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평화를 사랑하는 자는 반파쇼 깃발 아래로

구름위 2014. 9. 16.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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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발발(1939년)

 

 

'적을 무자비하게 쳐부수자'는 이 포스터는 독일에 침공당한 스탈린의 격분을 잘 나타낸다.   

 

1930년대 말, 세계는 또 한 차례의 전면전을 향해 치달아갔다. 이번에도 문제의 핵은 독일이었다. 서유럽 열강과 미국은 패전독일의 사회주의화를 막고 독일을 소련에 대한 방파제로 삼고자 독일 경제의 부흥을 도왔다. 그러나 잿더미 위에서 경제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고, 과중한 전쟁 배상금도 독일의 국민경제를 크게 압박했다. 독일의 노동자 계급은 분열하여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도권을 자본가들에게 넘겨주었고, 독일의 자본가들은 반공과 독일제국 재건의 기치를 내걸고 노동자 탄압정책을 가속화했다.

 

1929년 말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파고는 독일에도 거세게 밀어닥쳤다. 산업생산이 절반으로 줄었고 거리마다 실업자가 들끓었다. 그 틈을 뚫고 히틀러와 파시스트 정당 나치가 크게 부상했다. 나치는 자본가들 중에서도 가장 반동적이고 국수주의적이며 호전적인 세력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러나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선전 전략이 주효하여, 사회안정을 바라는 중산층과 농민들 사이에서도 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1932년 나치는 의회 내 제1당으로 올라섰고, 1934년에는 히틀러가 대통령과 수상을 겸하는 총통 지위에 올랐다.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맨 먼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괴멸시키고 유태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증폭시켰다. 그와 동시에, 1차대전의 패전을 앙갚음하자고 국민들을 부추기며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군비제한 규정의 무효를 선언하고 군수산업을 크게 육성했으며, 국민개병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방위군을 육성했다.

 

1935년에는 국제연맹 관리하에 있던 자르 지역을 합병하고 군비강화 4개년계획을 발표하면서 침략정책을 노골화했다.

 

독일과 함께 이탈리아에서도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즘 세력이 극성을 부렸다.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공, 정복했고, 에스파냐 내전에서 독일과 함께 프랑코 휘하의 극우세력을 지원하여 파시스트 독재정권을 탄생시켰다. 오스트리아 · 헝가리 · 루마니아 · 불가리아 · 핀란드에서도 파시스트의 힘이 점점 커졌다. 동방에서는 호전적인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에 이어 중국을 넘보면서 침략의 마수를 뻗어갔다.

 

'이 떨어지는 칼을 들어 반파시스트 전선을 강화하자'

 

독일 · 이탈리아 · 일본을 중심으로 1936년경 '파시스트 블록'이 형성됐고, 뒤에 몇 나라가 더 가담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맺은 동맹조약 '베를린 로마 축'에서 이름을 따, 이들 나라를 추축국이라고 한다. 주로 후발 자본주의국으로서 원료 및 상품시장의 부족을 느끼고 있던 추축국들은 1차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세계의 재분할을 추구했다. 그 방법은 무장담판이었다.

 

반파시즘의 선봉에 선 것은 소련과 각국의 공산당이었다. 1935년 각국 공산주의자들의 국제연대모임인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는 파시즘의 대두에 큰 우려를 표하며 '반파쇼 인민전선'을 제창했다. 각국의 모든 노동자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세력이 하나로 힘을 모아 파시즘 세력을 분쇄하자는 것이었다. 나라마다 양태는 달랐지만, 반파쇼 민주세력의 연대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영국 · 프랑스 · 미국 그밖의 부르주아지 정부들은 파시즘 세력과 소련 주도하의 반파쇼 운동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들은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깨뜨리며 노골적으로 침략성을 드러내는 것을 두 눈 멀뚱히 뜨고 쳐다보기만 했다. '불간섭 평화정책'이라는 미명하에 제국주의 서유럽 열강은 독일의 침략정책을 용인하면서 독일의 팽창방향이 사회주의 소련 쪽으로 향하도록 유도했다.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서 비무장 지역으로 지정된 라인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킨 뒤에, 주변국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갔다. 1938년에는 군사력으로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지역을 무력 점령했다. 소련의 제재조치 제안에도 불구하고 주변 열강은 히틀러 독일의 점령을 용인했다. 힘을 얻은 히틀러는 1939년 초 체코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했고, 리투아니아의 영토 일부도 빼앗았다.

 

전쟁 위험이 고조되자, 소련은 모든 유럽 국가에게 체제를 불문하고 힘을 합쳐 독일의 팽창에 맞서자고 제안했다. 집단안전보장 체제의 구축을 촉구한 것이다. 여론의 압력에 프랑스와 영국정부는 협상 테이블에 나왔으나, 반파시즘보다는 반공의식이 더 뿌리 깊은 영 · 불 지도자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협상은 무산됐다.

 

협상이 결렬된 후 소련정부는 1939년 8월, 독일의 제의를 받아들여 독소 불가침협정을 체결했다. 전쟁이 눈앞에 다가온 시점에서 일단 독일의 침략을 막아둘 장치가 필요했던 소련과 2개 방면 전선을 피하려는 독일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1939년 9월 1일, 세계를 지배하려는 히틀러의 야망이 불을 뿜었다. 파시스트 독일의 막강 군대가 폴란드 국경을 넘으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폴란드와의 조약에 따라 영국과 프랑스 정부가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영 · 불 정부는 전쟁을 선언해놓고도 독일과의 타협을 추구하면서 독일의 포화를 소련 쪽으로 유도하는 데 더 관심을 쏟았다. 독일의 서부국경이 평온을 유지하는 가운데 폴란드는 온 힘을 다해 파시스트 독일에 저항했으나, 한 달도 못돼 국토와 국민의 태반이 파시스트 군대의 발굽 아래 유린당했다. 9월 17일, 소련은 이에 맞서 폴란드 동부의 옛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영토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위기가 고조돼가는 가운데, 소련정부는 레닌그라드를 보호하기 위해 핀란드에 상호원조조약 체결, 핀란드령 카렐리아 지협과 소련령 카렐리아 영토의 일시 교환을 제안했다. 독일측에 더 가까웠던 핀란드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11월, 소련군이 핀란드 국경을 넘었다. 1940년 3월 조약이 체결되고, 소련 국경이 레닌그라드 서쪽으로 150㎞ 이동했다.

 

1940년 여름에는 에스토니아 ·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 3국의 인민이 소련의 직접 간접 지원하에 파시스트 성향의 정부를 타도하고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했다. 같은 무렵, 베사라비야와 북부코비나도 몰도바 공화국을 세우고 연방에 가입했다. 이로써 소련의 연방구성 공화국은 11개에서 15개로 늘어났다.

 

한편, 히틀러는 서유럽 열강의 화해 제스처를 비웃으며 동쪽에서 북쪽과 남쪽 ·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먼저 유럽대륙의 중서부를 모두 장악한 후 소련을 공략한다는 것이 파시스트 독일의 전략이었던 것이다. 소련을 견제하고자 독일과의 화해정책을 추구한 유럽 국가들은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40년 4월부터 두 달 사이에 덴마크와 노르웨이,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가 히틀러의 수중에 떨어졌다. 친독정책을 취하던 헝가리 · 루마니아 · 불가리아는 스스로 독일 편에 가담했다. 독일의 전격전은 모든 전장에서 큰 수확을 거두었다.

 

5월, 독일은 마침내 서부국경을 넘었다. 네덜란드가 5일 만에, 벨기에가 2주 만에 백기를 들었다. 독일군은 마지노 선을 넘어 프랑스로 밀고 들어왔다. 6월 14일 파리가 함락되고 프랑스 전역이 독일에 점령당했다. 8월에는 영국 런던이 독일공군의 폭격을 당했다.

 

6월 10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독일측에 가담하여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북아프리카 전투가 시작됐다. 9월에는 독일 · 이탈리아 · 일본 사이에 3국동맹이 맺어졌다.

 

독일은 점령국에 파시스트 체제를 이식시켜 반파쇼 세력을 가혹하게 탄압, 학살했고, 몇몇 나라에는 '협력정부'를 세웠다. 점령지의 산업시설이 군비확장에 활용됐고, 수백만 명이 독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종사했다. 중서부 유럽을 장악한 독일은 다시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190개 사단이 일제히 포화를 터뜨리며 소련의 서부국경을 넘었다. 기습당한 소련군은 독일군의 맹위에 눌려 연일 후퇴를 거듭했다. 6개월 만에 레닌그라드, 모스크바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유럽 러시아의 절반이 히틀러의 수중에 떨어졌다.

 

조국이 위기에 처하면서 러시아의 전통적인 민족정신이 되살아났다. 조국을 지켜내자는 목소리가 전국에 메아리치면서 소련인들이 앞다투어 전선 출정을 지원했다. 러시아에서는 19세기 초의 나폴레옹 전쟁을 '조국전쟁', 제2차 세계대전, 좁게는 2차대전 때의 독소전쟁을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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