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소련, 강대국으로 떠오르다

구름위 2014. 9. 16.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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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과 소련의 국제지위 격상(1945년)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스탈린(가운데, 1945년 7월)
종전 후 소련은 미국과 함께 국제무대에서 양대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고 5월 11일 체코슬로바키아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면서 6년을 끈 유럽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는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아시아 지배를 꿈꾸던 일본 제국주의는 한때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서태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전황이 반전되어 일본군에 후퇴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독일이 항복할 즈음, 일본은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의 점령지에서 거의 철수한 상태였으나, 아직까지도 500만여 지상군과 강력한 공군을 보유하고 마지막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당시 일본 전투력의 2/3 이상이 중국대륙과 만주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독일을 항복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소련군은 얄타 협정에 따라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지 3개월 후인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해 들어갔다. 8월 20일까지 만주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 관동군은 거의 분쇄됐고, 잔당들은 항복했다.

 

당시 일본 점령하에 있던 우리나라에도 소련군이 진주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켰다. 그러나 당시 오키나와에까지밖에 이르지 못했던 미국측의 분할점령 제의를 소련이 받아들여, 소련군의 남진은 38도선에서 멈추었다. 한민족 분단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미국은 8월 6일에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30만이 죽고 수십만 명이 방사능 피폭으로 큰 고통을 치렀다. 그 위력에 일본인은 물론 온 세계가 경악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공할 핵무기가 등장한 것이다.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항복 의사를 밝혔고, 9월 2일 미주리 호 함상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무조건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세계 제패를 꿈꾼 파시스트 동맹의 추축국 세력은 세계평화를 지키려는 반파쇼 연합에 의해 타도됐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참으로 가혹했다. 참전국 중에서도 소련의 피해가 가장 컸다. 소련은 반파시스트 전쟁 중 가장 넓은 영토가 전장으로 변했고, 가장 긴 전선에서 가장 오랜 동안 치열한 전투를 했다. 또한 가장 많은 병사들이 전장에서 산화했고, 후방의 공장에서는 연합국 최대의 무기와 전투차량 · 군수물자를 생산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독일군도 독소 개전 이후 줄곧 전 병력의 2/3, 심지어는 3/4까지를 동부전선에 투입하여 소련군과 맞섰다.

 

2차대전 중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5,000만 이상이 사망했는데, 그중 절반인 2,700만 명이 소련인이었다. 동유럽 해방전쟁에서만도 소련병사 백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물질적인 피해도 엄청나, 전 국부의 약 1/3이 파괴됐다.

 

혹독한 희생의 대가로 소련과 소련인민은 커다란 영예를 안았다. 종전 후 소련은 파시즘에 맞서 싸워 이긴 제일의 승리자로 부상했다. 체제를 달리하는 서유럽 열강도 소련의 승전 기여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의 주도로 반히틀러 연합이 형성된 이후 소련은 가장 앞장서서 반파시스트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서유럽 열강 일부의 반소 감정과 반파쇼 전선 이탈 움직임을 누르고 세계인들 사이에서 세계평화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엄청난 전쟁물자의 투입, 가장 많은 병사의 참전, 연합국 성원으로서의 성실한 임무수행도 소련의 지위를 높이는 데 큰 몫을 했다. 한 예로, 1945년 1월 독일 서부전선에서 영 · 미 연합군이 고전하고 있을 때, 소련은 영국수상 처칠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미처 준비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독일 동부전선에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소련군은 큰 희생을 치르며 서부전선 연합군의 숨통을 터주었던 것이다.

 

소련은 전쟁 중 카이로 · 모스크바 · 테헤란 · 얄타에서, 유럽 종전 후 포츠담에서 열린 일련의 연합국 수뇌회담에서 미국 · 영국과 함께 전쟁방침, 전후 파시스트 동맹국 처리문제, 전 세계 안전보장체제의 확립 등을 논의, 결정했다. 소련은 연이은 회담에서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건설적인 결론을 유도했다. 종전 후 소련은 국제무대에서 미국과 함께 양대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국제연합(UN) 창설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2차대전에서의 소련의 분투와 승리는 전 세계에 10월혁명 이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제국주의 세력이 약화된 반면에, 사회주의 세력은 크게 성장했다. 동유럽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소련의 간접 지원하에 또는 독자적으로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 여러 나라에서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해가면서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성립했다.

 

그와 더불어,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어 제국주의의 식민지 체제가 흔들리면서 수십 개의 독립국가가 생겨났다. 그중 많은 나라가 사회주의적 발전의 길을 택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노동운동이 크게 성장함과 아울러, 자본가와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많은 양보를 하면서 복지국가의 개념이 실체를 갖게 됐다. 전면전의 호된 시련을 겪은 후, 자본주의 선진국 간의 갈등은 이제 경제전으로 변질돼갔다.

 

소련은 동유럽과 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들, 사회주의적 발전의 길을 택한 신생국들, 자본주의 국가 내 의식 있는 노동자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굳혀갔다.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선진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소련과 사회주의 세력의 약진에 위협을 느꼈다. 파시즘의 위협하에 힘을 합쳐 싸운 두 세력 간의 갈등은 표면적인 평화공존 합의로 덮어지기에는 그 도가 너무 심했다. 바야흐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위태로운 평화공존

 

동서냉전 시작(1946년 ~ 1947년)

 

1946년 3월, 미국 미주리 주의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처칠은 유명한 연설을 했다. 유럽대륙을 가로질러 '철의 장막'이 둘러쳐져 있다고 경고하면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국과 영국이 굳게 단결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처칠의 연설은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제 막 전쟁에서 벗어나 평화를 되찾은 세계의 인민들에게 연합국의 핵심 지도자였던 처칠의 발언은 큰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다른 유럽 국가는 물론 영국과 미국에서도 그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스탈린은 처칠을 히틀러에 비유하면서 전쟁광이라고 비난했다.

 

처칠은 2차대전 종반부터 소련의 영향력 증대를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독일을 무너뜨리는 데는 소련군의 막강한 군사력이 절대 필요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소련과 연합하여 함께 싸웠으나, 그 과정에서 소련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은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처칠의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소련군은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영웅적인 투쟁으로 히틀러군을 연파하며 동유럽에 진군했고, 베를린도 다른 연합국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점령하여 히틀러의 목을 졸랐다. 동유럽 인민들은 소련군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동유럽 인민들은 자국 내에서 반히틀러 투쟁을 주도했던 세력들을 중심으로 뭉쳐 인민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동유럽 각국의 인민 민주주의 체제는 소련의 지원하에 사회주의 체제로 발전해갔다. 아시아에서도 북한과 베트남이 같은 길을 걸었고, 중국에서도 혁명이 승리를 거둬가고 있었다. 사회주의의 세계체제가 성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유럽 국가의 제국주의자들은 불안한 눈으로 그 추이를 지켜보았다. 처칠의 연설은 그들이 느끼고 있던 위협의식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유럽인들은 당시, 2차대전에서 히틀러의 나치군을 궤멸시킨 소련의 영웅적인 행동에 매료돼 있었고, '좌파에는 적이 없다'는 슬로건에 공감하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처칠은 영국과 유럽보다는 미국에서 많은 동조자를 얻었다. 소련과 그 인근에서 도망 온 사람도 많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자유를 구가하며 부를 쌓아온 사람들이 많으며 사회주의의 전통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미국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득세하기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2차대전 특수로 미국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며 비약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만일 서유럽에서 대중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혁명이라도 일어나고 유럽 국가들이 자기네 손이 닿지 않는 다른 체제로 전환해버린다면, 그것은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은 유럽 부흥의 책임을 기꺼이 떠맡았다. 1947년 3월, 트루먼 대통령은 "무장 소수집단이나 외부세력의 정복 시도에 저항하는 자유인민들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으로, 자유민주체제를 수호하려는 나라에는 군사 · 경제원조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6월에는 마셜 국무장관이 유럽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마셜 플랜'을 발표했다. 곧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경제 부흥회의가 열렸고, 서방 16개국으로 구성된 기구가 원조 수용태세를 갖추었다. 1951년까지 120억 달러가 서유럽에 전달됐고, 서유럽 경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그에 따라 정치 사회적인 안정이 회복되면서 서유럽 공산주의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세계가 반공정책을 노골화하자 소련과 동유럽 국가도 그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1947년 7월 '몰로토프 플랜'이라는 이름의 동유럽 경제부흥계획이 수립됐고, 10월에는 9개국 공산당 대표가 모여 정보와 경험의 상호교환을 목적으로 코민포름(공산당 정보국)을 결성했다. 1949년에는 코메콘(상호 경제원조회의)도 만들어졌다.

 

1947년 미국의 정치평론가 리프맨이 기사와 저서에 '냉전'이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무력 이외의 수단으로 전개되는 자본주의권과 사회주의권의 대립 · 긴장상태를 일컫는 말로서 '냉전'이라는 말이 빈번히 쓰이기 시작했다. 평화공존 속의 '전쟁' 상태가 시작된 것이다.

 

체제 간의 긴장은 점점 가속화돼갔다.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것은 독일과 한국의 통일 · 독립문제였다. 당시 패전국 독일은 포츠담 조약에 따라 미 · 영 · 불 · 소 4개국이 분할점령하고 있었다. 미 · 영 · 불 3국은 서독지역에 독자정부를 수립, 서유럽 사회에 편입시켜 반공 · 반소의 보루로 삼으려는 계획을 착착 실행에 옮겨갔다. 이에 반발하여 소련은 1948년 6월 동독지역 내에 있던 서베를린(독일의 수도 베를린도 4개국이 분할점령하고 있었다)의 육로 출입을 봉쇄했다. 동서 양 진영 사이에 긴장이 높아갔다. 서방측은 비행기로 시민들의 생필품을 공수했다. 1949년 5월 소련은 서베를린 봉쇄를 풀었으나, 독일은 결국 양분됐다. 서독지역에는 독일 연방공화국이 수립되고, 동독지역에는 독일 민주공화국이 수립됐다.

 

독일은 전쟁책임이라도 있었다지만, 우리나라는 애꿎은 희생자였다. 일본 식민지였던 우리나라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편의상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을 분할점령하고 있었다. 편의상 갈라진 남북에서 각각 다른 체제가 정착하고 외세를 등에 업은 분리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분단상태가 고착되고 만 것이다.

 

 

 

 

 

미·소 양군이 진주하여 그어놓은 38선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시작된 동서냉전은 해방된 한국에 분단의 고통을 강제했다.
 
동서냉전 상태는 이제 군사적인 대결체제로까지 발전했다. 1949년 4월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를 결성했고, 서독의 NATO 가입을 계기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1955년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해 대응체제를 갖추었다. 1949년에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원폭 독점상태가 깨졌고, 곧이어 미 · 소 간에 수폭 경쟁, 미사일 경쟁이 벌어졌다.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터졌다. 동서냉전이 급기야 국지적인 열전으로 비화된 것이다. 베트남의 반식민 투쟁도 냉전 속의 열전 성격을 띠어가더니, 한국전이 남북한 체제를 굳히면서 정전된 이듬해인 1954년, 끝내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됐다.

 

동서냉전은 자본주의권을 수호 · 확대하려는 미국 · 영국과 사회주의권을 확장하려는 소련 간의 화해하기 힘든 대립이 빚어낸 산물이었다. 미 · 소 양대국 간에 '핵무기에 의한 교착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전쟁'은 이데올로기전, 외교전, 경제전, 군사 블록의 확장, 무기 경쟁의 양상을 띠어갔고, 세계의 한 구석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국지전을 통해 무기를 실험 · 소비 · 판매하고 위기를 재생산하는 체제가 확립돼갔다.

 

1950년대 중엽 '해빙' 기운이 일면서 냉전이 다소 완화될 때까지 동서냉전의 두 사령탑인 미국과 소련에서는 반대자를 적으로 몰아쳐 혹심하게 탄압하는 분위기가 풍미했다. 미국에서는 1948년 '히스 사건'으로 이른바 '빨갱이 사냥'이 시작됐고, 1950년부터 5~6년 동안 상원의원 매카시가 일으킨 '매카시즘' 선풍이 전국을 강타해 많은 정부관료 · 정치가 · 교수 · 문인 · 예술가들이 희생당했다. 개중에는 '건전한' 미국인의 사고가 '비미국적'이라는 이유로 매장당한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소련에서도 전후 베리야가 지휘하는 비밀경찰이 다시 극성을 부리면서 '스탈린주의'와 '개인숭배'가 되살아났고, 1946년 후반 '주다노프 비판' 이후 문화예술의 이데올로기 통제가 시작됐다. 1948~1949년에는 '전쟁 영웅도시' 레닌그라드로 수도를 옮기자는 운동이 일면서 레닌그라드의 당지도자와 시민들이 희생당하는 '레닌그라드 사건'이 일어났고, 1952~1953년에는 요인암살 및 암살모의 혐의로 저명한 의사들이 희생되는 '의사단 음모사건'이 발생했다. 한편, 1948년에는 독자노선을 추구하던 유고슬라비아가 코민포름에서 제명됐다. 다른 견해를 끌어안는 포용력이 줄어든 것이다.

 

동서냉전 체제의 상징은 뭐니뭐니해도 그로 인해 생겨난 3개의 분단국이었다. 그중 베트남은 1975년 사회주의 월맹의 승리로, 독일은 1990년 자본주의 서독의 주도로 각각 통일됐지만, 우리는 아직까지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지구 최후의 냉전지대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