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개혁과 개방의 진통

구름위 2014. 9. 16.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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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 혁 갈등 시작(1987년)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한 소련공산당 비상회의
1988년 7월 고르바초프는 각 공화국 대표 5,000명 앞에서 페레스트로이카의 절대 필요성을 역설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궤도에 오르면서 개혁의 목표와 방향에 대한 열띤 논쟁이 시작됐다. 소련의 지도층은 크게 세 파로 나뉘어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하나는 고르바초프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주도파이고, 하나는 리가초프로 대변되는 정통보수파이며, 다른 하나는 옐친 등의 급진개혁파이다.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에 착수할 당시, 세 파는 모두 같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소련에 체제위기가 왔고, 이 위기는 폭넓은 개혁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으며, 개혁의 방향은 행정 · 명령형 지도에 물든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진전시킴으로써 대중들의 창발성을 높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슬로건, '더 많은 공개,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사회주의'에 이들은 모두 공감했다.

 

세 지도자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도 사실 같은 개혁파라는 공통점으로 맺어진 것이었다. 체르넨코 사후 후계자를 선출할 당시 당서기였던 리가초프는 젊은 정치국원 고르바초프의 집권을 도왔고, 집권 후 고르바초프는 리가초프를 정치국원으로 끌어올려 제2서기직을 맡겼다. 개혁 프로그램 작성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긴밀하게 협력했다. 옐친은 개혁 착수 후 리가초프의 천거로 고르바초프가 지도부에 발탁한 인물이었다.

 

1987년 후반까지 페레스트로이카는 세계인의 관심하에 온 국민의 호응을 받으며 순조롭게 진행됐고, 세 사람 사이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987년 10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옐친이 개혁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비판하면서 바야흐로 보 · 혁 논쟁의 막이 올랐다. 옐친은 특히 리가초프를 지목하여 그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소극적이며 당 서기국을 비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때까지 옐친은 지지자가 별로 없는 독불장군이었다. 자유주의자와 좌익 사회주의자들이 몇몇 비공식단체를 만들어 급진적인 주장을 펴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은 그 힘이 미약했다. 11월 11일, 옐친은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에서 해임됐고, 다음 해 초에는 정치국 후보위원직에서도 물러났다. 해외보도를 통해서야 옐친의 해임 소식을 접한 급진적인 몇몇 단체는 소련 대중매체의 침묵을 문제 삼으며 옐친 해임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다.

 

정통보수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페레스트로이카의 과도한 진전에 우려를 갖기 시작했다. 그 후 1988년 3월, 스탈린의 공적과 사회주의의 전통을 옹호하고 개혁의 과도한 진전을 공격하는 안드레예바의 논문 〈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가 《소비에츠카야 러시아》 지에 게재되면서 정통보수파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보수파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개혁이 도중 하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고르바초프는 《프라브다》 편집부에 반박 논문을 게재하도록 요청했다. 《프라브다》 편집부에서 쓴 〈페레스트로이카의 원칙은 사고와 행동의 혁명성이다〉라는 논문은 '원칙을 방기하는 것'이라거나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주문을 욈으로써 페레스트로이카에 제동을 걸려는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벌어진 논쟁에서 개혁주도파가 승리하고 정통보수파는 후퇴했다.

 

광범한 정치개혁을 결의한 1988년 6월 제19차 당협의회를 기점으로 보 · 혁 논쟁의 2단계가 시작된다. 당협의회에서 옐친은 개혁촉진을 요구하고 보수파 비판을 선도하여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보수파도 이제 페레스트로이카의 변질을 문제 삼으며 대반격을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양날개의 균형을 잡으며 안정 속의 개혁을 지속하고자 애썼다.

 

개혁파 · 보수파 · 급진개혁파의 구도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이 무렵이다. 개혁파와 보수파는 이제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지난 70년간의 사회주의 건설의 공과 과,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 시장요소의 도입 폭과 속도, '새로운 사고'에 입각한 외교, 민족분리운동, 페레스트로이카에서의 당의 주도성, 페레스트로이카 부진의 원인 등, 모든 면에서 개혁파와 보수파는 평가와 견해를 달리하며 충돌했다.

 

급진개혁파는 페레스트로이카, 즉 개혁과 재편의 차원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곧 사멸하지 않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자체 법칙에 따라 병행 발전해갈 거라는 개혁파의 견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효율적인 관리 · 통제방식은 주식회사제이며 자본주의적 시장요소를 대폭 도입하여 상품 화폐 관계를 매개로 시민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다당제를 수용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완전한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도 일각에서 제기됐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속을 강조하면서, 당내 보수파의 입지는 약화됐다. 1988년 9월의 정치국 인사에서 보수파인 그로미코가 은퇴하고 리가초프가 이데올로기 담당에서 물러나 농업 담당으로 좌천됐다.

 

1989년 3월의 인민대의원 선거에서 옐친 등 급진개혁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압승을 거두고 정계에 복귀했다. 반면에 몇몇 보수파 지도자를 비롯한 고위 당관료들이 대거 낙선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별효과를 내지 못하고 경제가 활력을 되찾지 못하는 가운데, 인민대중이 개혁주도파와 보수파에 등을 돌리고 급진개혁파를 정치적 대안의 하나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7월에는 광부들의 대파업이 일어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노동조건의 개선, 노동자 민주주의의 확대, 광산의 노동자 통제, 생산물의 일부 처분권 등을 요구한 정치성 파업은 개혁주도파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결과적으로 급진파의 입지를 크게 강화해주었다.

정치경제의 위기에 더하여 이념적 혼란이 극심해진 상황에서 고르바초프는 당 개혁을 통해 개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1991년으로 예정된 제28차 당대회를 1990년 7월에 앞당겨 열었다. 보수파는 그 직전인 6월에 이제까지 소련공산당 내에 없던 러시아 공산당을 만들어 내부결속을 다졌고, 급진파는 주권선언까지 한 러시아 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제28차 당대회의 다수파는 여전히 정통보수파와 중간파였다. 고르바초프는 당 개혁을 유보하고 서기장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중간파와 짜고 리가초프 제2서기를 축출하는 전술을 택했다. 리가초프와 몇몇 보수파 지도자가 당 지도부에서 밀려났고, 옐친 등의 급진파 지도자는 개혁의 부진에 불만을 품고 탈당했다. 그로 인해 고르바초프와 개혁주도파의 당내 입지가 크게 강화됐다. 고르바초프는 나아가 당 권력의 많은 부분을 정부로 이양시켜 당을 약화시켰다.

 

제28차 당대회를 계기로 보 · 혁 대립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화국을 장악한 급진파 지도자들은 공산당을 이탈하여 당외 투쟁을 개시했고, 보수파는 '소유즈 파'와 러시아 공산당을 중심으로 뭉쳐 당내에서 개혁파를 계속 압박했다. 격화된 민족분리 운동도 고르바초프의 발목을 계속 잡아챘다. 고르바초프는 당 안팎의 반대파와 분리독립으로 방향을 굳힌 공화국들로부터 세찬 공격을 받으며,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를 오가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시작했다.

 

이후 보 · 혁 대립은 사실상 이념투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정통보수파와 개혁주도파는 경제와 사회 전반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재건하려는 목적은 같았으나, 정통보수파가 더 이상의 개혁진행, 특히 시장요소의 급속한 도입은 사회주의의 붕괴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여 반대한 반면에, 개혁주도파는 개혁을 계속 진전시키고 시장경제를 도입해야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급진개혁파는 그에 반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의 길로 전환해야 러시아가 산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질척거리기 시작하면서 국론은 크게 양분됐다. 사회주의 원리를 지킬 것이냐, 자본주의로 전환할 것이냐? 싸움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하나는 대중들에 대한 선전전이었고, 하나는 국가권력 장악 싸움이었다. 정세는 갈수록 긴박해져갔고, 수면 위와 아래에서 불꽃 튀는 싸움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속화와 변질

 

시장경제로 전환하다(1989년 ~ 1990년)

 

 

로큰롤에 열광하는 소련의 신세대 젊은이들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는 소련사회로 밀려드는 '자본주의 문화'의 물꼬를 터놓았다.
 
1989년 3월 소련에서는 역사적인 연방 인민대의원 선거가 있었다. 공산당의 공식후보 외에 여러 정파의 후보들이 자유롭게 출마했다. 모든 인민대중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다수 후보 중 하나를 선택했다. 러시아와 소련의 역사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치르는 자유경선이었다.

 

선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향유해온 공산당과 정부의 간부들이 무려 87명이나 낙선했다. 옐친은 모스크바의 한 지역구에서 89%의 압도적인 지지로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했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많은 급진파 인사가 당선됐고,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에서는 민족주의자 후보들이 압승을 거두었다. 물론, 대의원의 다수는 여전히 공산당원이었으나, 당원들 사이에도 견해 차가 컸다.

 

5월 25일에 열린 인민대의원대회는 시종 텔레비전으로 중계방송되어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고르바초프는 압도적인 지지 속에 인민대의원대회의 상설 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정부와 당이 분리되면서 대중의 정치참여가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국정운영을 좌우하던 공산당의 힘은 약화됐다.

 

그와 더불어 페레스트로이카에 또 한 차례 위기가 닥쳤다. 7월에 들어서면서 쿠즈바스, 돈바스 탄전지대의 광부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그루지야와 발트 연안 3개 공화국에서 탈연방 독립운동이 거세졌다. 대중들에게 페레스트로이카는 아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고, 페레스트로이카로 인한 지배체제의 이완은 소수민족들의 독립욕구를 분출시켰다.

 

연말에는 동유럽에서 극적인 사태전개가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루마니아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동유럽에 대한 불간섭 정책을 고수하며 사태를 묵묵히 관망했다.

 

한편, '새로운 사고'에 입각한 외교는 중 · 소 화해와 냉전 종식 선언을 가져왔다. 5월에 고르바초프는 중국을 방문하여 30년간의 중 · 소 불화를 씻고 양국 관계를 정상화했으며, 12월 몰타에서 열린 미 · 소 정상회담에서는 소련과 미국이 최종 화해하고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이어 1990년 9월 30일에는 우리나라와 소련 간에도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됐다.

 

1990년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전환점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다시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추진, 3월의 인민대의원대회에서 '대통령제 도입, 공산당의 권력독점 포기와 다당제 도입, 사적 소유권 인정'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새 헌법하에서 막강한 권한을 갖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 직속으로 대통령위원회가 구성되어 정부는 이제 당과 완전 분리됐다.

 

공화국 · 주 · 시 단위에서도 자유선거가 행해져 새로운 의회와 새로운 정부가 생겨났다. 옐친이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사실상의 대통령이 됐고, 급진파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의 시정을 장악했다. 공산당은 이제 러시아 공화국에서는 야당이 됐다.

 

그와 더불어 연방구성 15개 공화국이 실세화하는 추세가 뚜렷해졌다. 발트 3국이 1990년 3월 리투아니아의 독립선언을 계기로 탈소 독립운동을 가속화했다. 러시아 공화국은 이제까지는 소련 내의 실체 없는 연방구성 공화국이었으나, 옐친이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한 후 6월에 주권선언을 하면서 모스크바에 소련과 러시아의 이중권력 상태가 출현했다. 연방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정치의 민주화가 가속화하고 연방이 해체위기에 이르는 가운데, 공산당은 권위와 힘을 점점 잃어갔다. 게다가 보 · 혁 대립이 심화되면서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당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일환으로 당 개혁에 착수했다. 1990년 7월 제28차 당대회에서 당의 재정비가 이루어졌다. 리가초프가 은퇴하면서 보수파는 무력화됐고, 옐친 등의 급진파는 개혁 부진을 이유로 탈당했다. 정치국은 국가와 당의 주요정책을 결정하는 기관에서 당무회의 같은 기관으로 바뀌었고, 그와 함께 당의 역할도 대폭 축소됐다.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나는 속에서도 정치개혁과 사회 전반의 민주화, 새로운 외교는 나름대로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의 활성화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개혁 초기의 2년, 1985년~1986년에는 노동 생산성과 공업 생산, 농업 생산이 크게 호전되고 있었는데, 오히려 각종 경제권한의 기업 이양, 사기업 허용, 협동조합 자율화 등의 조치가 내려진 뒤로는 산업생산이 계속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설계자들은 점점 초조해졌다. 게다가 급진파는 하루빨리 시장경제를 도입하라고 성화였다. 개혁주도 세력도 마침내 책상머리에서 계속 검토만 되고 있던 시장 요소를 대폭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빈부격차, 경쟁의 독점화, 주기적 공황에 따른 대규모 실업, 범죄의 만연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폐해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 폐해들은 나중에 시정할 수도 있었다.

 

우선 당장은 중앙통제 계획경제가 갖고 있던 경직성과 원재료 활용의 비효율과 낭비에서 탈피하여 하루빨리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 급했다. 높은 수준의 경제를 발전시킨 미국과 서독 · 일본 · 북유럽 등이 다급한 이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모델로 부각됐다. 시장이 골치 아픈 문제점들을 한꺼번에 해결해줄 것 같은 환상이 이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폐해,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시장경제화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파멸적인 결과에는 점점 눈이 멀어져갔다.

 

경제개혁의 결과로 새롭게 등장한 기업가와 상인들, 글라스노스트로 주가가 급상승한 저널리스트 · 작가 · 예술가 · 연예인 · 학자 등의 각종 전문 지식인들, 서방세계에서 자기와 비슷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부와 풍요를 의식하기 시작한 권력과 경제분야의 엘리트들 사이에,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대안으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호감이 확산되면서 시장경제의 도입을 부추겼다.

 

1990년 8월,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하기 위한 종합기본계획에 합의했다. 시장화 방법을 두고 두 개의 안이 만들어졌다. 급진적인 샤탈린 안은 500일 안에 중앙통제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급속히 전환할 것을 주장했고, 리슈코프 안은 다소 온건한 주장을 폈다.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는 즉각 샤탈린 안을 채택했고, 소련 최고회의는 진통 끝에 두 안을 절충한 고르바초프 안을 채택했다. 러시아 공화국은 11월 1일 고르바초프와 소련 최고회의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시장경제의 채택은 페레스트로이카의 변질을 가져왔다. 사회주의의 재편을 목표로 출발한 페레스트로이카가 안팎의 압력과 긴장 속에서 '시장화'의 환상에 빠져들면서 자본주의 요소를 대폭 수용하고 만 것이다. 1991년에 들어서는 경제의 '시장화'와 기업의 '사유화'가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양, 언론매체와 시위대의 중심 슬로건과 구호로 자리잡아갔다.

 

한편, 발트 3국과 그루지야 등지의 분리독립운동은 점점 더 치열해졌다. 고르바초프는 각 공화국의 권력을 연방 권력보다 우위에 두는 신연방안을 제시했으나, 여러 공화국으로부터 거부당했다.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들을 필두로 이제 친자본주의 세력으로 변한 급진파와 각 공화국의 민족주의자들은 고르바초프와 소련을 점점 허수아비와 껍데기로 만들어갔고, 사회주의와 연방의 해체 위기에 접한 보수파는 KGB와 군부를 중심으로 결속을 강화하면서 고르바초프를 포위해 들어갔다.

 

1990년 말, 고르바초프는 '세계평화 정착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러나 소련 내에서 고르바초프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