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핵전쟁의 위기를 넘기다

구름위 2014. 9. 1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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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위기(1962년)

 

 

 

1963년 4월 레닌 묘비 앞에 선 공산권 지도자들
왼쪽부터 흐루시초프, 카스트로, 브레즈네프, '쿠바 위기'에서 미국에 밀린 것이 흐루시초프 실각의 한 원인이 되었다.
 
동서냉전하에서 미국과 소련은 무력시위로 상대를 제압하고 자기를 지키려는 무한 군비경쟁에 돌입했다. 앞서 나간 것은 경제력도 우위에 있고 원자폭탄도 먼저 개발한 미국이었다. 그러나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면서 원폭 독점이 깨졌다. 미국은 1952년 원폭보다 훨씬 강력한 수소폭탄을 개발하여 대소 우위를 지켰으나, 이듬해 소련도 수폭을 개발하여 곧바로 미국을 따라잡았다.

 

소련은 경제력과 군사력 전반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고성능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해 1955년 IRBM(중거리 탄도탄), 1957년 ICBM(대륙간 탄도탄)의 개발에 성공, 미사일에서 대미 우위를 확보했다. SAC(전략폭격기) 중심의 핵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에서 소련과의 '미사일 갭' 논쟁이 일면서 미국도 고성능 미사일 개발에 힘을 쏟고 미사일 부대를 별도 편제했다. 1960년대 들어 미국은 SLBM(잠수함 발사 미사일)을 개발한 후, 적의 선제공격에서 살아남은 핵전력으로 보복을 가한다는 전략체계를 수립하여 다시 소련에 앞섰다. 소련도 1959년 전략 로켓군을 창설하여 핵전력을 강화했다.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은 이러한 무한 군비경쟁을 배경으로 세계혁명 전략에 일대 전환을 가한 것이었다. 일단 핵전쟁이 일어나면 승자 · 패자가 따로 없이 모든 인류가 공멸한다는 위기의식이 방향전환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자본주의 세계는 주기적인 공황의 내습으로 전반적인 위기가 점점 심화돼갔고, 식민지와 제3세계권의 민족해방운동과 선진 자본주의국 내의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제국주의 체제의 뿌리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가 공존하는 가운데서도 세계는 차츰 사회주의로 이행해갈 거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당시 소련 지도자들은 갖고 있었다. 또한 끊임없는 전쟁으로 계속 시달림을 당해왔고, 특히 지난 대조국전쟁에서 엄청난 피해를 겪은 탓에 전쟁을 무척이나 혐오하고 평화를 갈망하던 소련인들에게 평화공존 주장은 커다란 설득력을 발휘했다.

 

흐루시초프는 평화공존을 보장해주는 미 · 소 간 군비의 균형, 특히 핵전력의 균형을 추구하는 한편으로, 직접 미국을 방문하여 대미관계의 안정을 꾀하고 군축을 제안하는 등, 다각도로 평화공존 외교를 펴나갔다. 그러나 1960년 5월 미국 첩보기 U2기의 소련 영공침입 격추사건이 일어나면서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 노선은 난항에 부닥쳤다. 미 · 소 간에 가시돋친 설전이 오가는 가운데 동서대립의 상징인 베를린에서 위기가 발생하고, 마침내 1961년 8월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장벽이 쌓였다. 미 · 소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군비확대경쟁이 재개됐고, 자제하고 있던 핵실험도 대규모로 행해졌다.

 

베를린, 핵실험, 군축문제 등, 위기를 내포한 현안들을 두고 힘겨운 교섭이 진행되는 가운데, 1962년 가을 돌연 카리브 해의 쿠바에서 미 · 소 간 무력대결이 표면화됐다. 쿠바에 건설 중인 소련의 미사일기지와 소련제 미사일의 쿠바 반입을 둘러싸고 미 · 소가 전쟁 일보직전 상황에 이른 것이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는 미국의 옆구리를 겨누는 '붉은 칼'이었다. 1961년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반혁명군의 '피그(돼지) 만 침입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미국은 대 쿠바 수출금지, 미주기구에서의 쿠바 제명 등, 쿠바 압박 작전을 강화해갔다. 쿠바는 절대절명의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련에 의지하면서 사회주의화를 추진했고, 조만간에 예견되는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소련의 전략 핵 미사일을 들여오고자 했다.

 

1962년 9월 소련과 쿠바는 쿠바에 IRBM 42기를 배치한다는 무기원조협정을 체결했다. 소련의 의도는 쿠바의 안전을 지킴과 동시에, 전략무기의 선제 배치를 통해 미국과의 교섭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었다.

 

10월 14일, 첩보기의 쿠바 상공 촬영사진을 분석한 결과, 미국은 소련이 쿠바에 공격용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케네디 정부는 아연 긴장하여 즉각 국가안전보장위원회를 소집하고 대응책을 모색했다. 10월 22일, 케네디는 전국 TV 방송망을 통해 국민들에게 사실을 알리면서 대응책을 제시했다. 해상봉쇄로 쿠바를 격리시켜 소련 미사일의 반입을 막고, 쿠바의 핵미사일이 서방국가를 공격할 경우 이를 소련의 미국 공격으로 간주하여 소련에 그만한 핵보복 조치를 가하겠다는 핵전 불사 입장을 밝힌 것이다. 세계는 돌연 핵전쟁의 공포에 휩싸였다.

 

10월 24일 미 함정 183척과 전투기 1,190대가 2,400㎞의 카리브 해 봉쇄선에 배치되어 초계기가 발견한 소련 선단의 도착을 기다렸다. 미 당국은 소련 선박이 정지명령 · 임검에 불응할 경우 격침까지 시킬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소련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미국의 봉쇄 · 검문의 국제법을 침해하는 해적행위라고 비난했다. 세계의 모든 눈이 카리브 해에 쏠렸다. 10월 26일, 소련의 미사일 적재함이 미국의 봉쇄선을 지나다가 저지당했다. 흐루시초프가 마침내 케네디의 초강경책에 한발 후퇴했다. 26일 소련은 미국에게 쿠바를 절대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28일 미국이 쿠바 불가침을 약속하자 소련은 미사일 기지를 파괴하고 미사일을 철수했다.

 

핵전쟁의 공포 1주일은 미국의 위력 시위와 쿠바 불가침 약속으로 종결됐다. 쿠바 위기 후 미소 양국은 급속히 접근했고, 별다른 진척이 없던 군축교섭도 진전을 보였다. 1963년 7월 미 · 소 핫라인이 개설되고, 8월에는 부분적 핵실험 정지조약이 체결됐다. 평화공존이 제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핵전력과 해군력의 낙후가 지적되고 군부를 중심으로 소극적인 대응에 대한 비난이 일면서 흐루시초프 실각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쿠바 위기를 계기로 적대국인 소련과 미국 사이는 접근한 반면, 사회주의 형제국인 소련과 중국 사이는 더 벌어졌다. 흐루시초프의 평화공존론을 이미 제국주의 세력과 타협한 '수정주의'라고 못박은 바 있는 중국은,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설치한 것을 '모험주의', 미국의 압력에 굴하여 미사일을 철수한 것을 '투항주의'라고 비난했다. 소련은 중국에 대해 핵전쟁의 위험을 무시하는 '교조주의'라고 비난했다. 양국 간의 긴장은 점점 고조돼갔고, 사회주의권에서도 다극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브레즈네프와 1970년경의 소련사회

 

'발달한 사회주의' 선언(1971년)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는 '건강상의 이유'로 당 제1서기직과 수상직을 내놓고 초야에 묻혔다. 당 기구를 공업과 농업의 두 부문으로 분할한 것, 경제관리의 지역 분권화, 스탈린 비판의 본격화, 독선적인 결정과 집행 등이 당 간부들의 불만을 산데다,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중점사업으로 추진한 농업정책에서까지도 부작용이 일어나면서 흐루시초프의 기반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후임으로는 당 제1서기에 브레즈네프, 수상에 코시긴이 취임했다.

 

브레즈네프는 직업기술학교 출신의 농업기사로, 1930년대에 당 주위원회 서기로 진출한 뒤 승진을 거듭해온 전형적인 당료였다. 브레즈네프-코시긴의 양두체제는 당과 정부의 권한을 분할 장악하여 서로 협력하며 국정을 이끌어갔다.

 

브레즈네프와 코시긴은 흐루시초프의 여러 개혁정책을 원점으로 돌리고, 안정성장을 지향하는 정책을 유도했다. 그와 더불어, 기업관리자에게 어느 정도 자율권을 부여하고, 이윤을 많이 내는 기업에 상여금을 많이 배당하여 물적 자극을 주는 것을 골자로 하는 부분적인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 '코시긴 개혁'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60년대 전반에 비해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기는 했으나, 그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고, 60년대 말에 이르러 임금상승에 대비한 생산성 상승폭이 떨어지면서 노동규율의 강화라는 이전 방식으로 회귀하고 만다.

 

개혁조치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브레즈네프는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쌓아올린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인민의 복지향상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새로운 연금법이 시행됐고, 1967년에는 주휴 2일제가 전면 도입됐다.

 

1971년 제24차 당대회에서 브레즈네프는 소련이 '발달한 사회주의' 사회가 됐다고 선언했다. 사회주의의 초급단계를 지나 완전한 공산주의 단계로 이행해가는 과도기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발전에 관한 흐루시초프의 지나친 낙관론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여 새로운 성장전략을 수립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새로운 전략에서는 소비재 생산의 확대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강조됐다.

 

브레즈네프는 그와 함께, 국민들의 지나친 기대상승과 이념의 이탈을 막기 위해, 과도한 소비를 배격하고 '사회주의적 생활양식'과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강조했다. 사회주의적 연대 · 도덕성 등이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됐다.

 

농업과 소비재 산업의 저성장에 따른 국민경제의 불균형 발전, 행정 · 명령형 경제관리체계의 문제점 등이 노출되기는 했으나, 1950년대와 1960년대를 거치며 소련에서는 공업화 · 기계화 · 계획경제의 성과가 축적되어 1970년경에 이르면 이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가 형성된다.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알타이 등지의 처녀지 개척사업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점점 그 웅자를 드러내, 제2, 제3의 곡창지대를 출현시켰다. 아무다리야 강의 운하는 서투르케스탄의 사막을 옥토로 바꾸어놓았다. 낙후돼 있던 외곽의 소수민족 거주지에 많은 공장이 들어서면서 지역적인 불균형과 격차도 크게 해소됐다. 곳곳마다 거대한 콤비나트, 강력한 발전소가 건설됐고, 그 주변에 광공업과 농업을 연관 지은 복합생산단지가 만들어졌다.

 

과학기술이 진보하면서 산업이 계속 성장함과 동시에 공업구조도 크게 바뀌었다. 노보시비르스크 교외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를 비롯한 대단위 연구단지의 훌륭한 시설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소련의 과학자들은 미국에 버금가는 수준의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그에 따라 무선공학 · 전자공학 · 원자력공학 · 화학공학 · 기계공학 등, 고도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또한 공업부문의 연이은 고도성장에 힘입어 미국과의 총산업생산 격차는 1950년의 3.6:1에서 1970년에는 1.2:1로 줄어들었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50년 동안에 소련인구는 1억 4,000만에서 2억 5,000만으로 늘었고, 그중 도시민의 비율은 20% 미만에서 50% 이상으로 증가했다. 노동자의 수도 급증하여 1970년대에는 전 국민의 약 60%가 노동자가 됐다. 공업화의 진전이 사회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더욱이 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노동자와 콜호스 농민에 대한 정부의 관심은 각별하여, 인텔리겐치아와 다름없는 생활을 보장받았고, 그 자녀들도 전혀 차별 없이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국민들의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크게 향상됐다.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없어졌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비된 각종 연금 · 보험제도가 뿌리를 내리고, 무료 진료체계가 효율적으로 재편되어 모든 국민이 유사시나 노후의 걱정을 덜었다.

 

4년제 초등과정과 8년제(후에 10년제로 바뀜) 중등과정의 무상 의무교육이 실시됐고,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의 수도 크게 늘어, 청년층의 약 30%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도서관과 장서도 크게 늘어 소련인은 세계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국민이 됐다. 거의 모든 국민이 악기 하나 정도는 다룰 줄 알았고, 예술창작과 체육활동에도 뜻만 있으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다.

 

소련인민들은 혁명이 그들을 위해 이뤄놓은 성과를 깊이 의식하고 그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들은 간혹 체제의 엄격함에 눈이 돌아가기도 했으나, 적어도 1970년대 중엽까지는 혁명의 성과가 그것을 덮어두기에 충분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련사회는 변화무쌍한 자본주의 사회의 시각으로 보면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절대적인 안정을 유지했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계속되는 건설의 기계 소리, 망치 소리를 빼고는 변화의 움직임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소련은 이 무서운 힘을 배경으로 미국과 맞서며 세계의 한 축을 형성했다.

 

그러나 사회의 안정은 한편으로 정체와 부패를 낳았다. 노동규율은 점점 느슨해졌고, 경제성장은 갈수록 둔화됐다. 국민들 사이에 공과 사의 구분이 만연하면서 공적인 영역의 공동화(空洞化)가 진행됐고, 이론파(異論派) 탄압을 계기로 사회에 폐쇄적인 분위기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1977년 새헌법인 '브레즈네프 헌법'이 제정되고 '성숙한 사회주의' 체제가 공표됐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소련의 상처는 안으로부터 서서히 곪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아, 별 위험이 따르지 않는 수술로 치유할 수 있는 정도였다. 더 무서운 것은 폐쇄적인 관료체제였다. 경직된 관료체제는 이 위기를 깨닫지 못했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 사이에 상처는 하루하루 더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