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 혁 갈등 시작(1987년)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한 소련공산당 비상회의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에 착수할 당시, 세 파는 모두 같은 인식을 갖고 있었다. 소련에 체제위기가 왔고, 이 위기는 폭넓은 개혁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으며, 개혁의 방향은 행정 · 명령형 지도에 물든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진전시킴으로써 대중들의 창발성을 높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슬로건, '더 많은 공개,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사회주의'에 이들은 모두 공감했다.
세 지도자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도 사실 같은 개혁파라는 공통점으로 맺어진 것이었다. 체르넨코 사후 후계자를 선출할 당시 당서기였던 리가초프는 젊은 정치국원 고르바초프의 집권을 도왔고, 집권 후 고르바초프는 리가초프를 정치국원으로 끌어올려 제2서기직을 맡겼다. 개혁 프로그램 작성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긴밀하게 협력했다. 옐친은 개혁 착수 후 리가초프의 천거로 고르바초프가 지도부에 발탁한 인물이었다.
1987년 후반까지 페레스트로이카는 세계인의 관심하에 온 국민의 호응을 받으며 순조롭게 진행됐고, 세 사람 사이에도 별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987년 10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옐친이 개혁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비판하면서 바야흐로 보 · 혁 논쟁의 막이 올랐다. 옐친은 특히 리가초프를 지목하여 그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소극적이며 당 서기국을 비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때까지 옐친은 지지자가 별로 없는 독불장군이었다. 자유주의자와 좌익 사회주의자들이 몇몇 비공식단체를 만들어 급진적인 주장을 펴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은 그 힘이 미약했다. 11월 11일, 옐친은 모스크바 시당 제1서기에서 해임됐고, 다음 해 초에는 정치국 후보위원직에서도 물러났다. 해외보도를 통해서야 옐친의 해임 소식을 접한 급진적인 몇몇 단체는 소련 대중매체의 침묵을 문제 삼으며 옐친 해임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다.
정통보수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페레스트로이카의 과도한 진전에 우려를 갖기 시작했다. 그 후 1988년 3월, 스탈린의 공적과 사회주의의 전통을 옹호하고 개혁의 과도한 진전을 공격하는 안드레예바의 논문 〈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가 《소비에츠카야 러시아》 지에 게재되면서 정통보수파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보수파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개혁이 도중 하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고르바초프는 《프라브다》 편집부에 반박 논문을 게재하도록 요청했다. 《프라브다》 편집부에서 쓴 〈페레스트로이카의 원칙은 사고와 행동의 혁명성이다〉라는 논문은 '원칙을 방기하는 것'이라거나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주문을 욈으로써 페레스트로이카에 제동을 걸려는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후 벌어진 논쟁에서 개혁주도파가 승리하고 정통보수파는 후퇴했다.
광범한 정치개혁을 결의한 1988년 6월 제19차 당협의회를 기점으로 보 · 혁 논쟁의 2단계가 시작된다. 당협의회에서 옐친은 개혁촉진을 요구하고 보수파 비판을 선도하여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보수파도 이제 페레스트로이카의 변질을 문제 삼으며 대반격을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양날개의 균형을 잡으며 안정 속의 개혁을 지속하고자 애썼다.
개혁파 · 보수파 · 급진개혁파의 구도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이 무렵이다. 개혁파와 보수파는 이제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지난 70년간의 사회주의 건설의 공과 과,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 시장요소의 도입 폭과 속도, '새로운 사고'에 입각한 외교, 민족분리운동, 페레스트로이카에서의 당의 주도성, 페레스트로이카 부진의 원인 등, 모든 면에서 개혁파와 보수파는 평가와 견해를 달리하며 충돌했다.
급진개혁파는 페레스트로이카, 즉 개혁과 재편의 차원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곧 사멸하지 않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자체 법칙에 따라 병행 발전해갈 거라는 개혁파의 견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효율적인 관리 · 통제방식은 주식회사제이며 자본주의적 시장요소를 대폭 도입하여 상품 화폐 관계를 매개로 시민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다당제를 수용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며 완전한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까지도 일각에서 제기됐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속을 강조하면서, 당내 보수파의 입지는 약화됐다. 1988년 9월의 정치국 인사에서 보수파인 그로미코가 은퇴하고 리가초프가 이데올로기 담당에서 물러나 농업 담당으로 좌천됐다.
1989년 3월의 인민대의원 선거에서 옐친 등 급진개혁파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압승을 거두고 정계에 복귀했다. 반면에 몇몇 보수파 지도자를 비롯한 고위 당관료들이 대거 낙선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별효과를 내지 못하고 경제가 활력을 되찾지 못하는 가운데, 인민대중이 개혁주도파와 보수파에 등을 돌리고 급진개혁파를 정치적 대안의 하나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7월에는 광부들의 대파업이 일어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위기를 심화시켰다. 노동조건의 개선, 노동자 민주주의의 확대, 광산의 노동자 통제, 생산물의 일부 처분권 등을 요구한 정치성 파업은 개혁주도파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고 결과적으로 급진파의 입지를 크게 강화해주었다. 정치경제의 위기에 더하여 이념적 혼란이 극심해진 상황에서 고르바초프는 당 개혁을 통해 개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1991년으로 예정된 제28차 당대회를 1990년 7월에 앞당겨 열었다. 보수파는 그 직전인 6월에 이제까지 소련공산당 내에 없던 러시아 공산당을 만들어 내부결속을 다졌고, 급진파는 주권선언까지 한 러시아 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제28차 당대회의 다수파는 여전히 정통보수파와 중간파였다. 고르바초프는 당 개혁을 유보하고 서기장직을 그대로 유지한 채 중간파와 짜고 리가초프 제2서기를 축출하는 전술을 택했다. 리가초프와 몇몇 보수파 지도자가 당 지도부에서 밀려났고, 옐친 등의 급진파 지도자는 개혁의 부진에 불만을 품고 탈당했다. 그로 인해 고르바초프와 개혁주도파의 당내 입지가 크게 강화됐다. 고르바초프는 나아가 당 권력의 많은 부분을 정부로 이양시켜 당을 약화시켰다.
제28차 당대회를 계기로 보 · 혁 대립은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러시아 공화국을 장악한 급진파 지도자들은 공산당을 이탈하여 당외 투쟁을 개시했고, 보수파는 '소유즈 파'와 러시아 공산당을 중심으로 뭉쳐 당내에서 개혁파를 계속 압박했다. 격화된 민족분리 운동도 고르바초프의 발목을 계속 잡아챘다. 고르바초프는 당 안팎의 반대파와 분리독립으로 방향을 굳힌 공화국들로부터 세찬 공격을 받으며,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를 오가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시작했다.
이후 보 · 혁 대립은 사실상 이념투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정통보수파와 개혁주도파는 경제와 사회 전반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를 재건하려는 목적은 같았으나, 정통보수파가 더 이상의 개혁진행, 특히 시장요소의 급속한 도입은 사회주의의 붕괴를 가져온다고 생각하여 반대한 반면에, 개혁주도파는 개혁을 계속 진전시키고 시장경제를 도입해야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급진개혁파는 그에 반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의 길로 전환해야 러시아가 산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질척거리기 시작하면서 국론은 크게 양분됐다. 사회주의 원리를 지킬 것이냐, 자본주의로 전환할 것이냐? 싸움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하나는 대중들에 대한 선전전이었고, 하나는 국가권력 장악 싸움이었다. 정세는 갈수록 긴박해져갔고, 수면 위와 아래에서 불꽃 튀는 싸움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속화와 변질
|
'역사 ,세계사 > 러시아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찢겨져나가는 소비에트 연방 (0) | 2014.09.16 |
---|---|
페레스트로이카와 동유럽 (0) | 2014.09.16 |
무너져내리는 소련사회 (0) | 2014.09.16 |
미 · 소 공존, 중 · 소 대립 (0) | 2014.09.16 |
핵전쟁의 위기를 넘기다 (0) | 2014.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