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와 노보시비르스크 각서(1983년)
1970년대 중엽을 고비로 경제에 적신호가 나타나면서 사회의 정체와 부패가 뚜렷한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전반까지도 연평균 6.3%와 5.9%를 보이던 공업성장률이 1970년대 후반에는 3.4%로 떨어졌다. 농업의 경우에는 더욱 심해 1970년대 전반부터 정체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제성장의 정체와는 반대로, 국민들의 소비수요는 급증했다. 그간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사회의 절대적인 안정은 국민들의 기대 수준을 크게 부풀렸다. 전통적으로 생산재와 군주산업에 치중해온 소련경제는 국민들의 소비재 수요를 충족시켜줄 수가 없었다. 브레즈네프 정부는 소비재 생산을 늘리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의지표명과 부분적인 조치만으로 구조적인 문제가 극복될 수는 없었다. 계획과 달리 생산재 부문과 소비재 부문의 격차는 오히려 조금씩 더 벌어져갔다. 농업부문에서도 식량의 자급에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육류 소비의 증가에 맞추기 위해 식육 생산을 늘리면서 사료 수요가 급증하여, 한때 곡물 수출국이던 소련이 곡물 수입국으로 변했다.
1970년대 말, 소련경제의 위기는 이제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도가 됐다. 그러나 일반 국민과 타성에 찌든 관료들은 아직 이 위기를 실감하지 못했다. 1973년 중동전쟁 이후 두 차례의 유류파동으로 석유가격이 폭등하면서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수출국이던 소련에 오일 달러가 대거 유입되어, 위기를 은폐하고 있었던 것이다.
폐쇄적인 관료체제는 이 위기를 은폐함과 동시에 심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생산량과 경제수치의 조작이 다반사로 행해졌고, 힘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지하경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국가재산이 빼돌려져 암거래됐고, 서방에서 밀수입된 상품들이 지하에서 고가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각급 당이 가지고 있던 유망인사 명단을 뜻하던 노멘클라투라는 이제 특권계급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이들은 사회의 요구에 자신을 일치시키기보다는 자신의 일자리와 특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는 부패한 관료주의를 만연시켰다. 공업화가 진전되고 사회구조가 변화하면서 크게 늘어난 각종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한 중간층들도 이제 혁명이 가져다준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처지를 자본주의국에서 자신들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물론, 서방세계의 각종 전문가들은 그들보다 몇 배 나은 풍요와 안락을 향유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대체로 그 반대였지만.
그로 인해 적대계급이 사라졌다는 소련사회에 새로운 계급이 형성돼갔다. 물론 서방세계의 계급 간 격차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었으나, 계급과 착취 없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일부 계층이 누리는 비교적 높은 소득, 좋은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는 특권, 지위를 이용해 올리는 부수입 등은 인민대중들로서는 꿈꾸기조차 어려운 것들로서, 사회의 일체성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병들어가는 관료주의는 온 나라에 부패를 만연시켜갔다.
지역 간 격차에 대한 불만도 터져나왔다. 혁명 이전부터 후진지역이었던 변방의 주민들은 엄연한 격차에 불만을 나타냈고, 선진지역이었던 발트 3국 등지의 주민들은 오히려 다른 지역을 돕다 보니 자기네 발전이 지체된다고 불만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 물가상승을 감안한 경제성장률은 사실상 제로 상태로 떨어졌고 투입자본에 대비한 산출량의 비율도 격감했다. 행정 · 명령형 경제체제와 관료주의로 인한 물자의 낭비와 비효율성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경제위기가 모든 사람에게 피부로 느껴지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국가의 통일성을 해치는 정도로까지 발전해갔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국가와 사회보다는 자신과 자기 가족, 자기네 생산목표를 챙기기에 바빴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범죄와 알코올 중독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사회붕괴의 조짐이 확산됐다.
게다가 국제정세마저도 매우 좋지 않게 돌아갔다. 1979년의 아프가니스탄 출병은 소련을 진흙탕 속으로 끌고 들어가면서 대서방 관계를 악화시키고 소련의 국제지위에도 큰 손상을 입혔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수물자 수요와 동서 데탕트의 파괴에 따른 군비 재강화로, 소비재 생산을 늘리려는 소련정부의 계획은 다시 차질을 빚었다. 1980년에는 폴란드에서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 운동이 일어나는 등, 동유럽에 동요가 일면서 반석 같았던 단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위기상황에서 노보시비르스크와 모스크바 · 레닌그라드의 연구소를 중심으로 개혁파 연구원들이 소련경제와 정치 · 사회의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나름대로의 대책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중 1983년 여름, 노보시비르스크의 자슬라프스카야 등이 작성한 〈노보시비르스크 경제보고서〉는 중앙집권 명령형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다음 여덟 가지로 요약했다.
1. 경제 의사결정의 과도한 중앙집권
요컨대 기업이 모든 면에서 중앙관료기구에 꼼짝 못하게 얽매여 질식해버릴 지경에 이르렀다는 분석이었다. 흔히 〈노보시비르스크각서〉라 불리는 이 보고서는 개혁논쟁의 출발신호 역할을 하여 고르바초프의 초기개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브레즈네프는 1982년 11월, 체제가 완전한 정체의 수렁 속에 빠진 가운데 76살의 나이로 죽었다. 후임에는 68살의 전 KGB(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안드로포프가 취임했다. KGB 의장 시절 반부패 캠페인을 벌인 바 있는 안드로포프는 서기장에 오르자마자 지하 제조업과 상행위의 이권에 관련된 각료들을 시범적으로 해임하고, 노동자와 사무직 종사자들에게도 엄격한 작업기강의 확립을 요구하여 위반자를 적발, 처벌하는 등 개혁의지를 확고히 했다. 그와 더불어 고르바초프의 능력을 인정하여 장래의 지도자 후보로 끌어올리는 등, 중앙과 지방의 대폭 인사교류를 통해 능력 있는 젊은층을 요직에 등용하여 개혁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개혁의 청사진을 채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1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안드로포프가 1984년 2월에 죽은 후, 브레즈네프에게 충성하던 74살의 체르넨코가 서기장에 올랐다. 현상유지에 급급하던 그는 결과적으로 고르바초프에 대한 기대만 높여준 채 1년 후에 죽었다.
각주 |
페레스트로이카와 '새로운 사고'
고르바초프, 개혁 착수(1985년)
'새로운 사고'에 따라 소련은 침공 8년 5개월 만인 1988년 5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1986년 2월 제27차 당대회에서 새로운 강령이 채택되고 '가속화' 전략이 결의됐다. 그러나 낡은 사고가 아직까지도 지도부를 꼼짝 못하게 얽어매고 있었고, 경제발전 가속화 전략도 전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이해 4월, "사회생활 모든 부분에서 페레스트로이카(총체적 개혁 · 재편)가 필요하다"면서 처음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제창했다.
4월 26일에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사고는 개혁 필요성에 대한 공감을 크게 확산시켰다. 사고 직후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노선이 당의 공식방침으로 승인됐다. 그해 여름, 고르바초프는 하바로프스크에서 '페레스트로이카는 혁명'이라고 선언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대중들 사이에서 '글라스노스트'와 '민주화'가 일상적인 구호로 자리 잡아갔다. 10월에는 미 · 소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가 전략핵무기의 반감과 전술핵무기의 전폐를 제안하여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87년은 페레스트로이카 원년으로 꼽힌다. 1월에 페레스트로이카는 사회 민주화와 불가분하다는 선언이 나오면서 소비에트 대의원의 복수선거제도와 완전한 비밀투표가 제창됐다. 6월에는 기업의 자주관리와 독립채산제를 채택하여, 중앙계획기관은 장기계획의 목표만 제시하고 구체적인 운영은 기업들에게 위임하는 경제개혁이 행해졌다. 이를 전후하여 개인기업을 허용하고 협동조합의 자율권을 크게 높이며, 외국무역을 다변화하고 외국과의 합작기업을 허용하는 등, 꽉 막혀 있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조치가 순차적으로 행해졌다. 페레스트로이카에 발동이 걸린 것이다.
1987년에 고르바초프가 직접 쓴 책 《페레스트로이카》에 당시의 위기에 대한 그의 진단과 해결책이 잘 제시되어 있다. 고르바초프는 이 책에서 소련경제의 병폐로 원재료의 낭비와 비효율성, 신기술의 도입 지연, 중앙집중관리의 경직성 등을 열거하면서, 위기의 근원을 소련에 건설된 특수한 형태의 사회주의의 결함, 그중에서도 특히 경제관리의 과도한 중앙집중, 인간이해의 다양성 무시 등에서 찾았다. 즉, 소련체제의 가장 큰 결함은 민주주의의 결여이며, 그 해결책은 사회의 모든 면에서 민주화를 확대하는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덧붙여서 페레스트로이카는 '사회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다른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경제개혁에서 고르바초프는 장래에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는 두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하나는 기업과 계획 · 관리체제를 포함한 경제제도의 민주화였고, 하나는 경제에 시장요소를 더 많이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르바초프와 개혁주도세력이 생각했던 것은 분명히, 민주적인 계획체제와 기업이 지배적인 제도로 자리 잡은 위에 시장이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창출이었다. 기업이나 그밖의 국유재산의 사유화 주장 같은 것은 없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글라스노스트로부터 시작됐다. 관영 TV를 포함한 모든 매체를 통해 그동안 공표가 금기시됐던 정보들이 공개되기 시작했고, 그를 토대로 활발한 의견교환과 논쟁이 벌어졌다. 사회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에 대한 토론의 개방을 통해 대중들의 창발성을 고양하고, 경제기구를 민주화하며 대중을 개혁과정에 참여시키려는 것이 지도부의 목적이었다.
역사와 사회의 어두운 면이 햇빛 아래 드러나기 시작했다. 역사의 재평가 작업이 시작되고 억압체제에 대한 고발과 비판이 이어졌다. 고위관료와 지도기구에 대한 격한 비판이 행해졌으며, 부정부패, 알코올 중독, 매춘 등의 병적 증상이 폭로되고 그에 대한 대책이 제시됐다. 문학 · 영화 · 드라마의 검열도 폐지되어 반체제 인사들의 작품이 빛을 보고 서방세계의 문화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면서 다양한 견해들이 표출됐다. 민족주의, 반유태주의, 반사회주의적이고 친자본주의적인 입장들이 사회주의개혁 주장과 함께 공개적으로 유포됐다. 구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동조자를 얻었다. 공식입장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느슨한 모임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사회주의적 '좌익 반대파'는 각종 비공식단체와 이익단체 · 인민전선을 만들어 대중운동을 확산시켜갔다.
1987년 11월 2일 고르바초프는 10월혁명 70주년 기념연설에서 스탈린 시대의 행정 · 명령형 지도방식과 정치탄압에 관한 비판을 확인하면서, 의견과 사회활동의 다양성을 뜻하는 '사회주의의 다원성'을 제기했다. 민주집중제와 자주관리의 결합 틀을 벗어나지 않는 '다원성'을 말한 것이었으나,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언급은 급진주의자들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전후하여 옐친으로 대표되는 급진개혁파가 공개석상에서까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당내에서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던 정통보수파는 급진개혁의 위험을 거론하며 옐친을 호되게 비판했다. 옐친이 결국 지도부에서 물러나고, 고르바초프와 정통보수파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또 다른 축은 '새로운 사고'였다. 핵무기가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세계가 하나로 통일돼가고 있는 상황에서, 계급이나 국가의 이익보다는 평화와 환경 등의 전 인류적 가치가 우선하며 각 국민은 자유롭게 자기 발전의 길을 선택해가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사고'의 요지였다.
1987년 12월, 고르바초프는 미국을 방문하여 INF(중거리 핵전력)의 전폐 조약을 성사시켰다. '새로운 사고'에 따른 외교가 거둔 첫 성과였다. 다음 해 초에는 아프가니스탄 철병이 시작되어 1년 후인 1989년 2월에 완료됐다.
1988년 초에 들어 페레스트로이카에 첫 위기가 왔다.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비극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1988년 2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에서 격렬한 민족분규가 일어나 다수의 아르메니아인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 지도부가 미처 예상치 못한 사태의 진전이었다. 이후 민족문제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중대한 장애물로 등장한다.
1988년 3월에는 안드레예바의 논문 〈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가 발표되면서 정통보수파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고르바초프와 개혁주도파는 〈프라브다〉에 반박 논문을 게재하며 보수회귀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이후의 논쟁에서 고르바초프의 개혁파가 승리하고 정통보수파는 후퇴했다.
이 일이 있은 뒤 '페레스트로이카 제2의 숨결'이라고 할 만큼 소련에는 혁신의 기운이 충만했고, 스탈린 비판이 제약 없이 행해지기에 이르렀다.
고르바초프는 '안드레예바 논문 사건'을 계기로 '교조주의자들을 물리치지 않고서는 경제개혁을 진전시킬 수 없다. 경제제도의 개혁만으로는 대중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확대시켜나갈 수 없다'는 판단하에 정치개혁을 가속화하기로 생각을 굳혔다. 1988년 6월의 제19차 당협의회에서 종래의 최고 소비에트를 폐지하고 국가 최고기관으로 인민대의원대회와 최고회의를 신설하는 새로운 국정체제가 결정됐다. 당과 국가의 분리, 노멘클라투라의 폐기와 대표자의 자유선출, 주요직책의 임기제도 채택됐다. 정치개혁이 본궤도에 오른 것이다.
이로써 글라스노스트와 사회 민주화로부터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개혁과 '새로운 사고'에 입각한 외교를 거쳐 정치개혁에 이르면서 그 사이클을 완성했다. 그러나 정치 · 경제 ·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이 본격화되면서 페레스트로이카는 개혁지도부의 통제선을 넘어 자체발전을 시작했다.
급진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보수 개혁 논쟁이 점점 더 뜨거워졌고, 민족문제도 갈수록 첨예해졌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본격화와 함께 그 위기의 골도 점점 깊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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