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사회주의 건설과 소련 헌법

구름위 2014. 9. 16.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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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헌법 제정(1936년)

 

1941년 독소 개전으로 중단될 때까지 연이어 시행된 1, 2, 3차 5개년계획은 소련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자본주의 선진국들에서 공황과 그 여파로 산업성장이 부진을 면치 못하거나 오히려 후퇴하고 있을 때, 소련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매년 12% 이상의 성장을 이룩한 것이다. 소비재가 부족하고 농업이 진통을 겪는 등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도 했으나, 전력생산이나 중공업 같은 부문에서 소련은 겨우 10여 년 만에 미국 · 영국 · 독일 등의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됐다. 2차대전이 시작될 무렵, 소련의 공업 총생산고는 1차대전 직전인 1913년에 비해 7배로 성장했고, 세계적으로도 미국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그와 함께 소련의 사회구성도 크게 달라졌다. 봉건제하의 지주계급이나 자본제하의 부르주아지 계급과 다양한 중간계급이 사라지고, 노동자와 농민의 우호적인 두 계급, 그리고 이들과 이해를 공유하는 소련 인텔리겐치아로 구성된 사회가 등장했다. 소비에트 연방에 가입한 여러 민족 간의 차별도 사라지고 모든 민족이 평등한 상태에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나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여, 1936년 12월 5일 전 연방 소비에트 제8차 대회는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헌법을 채택했다. 새 헌법은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확실히 승리했음을 선언하고 소련을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라고 규정했다. 소비에트 국가의 경제적 토대는 사회주의 경영제도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였고, 정치적 토대는 지주와 자본가의 권력이 타도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확립되면서 성장, 강화돼온 근로자대표 소비에트였다.

 

1936년 헌법은 초창기의 소련 헌법이 혁명수호를 위해 취하고 있던 소비에트 선거에서의 각종 제한조치를 철폐하고 모든 선거에서 보통 · 평등 · 직접선거와 비밀투표를 도입했다. 정신병자와 재판으로 선거권을 잃은 자를 제외한 18세 이상의 모든 국민이 성별 · 인종 · 민족 · 신앙 · 학력 · 거주기한 · 출신성분 · 재산 · 지위 · 과거경력에 상관없이 모두 동등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게 됐다.

 

국가의 최고권력기관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2개의 소비에트(연방 소비에트와 민족 소비에트)로 구성된 소비에트 연방최고회의로 규정됐다. 최고회의 휴회 중에는 최고회의가 선출한 간부회가 활동했다. 집행권은 최고회의가 조직한 인민위원회에 위임됐다.

 

헌법은 모든 국민들에게 당시 서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폭넓은 시민권을 부여했다. 일할 권리, 늙거나 병들거나 다쳤을 때 보호받을 권리, 근로시간 규정과 공공시설을 이용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권리, 교육받고 자유롭게 말할 권리, 언론 · 출판 · 집회 · 양심의 자유, 신체와 가정과 통신의 불가침성, 완전한 남녀평등 등을 명시하여 소련시민의 권리를 크게 확대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시민에게는 법을 준수하고, 노동규율을 지키며, 공공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사회주의 사회의 규칙을 준수하며, 사회주의 재산을 보호하고, 사회주의 조국을 방위할 의무가 부여됐다. 사회주의 재산을 손상하는 자는 '인민의 적'으로 규정됐고, 반역은 가장 가증스러운 죄악으로 명시됐다.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 국가체제도 조금 달라졌다. 카자흐와 키르기스 자치공화국이 연방구성 공화국으로 개편됐다. 역사적 사명을 다한 자카프카스 연방은 폐지되고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가 연방구성 공화국이 됐다. 이로써 소련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11개 공화국으로 구성됐다. 1936년 헌법은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받았다. 헌법의 진보적인 시민권 규정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성과, 높이 치켜든 반파시즘 깃발, 문맹을 거의 타파한 문화혁명과 더불어 서유럽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영국의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웨브 부부는 당시 소련사회를 두고 '새로운 문명의 탄생'이라고 말했다.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의 첫 선거는 1937년 12월 12일에 행해졌다. 선거에서는 공산당원 및 공산당과 연계한 비당원의 블록이 98.6%의 지지를 얻어 전원 당선됐다.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에는 칼리닌이 선출됐다. 1938년 메이데이 축제의 외국 노동자환영 리셉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는 동화 속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근로국가입니다. 이 국가는 찢어지게 가난한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마 잘못된 것도 많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너그럽게 봅니다. 아마 우리는 필요치 않은 것도 했을지 모릅니다. 나는 그것을 너그럽게 봅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곳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가 건설되고 있다는 것만은 꼭 말해두고 싶습니다."


그러나 칼리닌이 부드럽게 인정했듯이, 1930년대의 소련은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많은 잘못을 범했다. 개중에는 결코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것도 있었고, 그것은 나아가 사회주의의 왜곡으로까지 발전했다. 당으로의 지나친 권력집중과 행정 · 명령형 경제체제의 고착, 당과 국가기관의 관료화는 민주주의와는 명백히 거리가 있는 결과들을 낳았다. 1930년대 후반, 소련에서는 반대자들을 용납하는 폭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갔고, 그 결과 많은 반대자와 잠재적인 반대세력이 사형 · 구금 · 추방 집단수용되는 참화가 일어났다.

 

 

'스탈린 동지의 말은 옳다'

 

대숙청과 개인숭배(1936년 ~ 1938년)

 

역사상 스탈린만큼 양극단의 평가를 받은 사람도 드물다. 스탈린은 단기간 내에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완수하여 소련을 선진국 대열에 끌어올린 위대한 건설자인 동시에, 모든 경쟁자들을 냉혹하게 제거하고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전제자였다.

 

1920년대 말 소련의 최고지도자 지위를 굳힌 스탈린은 왕성한 추진력으로 소련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실천했다. 10년도 채 못돼 소련은 봉건제와 자본제의 유산을 청산하고 사회주의적 재편을 완료했다. 레닌이 한 세대, 어쩌면 두 세대가 걸릴지도 모른다고 한 과업을 스탈린은 불과 10년 사이에 해낸 것이다. 스탈린의 '개조'는 대다수 소련인에게 1917년의 두 차례 혁명보다 더 큰 변화를 안겨주었다.

 

당시 스탈린은 혁명 러시아가 채 요람에서 나오기도 전에 국내외의 반혁명 세력에게 교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깊이 사로잡혀 있었다. 자본주의의 위협으로부터 혁명 러시아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공업을 발전시켜 그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힘을 한 방향, 한 곳으로 모아야만 했다. 당연히 반대자들은 제거되어 다른 목소리를 내지 말아야 했고, 정책을 따르지 않는 국민들은 격리돼야 했다.

 

1920년대 중엽 이후 반대자들이 하나 둘 당의 의사결정기구에서 밀려났다. 스탈린이 당을 확고히 장악한 가운데 분파를 금지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1932~1933년 류틴과 스미르노프가 밀려나면서 당내 반대 그룹은 완전히 사라졌다.

 

1930년대 전반, 급속한 농업 집단화의 파장으로 농업생산이 격감하고 대기근이 일어나며 부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이 격한 저항을 보이는 등, 정치 사회적 위기가 심화됐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때 한 사건이 일어났다. 1934년 12월, 당원과 대중들의 신뢰를 받으며 차세대 지도자로 떠오르던 키로프가 좌파 성향의 청년당원에게 암살된 것이다. 스탈린이 직접 사건심리에 개입했다. 암살자와 공범들은 지노비예프-카메네프 그룹의 일원으로서 요인암살 목적의 '레닌그라드 센터'를 조직하고 암살을 실행한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이어 레닌그라드의 내무인민위원들과 이전에 체포된 '반혁명' 인사들이 테러 예비 음모 및 실행 혐의로 전격 처형됐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체포됐다.

 

키로프 암살사건은 1936~1938년 '대숙청'의 서막이었다. 숙청이란 본디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당에 부적합한 인물을 당에서 제명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대숙청'은 당으로부터의 축출에 그치지 않고 사형, 구금, 집단수용까지 동반하여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숙청'을 직접 관장한 기관은 1918년에 만들어진 체카(반혁명 · 사보타지 · 투기 단속 비상위원회)의 후신인 국가보위부(GPU, OGPU)가 1934년 7월에 확대 개편된 내무인민위원회(NKVD)였다. 내무인민위원회는 국가보위 및 경찰기능을 통합하여 총괄지휘하고 있었다.

 

1936년 8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미르노프 등 16인이 당시 해외에 망명해 있던 트로츠키와 연계하여 비밀 테러집단을 조직, 키로프를 암살하고 다른 지도자들의 암살을 예비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공개재판에 회부됐다. 이른바 '트로츠키 · 지노비예프 합동본부사건'에 대한 제1차 모스크바 재판이었다. 피고들은 검사가 작성한 자신의 범죄사실을 모두 인정한 후 총살당했다.

 

1936년 9월 그때까지 숙청을 주도해온 내무인민위원 야고다가 실각하고 예조프가 후임자로 취임했다. 그때부터 예조프가 세를 잃을 때까지 약 2년 동안 숙청이 절정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숙청의 대상이 되어 사라졌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옛 반대파들에 대한 2차, 3차 모스크바 재판이었다. 1937년 1월에 열린 '17인 재판'의 희생자는 옛 트로츠키 지지자들이었다. 이들은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센터'를 조직, 자본주의의 부활을 기도하고 독일 · 일본과 협력하여 소련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므랄로프와 퍄타코프 등 13명이 사형, 라데크와 소콜니코프는 10년형을 받았다.

 

1938년 3월의 '우파 및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반소비에트 블록'에 대한 '21인 재판'에서는 옛 우파 지도자들이 스파이 혐의와 요인암살기도 혐의로 기소됐다. 부하린과 리코프 등의 옛 우파 거두와 전 내무인민위원 야고다 등 18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거세게 일기 시작한 '대숙청'의 파고는 옛 반대자들의 체포와 처형에 그치지 않았다. 당 조직과 정부기관 · 군부가 곧 '대숙청'의 물결에 휩쓸렸다. '대숙청'은 반대세력의 근절에 그치지 않고 스탈린 지지세력까지도 상당 부분 갉아먹었다. 스탈린의 방침에 한번이라도 반대한 적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숙청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 적잖이 희생됐다.

 

당과 정부와 군부에 이어, 지방기관, 청년동맹, 노동조합, 농민, 기업, 코민테른, 학계, 문화계로까지 숙청의 물결이 확산됐다. 처형 · 수감 · 강제수용된 사람이 수십만에 이르렀고, 감옥과 수용소가 숙청의 희생자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대숙청'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자 스탈린은 정책을 재고했다. 1938년 1월 당 중앙위는 일부 당조직의 '실수'와 관료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수용소 내의 여건과 수사방식이 개선되고, 일부 수감자가 석방, 복직됐다.

 

1938년 7월 베리야가 부내무인민위원으로 취임하면서 예조프는 실세했다. 이어 숙청자를 숙청하는 '숙청' 3단계가 시작됐다. 많은 내무인민위원회 간부와 수사관이 무고한 인민으로부터 허위자백을 받아냈다는 혐의로 체포됐다. 이어 예조프와 그 측근들이 해임, 체포되면서 숙청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숙청'은 공권력을 폭력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스탈린 체제를, 스탈린 자신이 파시스트 도당이라고 맹비난한 히틀러 체제와 함께 전체주의 체제로 규정하는 빌미가 됐다. 당시 공황에 허덕이던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상대적으로 잘나가고 있던 소련을 비난할 구실을 찾고, 또 당시 소련을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서방세계의 지식인과 노동자들의 시선을 사회주의로부터 떼어낼 빌미를 찾고 있던 서방측 정보원과 선전가들에게 '대숙청'은 더없는 호재였다.

 

그럼에도 '대숙청'은 어쩔 수 없이 소련사회에 공포와 경계심을 만연시켰다. 사기저하로 인해 경제성장도 다소 둔화됐다. 군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은 또한 노련한 군 지휘체계의 마비를 가져와 독소 전쟁 초 소련군 패주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한편 스탈린은 '대숙청'을 통해 엘리트의 순환을 가속시킴으로써, 새로운 청년 엘리트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당과 정부에 더욱 막강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스탈린이 죽은 뒤, 1956년의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대숙청'이 무리하게 집행됐음을 폭로했다. 1980년대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대숙청'의 실상이 드러났다. 이를 통해 숙청에 일부 무리한 부분이 있기는 했으나, 수백만 또는 일천만 이상의 희생자가 났다는 서방측의 주장은 허황된 날조였음이 확인되었다. 1939년 당시 노동수용소와 이주지, 구치소에 수용된 인원은 900만 또는 1,200만이 아니라 약 200만 명이었고 그중 정치범은 45만여 명이었다. 그리고 1937년에서 1939년 사이에 노동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은 300만이 아니라 16만 명이었으며, 그 기간에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수백만이 아니라 약 10만 명이었다.

 

그러나 숙청된 이의 수와 상관없이 '대숙청'의 물결은 소련 사회의 분위기를 바꾸어놓았다. 많은 고참 혁명가가 처형 또는 추방된 뒤, 소련의 치안기관과 이데올로기 기관은 스탈린의 일원적 지배체제를 구축해갔다. 지도자에 대한 대중들의 무조건적인 지지가 높아지면서 종교에서와 같은 지도자 숭배 풍조가 생겨났다. 스탈린 개인의 권위가 조직이나 공적 기관보다도 우위에 서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국민의 위대한 승리는 모두 그의 이름과 결부 지어졌다. 레닌의 무오류성과 함께 스탈린의 무오류성에 대한 찬양이 생겨났다. 스탈린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대숙청'은 혁명의 수호를 위해서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의 본질을 침범하며 억압적인 분위기를 빚어냈다. '대숙청'과 개인숭배는 사회주의 이념을 왜곡시켰고, 소련과 소련인들에게 큰 손실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사회주의 체제의 본질이 바뀌거나 전진 자체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서도 인민대중의 헌신적 노동이 성과를 거두어 생활은 점점 향상됐으며, 도시와 촌락도 새 모습으로 정비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