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시련을 이기고 승리로

구름위 2014. 9. 16.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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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국전쟁(1941년 ~ 1945년)

 

 

 

나치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에 포격이 가해지고 있다. 독소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독일은 1941년 6월 22일 불시에 소련을 공격했다.
 
소련은 독일로부터 불의의 기습을 받으며 2차 세계대전에 빨려 들어갔다. 일찍부터 전쟁 위험을 감지했으면서도 소련군의 전쟁대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로 인해 소련은 2차대전 참전국 중 최대의 피해를 입게 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스탈린의 오판이 참화를 더 크게 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스탈린은 이상하리만큼 독소 불가침조약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아마도 독일이 유럽 중서부의 지배기반을 채 다지기도 전에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을 공격해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6월 22일의 날짜까지 언급하며 독일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각종 보고들이 쓸데없는 소리라며 일축됐고, 전쟁 전날까지도 전선의 소련군에는 독일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할 일체의 행동을 하지 말라는 지시가 하달되고 있었다.

 

게다가 1930년대 말의 '대숙청'으로 군 고위 지휘관이 비교적 경력이 짧은 사람들로 대폭 교체됨으로써 군 전력도 크게 약화됐다. 고위 지휘관을 양성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스탈린의 말이면 두말 없이 따르는 개인숭배 풍조도 스탈린의 오판을 부추겼다. 엄청난 국민의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중차대한 정책이 몇 사람만의 판단으로 결정됐고, 군사 전문가와 각급 지휘관들이 자율적인 판단으로 전쟁에 대비하는 길을 막았던 것이다.

 

대비를 못한 소련군은 초전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국경지대의 비행장에서 800대의 전투기가 이륙도 못한 채 박살났고, 첫날의 공중전에서 1,200대를 잃었다. 전선의 포탄창고도 손도 못 대고 점령당해 막대한 보급물자를 잃었다.

 

전선의 소련병사들은 물자도 충분치 못하고 후방 보급체계도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에 돌입했다. 병사들은 결사항전을 했으나, 곧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독일군도 곳곳에서 끈질긴 저항에 부딪쳐 서유럽 전투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희생자를 냈다. 7월의 스몰렌스크 회전으로 독일군은 모스크바 진입 계획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고, 키예프는 83일, 오데사는 69일간, 세바스토폴은 6개월 이상 저항을 계속했다.

 

항전과 후퇴가 거듭되는 가운데 소련인의 조국애에 불이 붙었다. 전선으로 보내달라는 노동자들의 지원이 쇄도했고, 병사들의 투지도 갈수록 높아갔다. 도시의 방어에는 병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시민이 몸바쳐 참여했다.

 

900일간에 걸친 '레닌그라드 공방전'은 대조국전쟁사에서 영웅적인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1941년 9월, 독일군이 시를 포위했다. 비축식량과 연료는 얼마 되지 않았다. 외부와의 연결로는 비행기와 라도가 호를 가로지르는 수로(겨울에는 호수 위에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빙판 길이 생긴다)뿐이었다. 사람들은 굶주렸고 도시는 포격과 공습으로 부서져갔다. 그러나 시민과 병사들은 놀라울 정도의 투혼을 발휘하며 제자리를 굳게 지켰다. 독일군은 끝내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다.

 

소련국민의 용감한 저항은 겨울까지 유럽 러시아 거의 전역을 점령하겠다는 파시스트의 속도전 전략을 무산시켰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히틀러 군대의 불패 신화도 깨졌다. 1942년 1월 말 점령군은 모스크바 · 툴라 지방에서 물러났다.

 

반히틀러 연합이 결성된 것은 이 무렵이다. 소련의 반파시즘 연대제의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던 나라들이 호된 시련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파시즘의 잔혹성을 깨닫고 반파쇼 전선에 합류한 것이다. 1941년 말엽, 미 · 영 · 소 3국은 히틀러 독일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협약했다. 그해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이 일본,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반히틀러 연합은 더 단단해졌다. 1942년 1월 1일까지 23개국이 추가로 연합에 가입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마침내 체제를 떠나 모든 민족과 국가가 파시즘 세력에 맞서 싸우는 반파쇼 해방전쟁으로 변했다. 반파쇼 세력의 핵은 초지일관 파시즘 타도의 깃발을 든 소련이었고, 무기생산량이나 전선의 길이, 전투의 강도, 모든 면에서 소련은 비길 데가 없을 만큼 온몸을 내던져 파시스트 세력에 맞서고 있었다.

 

1942년에 접어들면서 북부와 중부전선이 교착상태로 빠져들자, 독일군은 주력부대를 남부로 투입했다. 1942년 여름, 파시스트 군대는 피로 피를 씻는 전투를 계속하여 볼가 연안의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까지 진출했다. 도시의 서쪽 절반이 포위되고, 2차대전 중 가장 격렬한 전투가 시작됐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이다.

 

11월 19일, 소련군의 주력부대가 도시의 북쪽과 남쪽에서 볼가 강을 건너, 도시의 서쪽을 포위하고 있던 적병들을 역포위했다. 포위부대의 박격포가 일제히 불을 뿜는 것을 시작으로 소련군의 대공세가 시작됐고, 22개 사단의 파시스트 군대가 후방부대와 고립된 채 괴멸당했다. 파시스트군은 볼가 인근의 전투에서 독소 전선에 투입된 병력의 약 1/4인 150만을 잃고 후퇴했다. 이를 기점으로 전쟁의 주도권이 소련으로 넘어갔다.

 

치열했던 카프카스 지역의 전투도 8개월간의 사투 끝에 마침내 독일군이 물러나면서 종식됐다. 1943년 봄, 남부방면 전투의 주된 전장은 드네프르 강 동안으로 옮겨갔고, 북부에서는 1943년 1월 레닌그라드의 포위망이 풀렸다.

 

1943년 여름, 독일군은 교착상태의 중부전선 쿠르스크 근교에서 강력한 공격을 시도했다. 파시스트 사령부는 북쪽의 오룔과 남쪽의 하리코프 방면에서 동시에 쿠르스크를 급습하여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고 모스크바 방면으로 공격을 확대하고자 했다. 독소 전선 파시스트 군대의 1/3 이상이 이 전투에 투입됐다. 최전방에는 최신예 중전차 부대와 자주포 부대가 포진했다.

 

7월 5일, 전투가 시작됐다. 모든 전선에서 엄청난 포화가 쏟아져 한밤중도 대낮 같았다. 독일군은 큰 희생을 치르며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35㎞까지 전진했다. 그러나 쿠르스크는 좀처럼 무너질 줄을 몰랐다. 이때 소련군 사령부에서 쿠르스크에 1,200여 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투입했다. 7월 12일, 대전 최대의 전차전이 벌어짐과 동시에, 소련군이 남북 양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8월 5일,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고, 파시스트 군대는 30개 사단이 박살 나면서 50여 만의 병사를 잃었다.

 

이후 소련군은 맹렬한 반격을 펼쳐 전선을 계속 서쪽으로 몰고 갔다. 대조국전쟁과 2차대전의 기류가 급선회했다.

 

정규군과 함께 유격대(파르티잔)도 큰 활약을 했다. 독일 파시스트 군대에 점령당한 지역에서는 개전 초부터 유격대가 조직됐고, 1942년에는 유격대 군단까지 등장했다. 유격대 군단은 소련군 사령부와 긴밀하게 연락하며 전투를 벌였다. 쿠르스크 전투가 치열할 때에는 독일군의 철도수송을 방해하는 '레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70개 부대, 총 10만여 명의 유격대가 '레일 전쟁'에 가담했다.

 

개전 후 2년 동안 유격대는 3,000량 이상의 파시스트 군용열차를 전복시키고 800개소 이상의 무기탄약고를 폭파했다. 해방 직전에는 점령군의 후방에서 35만 이상의 무장 유격대가 활동했고, 정규군이 파시스트 군대를 쫓아내기 전에 이미 많은 지역이 유격대에 의해 해방됐다.

 

후방에서의 인민들의 희생적인 활동도 전쟁의 반전에 큰 역할을 했다. 1941~1942년 소련군이 후퇴할 때 대규모의 공업시설 소개 작업이 행해졌다. 2,500여 개 기업이 전선 인접지역에서 동쪽 지방으로 이전됐다. 그중 절반은 1942년부터 재가동에 들어갔고, 갈수록 소련군에게 최신병기를 대량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전황은 점점 파시스트 세력에게 불리해져 갔다. 1943년 중엽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연합국에 점령당했고, 1944년에 접어들면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졌다. 모든 전선에서 강력한 추격작전이 전개됐다. 소련이 거의 전 국토를 해방해가던 1944년 6월, 미 · 영 연합군이 도버 해협을 건너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소련이 다른 연합국에 집요하게 요구해온 서유럽의 제2전선이 이제야 개설된 것이다. 연합국은 모든 방면에서 히틀러 독일을 죄어들어갔다.

 

1944년 가을, 소련 영토를 완전히 해방시킨 소련군은 이제 동유럽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동유럽 인민들은 그에 앞서 이미 자력으로 파시스트 군대들을 물리쳐가고 있었다. 소련군은 가는 곳마다 해방군으로 환영을 받았고, 히틀러 편에 가담했던 루마니아 · 핀란드 · 불가리아 · 헝가리가 이제 거꾸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945년 4월 중순, 독소 전쟁의 최후를 장식하는 전투가 시작됐다. 독일 파시스트 사령부는 베를린에 강력한 방어망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주코프 등 3명의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 3개 방면군의 합동공격이 시작됐다. 포병대의 통렬한 준비사격이 끝난 후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밤을 대낮처럼 밝힌 가운데 전차부대가 적진으로 돌진했다. 4월 25일, 베를린의 독일군 40만 명이 완전 포위됐다.

 

독일 파시스트 사령부는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거절했다. 베를린 총공격이 시작됐다. 4월 30일, 마침내 독일 국회의사당에 승리의 진홍빛 적기가 꽂혔다. 히틀러는 자살했고, 5월 2일 베를린 수비대가 항복했다. 5월 8일, 파시스트 독일은 베를린 근교에서 무조건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이로써 4년간의 독소 전쟁은 소련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세계지배를 꿈꾸던 히틀러의 야망이 소련군과 소련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으로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