르하치가 이끄는 여진부족 연합체인 만주제국, 즉 청나라(1639년 건설)의 세력이 중원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내몽골과 접촉하면서 그들을 흡수하는 계속적인 정책을 폈고, 특별히 중앙아시아 문제를 전담하기 위한 정부 기구를 두었다. 동부 및 남부의 몽골족에 대한 만주족의 지배권이 확립된 시기는 중원 통치를 확립시킨 때인 1644년이었다. 만주제국의 강희황제는 현재의 울란바토르(Ulan-bator)인 우르가(Urga)의 티베트 종교지도자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함으로써 기선을 잡아 그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몽골족은 1691년 공식적으로 만주제국에게 항복함으로 흡수되었고 만주 조정은 몽골족을 계속 통치하기 위하여 새로운 종교 정책을 구상하여 랏사에서 오는 몽골인들에게 적용하였다.

이렇듯 러시아제국과 만주제국이 동시에 스텝으로 확장하였기 때문에 두 세력사이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이들의 갈등은 16세기 후반 표면화되었는데, 양측의 문제를 협상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1689년 여름에 네르친스크(Nerchinsk)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중앙 및 북부스텝에 대한 양측의 영향력 행사 범위의 규정을 담고 있다. 이미 공식적으로 항복한 몽골족은 네르친스크 조약에 의해 대부분 만주의 통치하에 들게 되었고, 몽골에 대한 만주의 통치는 1907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 알래스카

서유럽 제국이 해양탐험에 열중하고 있던 15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엽까지 러시아는 유럽에는 낯선 나라였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가 강력하게 서구화정책을 추진한 결과 17세기 말에 이르면 러시아는 강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표트르 대제는 동쪽으로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획득하고, 시베리아를 거치지 않고 중국으로 통할 수 있는 북동항로 개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만약 아메리카가 시베리아와 연결되어 있다면 러시아로서는 쉽게 아메리카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고, 통로가 있다면 시베리아를 경유하지 않고 해로로 직접 아시아로 항해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베링의 1차탐험 ; 아시아의 동쪽 끝을 확인하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소속되어 주로 동인도 무역항해에 종사했던 베링(1681-1741)은 1703년 러시아의 발트해 함대로 이적하여 1715년에는 소령, 1720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하였으나 1724년 2월 대령으로 퇴역하였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옛날부터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는 아나디르(Anadyr) 수로가 있는지를 확인해 오라'고 베링에게 명령하고 베링은 대령으로 러시아해군에 다시 복무하게 된다.

1725년 1월 페트로그라드를 출발한 베링 탐사대는 러시아대륙을 육로를 통해 이동하고, 오호츠크해를 가로질러 1728년 3월에 캄차카 반도 동해안에 도착하였다. 1728년 4월 초부터 탐험에 사용할 배를 만들기 시작한 베링은 두 달 뒤인 6월 9일에 길이 18.3미터에 돛대를 2대 장비한 두대박이 돛배 가브리엘 호를 완성하였다.

베링은 아시아 대륙과 알래스카 대륙 사이의 해협을 통과하여 북극해로 진출하였지만, 짙은 안개 탓으로 알래스카 대륙을 육안으로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베링은 이 지점에서 아시아 대륙이 끝났다고 결론짓고 뱃머리를 돌려 1730년 3월에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하였고, 베링은 캡틴-커맨더(Captain-Commander, 준장에 상응)로 진급하였다. 이후 베링이 항해한 해역은 베링해로, 아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해협은 베링 해협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베링의 2차탐험 ; 베링 섬에서의 최후

베링의 2차탐험은 안나 여제(1730~40)가 통치하던 1733년 3월에 페트로그라드를 출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737년 오오츠크에 도달한 베링 일행은 탐험에 사용할 배를 만들기 시작하여 1740년 6월에 세인트 피터 호와 세인트 폴 호 등 2척을 완성하였다.
베링 탐사대는 1741년 6월 4일 탐사를 시작하였으나, 6월 12일에 악천후를 만나 두 배가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치리코프가 조선한 세인트 폴 호는 항해를 계속하여 알류샨 열도의 몇 개 섬을 발견하였으나, 베링이 조선한 세인트 피터 호는 악천후로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8월 20일에 알래스카만으로 진입하였다. 안전한 곳으로 피항하는 데 급급했던 베링 탐사대는 알래스카 남서해안과 알래스카 반도·알류샨 열도 등을 정찰하는 데 그쳤다.
바다를 5개월 가량 떠돌다 육지가 발견되었으나 온통 바위뿐인 해안에 닻을 던지는 순간 배가 좌초되고 만다. 운이 좋았는지 배는 바닷가 모래 위에 얹혔지만 11월 말에 세인트 피터 호는 폭풍우에 부서지고 말았다.

베링이 이 곳이 육지인지 섬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정찰대원 3명을 파견한 사이 탐사대원들은 북극권의 살인적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한 명씩 죽어갔고, 베링도 정찰대원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1741년 12월 8일 사망하였다. 12월 26일 정찰대원들이 돌아와 이 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탐사대는 그를 기려 섬을 베링 섬이라고 이름지었다.
겨울을 이기고 살아남은 탐사대원은 부서진 뱃조각을 주워 모아 배를 만들고, 이듬해인 1742년 8월 중순 베링 섬을 출발하여 8월 27일에 캄차카로 귀환하였다. 치리코프가 조선했던 세인트 폴호는 알래스카를 발견하고, 1741년 10월에 이미 귀환해 있었다. 알래스카는 이후 모피산지로 개발되었으나, 재정이 악화되자 러시아 황실은 1867년에 720만 달러에 미국에 팔아 넘겼다.

http://www.goodnews.co.kr/cksik/mtext/m6/1.htm http://www.panocean.co.kr/korean/sabo/2001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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