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러시아 이야기

'대전환의 해'

구름위 2014. 9. 16.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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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와 5개년계획 착수(1928년 ~ 1929년)

 

                   신경제정책 포스터
                        1차 5개년계획은 1928년에 시작되어 예정보다 1년 빠른

                        1932년에 끝났다. 이 포스터의 표어는 'NEP 러시아는 사

                        회주의 러시아가 될 것'이다.
 
경제정책을 통해 생산력을 회복한 소련의 다음 과제는 공업화였다. 아직도 농업국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당시 상황에서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도 공업화는 반드시 필요했고, 자본주의에 포위된 상태에서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도 공업생산력의 증대는 필수적이었다. 문제는 공업화에 필요한 재원을 어디서 확보할 것인가, 공업화의 속도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였다. 이를 두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으나, 공업화가 이제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라는 데에는 넓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1925년 12월의 제14차 당대회는 공업화를 당의 일반노선으로 선언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기계와 설비의 수입국에서 그것을 자체생산하는 국가로 변화시키는 것을 주요과제로 공식화했다. 공업화의 재원은 농촌에서 점진적으로 축적되는 부, 국유화된 공업과 교통, 외국무역에서 나오는 이윤 등으로 상정됐다. 인민대중의 절약과 검약, 욕구 규제도 강조됐다. 혁명과 내전을 승리로 이끈 대중들에게 공업화가 다음 목표로 제시됐고, 대중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윽고 '5개년계획'으로 공업화의 방향이 정해졌다. 1927년 12월의 제15차 당대회에서 제1차 5개년계획의 지침이 마련됐다. 지침은 평등의 원칙하에 축적과 소비, 공업과 농업, 생산재와 소비재 사이의 균형을 지키며 공업화를 추진할 것을 분명히 했다. '단기간에 최대한의 축적 속도를 올리기보다는 국민경제 각 부분의 상관관계에 기반을 두고 장기적인 고도성장을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1927년 전반기까지만 해도 소련경제는 균형성장 속의 공업화 계획에 청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부농과 네프만의 폐단이 나타나기는 했어도, 공업과 농업 생산력이 모두 전쟁 전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분명히 신경제정책의 발전선상에서 공업화를 추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가을이 되고 해를 넘기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농업생산이 감소하고 농촌의 소비재 부족현상이 심화되면서, 부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이 곡물수매에 저항하고 나서 노동자와 도시민들에 대한 식량공급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대중들 사이에 부농에 대한 비판이 높아갔다. 1928년 1월 당 정치국은 비상조치를 내렸다. 농민의 각종 지불금을 기한 전에 징수한다는 조치가 내려졌고, 수매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한 요원에게는 벌금을 부과한다는 명령이 하달됐다. 곡물 징발의 화살은 부농(쿨라크)뿐만 아니라 중농에게까지 미쳤다.

 

국제판세도 불안했다. 코민테른을 통한 중국혁명 원조정책이 장개석의 쿠데타와 혁명 탄압으로 실패했다. 영국은 대소 단교조치를 취했다. 고립감과 전쟁에 대한 공포가 고조돼갔다.

 

스탈린은 1928년 마침내 신경제정책을 포기하고 이전 좌익 반대파의 공업화 이론을 대폭 수용하여 농업 집단화를 동반한 강력한 공업화 정책을 채택했다. 공업화의 주된 재원은 농산물을 시장가격 이하로 수매하는 데서 얻어졌다. 부하린을 중심으로 한 우파는 이에 반발하여, 급속한 공업화 정책이 농민에게 주는 압력을 거론하면서 농업발전을 토대로 한 공업화 정책을 관철시키려 했으나, 이미 대세는 결정돼 있었다.

 

이윽고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에서 1928년 10월 1일을 기점으로 하는 제1차 5개년계획을 수립했고, 1929년 5월에 열린 제5차 연방소비에트 대회는 이 안을 사후 승인했다. 5년 동안에 공업생산을 180% 성장시키자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5년 내내 연평균 공업 성장률이 20%를 상회해야 했다. 공업 중에서도 중공업의 발전에 우선을 두어 기간 내 총투자액의 80% 이상이 기계설비를 중심으로 한 중공업 부문에 투자됐다.

 

1929년 11월 스탈린은 〈대전환의 해〉라는 제목의 혁명기념 논문에서 공업화의 청사진을 펼쳐보이며 대단한 의지를 과시했다. 그 결론 부분을 잠깐 보자.

 

"우리는 길고도 길었던 러시아의 후진성을 뒤로 하고 전속력으로 사회주의적 공업화의 길로 매진하고 있다. 우리는 금속의 나라, 자동차의 나라, 트랙터의 나라가 돼가고 있다.

 

우리가 소비에트 연방을 자동차에, 농민을 트랙터에 앉히게 될 때, 그때에는 지금 저들의 '문명'을 내세워 우쭐하고 있는 자본주의자들이 오히려 우리를 추월하려고 힘쓰게 될 것이다. 그때에 어느 나라가 후진국이고 어느 나라가 선진국인지 다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선진국보다 50~100년 뒤져 있다. 우리는 이 현격한 차이를 10년 내에 좁혀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이루거나 저들이 우리를 압도하거나, 둘 중 하나다."


계획 1년 차에 공업성장이 호조를 보이면서 5개년계획을 4년 만에 달성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후 경제연도가 변경되어 1차 5개년계획 기간이 1932년 말까지 4년 3개월간으로 조정됐다.

 

계획기간 중 1,500개 이상의 새 공장이 건설됐고, 우랄 지방의 마그니토고르스크와 서시베리아의 쿠즈네츠크에 거대한 공업단지가 조성됐다. 강력한 우랄 쿠즈바스 콤비나트에서만 1913년에 러시아의 모든 용광로가 산출해내던 것과 같은 양의 금속을 공급했다. 화학 · 자동차 · 트랙터 · 공작기계 · 항공 · 조선 · 전기 같은 산업분야가 국민경제의 중요부문으로 새롭게 등장했다. 황폐했던 전국의 도시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새로운 도시도 많이 건설됐다.

 

제1차 5개년계획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3년에 발표된 당국의 통계에 따르면, 4년 3개월 동안에 공업부문은 5년 목표의 93.7%를 달성했다. 중공업 부문은 목표를 초과달성해 목표치의 103.4%에 이르렀고, 경공업 부문은 목표의 84.9%에 달했으며, 산업 성장률이 연평균 20%를 기록했다. 통계수치의 과장을 감안하여 대폭 낮춰 잡은 서방측의 추정으로도 연평균 12~14%의 경이적인 성장을 한 것으로 평가됐다.

 

또한 계획기간 중 1920년에 수립된 '러시아 전기화' 계획이 거의 실현됐다. 거대한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등 30개 발전소가 건설되어, 1932년 현재 발전량이 460만㎾에 달했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뉴욕 증권시장의 주가 대폭락 이후 대공황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서방세계는 소련경제의 놀라운 성과를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1920년대 말, '5개년계획'이라는 말은 세계적인 유행어가 됐다.

 

이어 1933년부터 시작된 제2차 5개년계획, 1938년부터 시작된 제3차 5개년계획이 실행에 옮겨지면서, 소련은 총생산 규모로 유럽 제일의 공업국, 세계적으로도 미국에 이어 2위의 공업국으로 발전했다. 농촌에서도 집단화를 완성하여 사회주의적 농업의 토대를 다졌고, 시베리아의 방대한 처녀지가 소련 경제권에 편입됐다. 문화혁명도 성공하여 문맹자가 거의 없어지고 노동력의 질이 크게 향상됐다.

 

그와 더불어 적지 않은 부작용도 노출됐다. 중공업 우선의 불균형성장은 상대적으로 소비재 공업의 부진을 가져와 소비재 부족현상을 만성화시켰다. 무리한 농업 집단화, 지나친 대 쿨라크 투쟁, 농업의 희생을 토대로 한 공업화로 인해, 1930년대 초반에 대기근이 일어나 많은 농민이 목숨을 잃었고, 식량생산 부진 등 소련농업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야기됐다. 또, 과도한 중앙집중화와 계획화는 국가 전체를 준 전시동원체제로 몰아갔고 관료주의와 행정 · 명령체제의 폐단을 파생시켰다.

 

그러나 소련은 5개년계획으로 외국자본의 도움 없이 국내자본만으로 농업국에서 거대한 공업국가로 변모하는 데 성공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군수산업도 크게 발전하여 군사적으로도 강대국의 대열에 올라섰다. 국제사회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이전의 러시아 제국을 훨씬 능가할 만큼 커졌고,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새로운 발전 모델로서 소련의 계획경제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소련에서 확립된 새로운 사회질서, 사회주의 체제는 당시 공황으로 반신불수가 돼 있던 선진 자본주의국의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고, 후진국과 갓 독립한 신생국, 독립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식민지 민중들에게는 희망의 횃불로 다가왔다.

 

집단화의 명과 암

 

전면적 농업 집단화 착수(1929년)

 

 

 

소련 농촌에 최초로 등장한 트랙터
농업집단화를 촉진하기 위해 기계화가 병행되었다.
 
농업문제는 소련의 아킬레스 건이라고 할 만큼 줄곧 지도자들을 괴롭혀왔다. 소련이 붕괴할 즈음 농업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 끝에 다각도의 대책이 강구됐으나, 사회주의의 둑이 무너지면서 그러한 노력들은 일거에 무산됐고, 소련이 붕괴하고 난 지금 식량 부족은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돼 있다.

 

소련의 농업문제는 유통문제, 생산조직의 문제 등 다양하지만, 그 핵심은 항상 주요 농산물의 절대량 부족이었다. 영토의 대부분이 농사짓기에 곤란한 혹한대나 사막 · 반사막 지대라는 기후조건이 소련의 농업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조건이 농업을 영원한 골칫거리로 만들 만큼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국토의 상당 부분이 세계에서 가장 비옥하다는 흑토대에 자리 잡고 있고, 발달한 기술로 불모지를 기름진 옥토로 바꾼 사례는 소련 내에서나 다른 나라에서나 많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농업의 상대적 경시였다. 급속한 공업화의 필요, 자본주의 세계와 맞서기 위한 군사력 강화의 필요에 농업은 항상 뒷전으로 밀려났고, 농업 위기가 닥칠 때마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임시 방편의 대증요법을 강구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 연원은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대에 소련은 눈부신 공업성장률을 기록하며 일약 세계 제2위의 공업국으로 떠오르지만, 그 이면에서 실시된 강력한 농업 집단화 정책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드러내면서 소련농업의 구조를 결정지었다.

 

공업화 정책이 본격 시행된 1927년 당시 소련 농가는 약 2,500만 호였고, 가족을 포함한 농민의 수는 1억을 약간 넘어 총인구의 약 70%에 달했다. 혁명으로 지주계급은 없어졌고, 농민의 대부분은 가족노동을 중심으로 소농 경작을 하고 있었다. 경지면적은 평균 잡아 호당 4~5㏊였고, 말 1필, 소 1~2마리를 가지고 육체노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부농과 일부 중농의 약 15% 농가만이 파종기, 곡물 선별기 · 탈곡기 등의 농기계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는 신경제정책이 한창 빛을 볼 때라, 부농들은 잉여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반면에 빈농은 부농의 토지를 소작하거나 부농에게 노동력을 팔았고, 부농에게 가축과 농기계를 빌려 자신의 좁은 토지나 소작지를 경작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소상품 생산방식의 농업을 어떻게 사회주의적 대공업과 조화시켜가면서 사회화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일찍이 레닌은 '협동조합을 통한 농업의 사회화'를 주창했고, 그것은 서서히 농민들 속에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1927년 현재 신용 · 판매 · 소비 · 생산 · 농촌 수공업 등 각종 농업협동조합의 적어도 한 가지에 절반 이상의 농민이 가입해 있었고, 이들 협동조합이 도시 농촌 간 상품교환의 2/3 이상을 담당했다. 그에 반해 혁명 직후에 잠시 진행됐던 집단농장화는 신경제정책의 시행으로 점차 퇴조하여 가입자가 전 농민의 1%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1927년 중엽 이후 중대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영국이 단교를 선언하고 코민테른의 정책이 실패하는 등, 국제관계에서 위기가 증폭됐다. 가을 들어서는 농업생산이 전년에 비해 오히려 줄어들고 공산품 가격이 비싸 농민들이 소비재를 구입하기 힘들게 되면서, 농민들이 시장가격 이하의 곡물수매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낙후한 기술수준, 경영규모의 영세성, 농민 내에서의 계급분화 등, 소농경영의 폐단이 심각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경제정책으로 잠시 유보됐던 농업 집단화 정책이 다시 강력하게 대두했다. 농업 집단화는 경영의 대규모화 · 기계화를 통해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농촌의 과잉인구를 도시의 공업 노동력으로 제공하며, 농업을 사회주의 계획경제 속에 편입시켜 국가통제를 통해 잉여 농산물을 흡수하고 공업원료를 확보할 수 있게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갔다.

 

위기상황에서 1927년 말, 급속한 공업화 정책과 농업 집단화 정책이 채택됐다. 농업정책 면에서 보면, 이것은 농민들에게 이윤동기를 부여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이면서 농업을 점진적으로 사회화해간다는 정책에서, 농산품을 공산품과 불평등 교환시킴으로써 농업부문을 희생시켜가며 급속한 공업화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려는 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1928년 초, 부농에 대한 곡물의 강제수매가 시작됐고, 그에 저항하는 사람에게는 호된 비판이 가해졌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부농만이 아니라 중농에게까지 강제수매가 행해졌다. 그와 더불어, 농업 집단화를 촉진하고자 집단농장에 기계와 기술을 제공하는 기계 · 트랙터스테이션(MTS)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농업의 점진적인 집단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1928년에 수립된 제1차 5개년계획은 5년 동안의 집단화 목표를 전농가의 20%로 상정하고, 대출과 세금 우대정책으로 농민들의 자발적인 호응을 유도키로 했다.

 

그런데 1929년에도 역시 농업생산이 감소하고 국가의 비상 비축식량이 동나면서 곡물 강제수매와 집단화 정책에 가속도가 붙었다. 스탈린이 직접 나서서 '농촌에서의 제2의 10월혁명'을 제창하며 '전면적 집단화'를 제기했다. 1929년의 이 '대전환'으로 소련 농촌에 유사 이래 최대의 혁명적 변화가 시작됐다. 소농경제가 종말을 고하고 사회주의적 집단농장으로의 재편이 시작된 것이다. 집단화 노선이 일단 공표되자 지방의 간부들이 중앙의 의도를 앞질러나갔다. 모두들 집단화 완료시기를 앞당기려고 발벗고 나섰다. '보다 많은 사람을!'이라는 슬로건은 '집단농장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은 소비에트 정부의 적'이라는 슬로건으로 변질됐다. 1929년 말에서 1930년 초까지 불과 석 달 만에 집단화율이 무려 58%에 이르렀다. 강제력에 의한 무리한 집단화는 농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30년 초 러시아 전역에서 2,000여 건의 반집단화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3월 초, 스탈린은 '엄청난 성공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라면서 강제에 의한 집단화를 비판하고 혜택 제공과 설득을 통한 집단화를 강조했다. 강제 편입된 농민들이 이탈하면서 집단화율은 곧 24%로 낮아졌다. 집단농장 이주 농민들에게는 세금 감면, 대출, 기계와 종자 대여의 특혜를 준다는 유인책이 제시됐다. 이후 농민들의 호응도가 높아져, 1931년 중엽에는 집단화율이 다시 53%로 올라섰다.

 

집단화와 병행하여 1930년 1월에는 농촌의 새로운 부르주아지 계급 쿨라크(부농)를 상대로 한 '대 쿨라크 투쟁'이 선포됐다. 집단화와 곡물수매에 적극 저항하는 쿨라크는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지방으로 추방하고, 그밖의 쿨라크는 지역 내 특별부락으로 분산 이전시키라는 훈령이 내려졌다. 곳곳에서 강제추방이 시작됐다. 지역별로 대상자가 3~5%를 넘지 않도록 엄격히 선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음에도, 곳에 따라서는 중농은 물론 집단화에 저항하는 빈농까지도 대상자에 포함됐다. 2년 동안에 38만 호가 추방되고 40~45만 호가 격리 이주됐으며, 그 후 5년 동안에 10여 만 호가 더 추방된 후 '대 쿨라크 투쟁'은 종결됐다. 전 농가의 4~5%에 해당하는 백만 호가 고향을 떠난 것이다. 추방당한 쿨라크의 재산은 몰수됐다.

 

급속한 집단화와 '대 쿨라크 투쟁'의 여파에 기후 불순이 겹쳐, 1931년부터 농업생산이 격감했다. 그 속에서도 국가와 도시민에게 필요한 곡물조달은 강행됐다. 그로 인해 1932~1933년에 심각한 기근이 전국 농촌을 휩쓸었다. 2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농업생산의 부진은 1934년까지 계속되다가 집단농장이 정상운영되기 시작한 1935년에야 회복세로 돌아섰다. 그 사이에도 집단화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1934년에는 집단화율이 71%를 기록했고, 1937년에는 집단농장 24만 3,700개소에 전 농가의 93%가 들어왔다.

 

이로써 농업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되고, 콜호스(집단농장)는 소프호스(국영농장)와 함께 상품 곡물의 대부분을 국가에 공급하게 됐다. 그와 더불어 농촌에서도 착취계급이 사라지고, 소련은 '계급 없는 사회'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많은 농민이 희생됐고, 집단농장의 자율성은 탈색됐다. 이후로도 농산물은 국가의 통제하에 시장가격에 휠씬 못 미치는 가격으로 공급되어 공업화를 뒷받침해주었다. 소련농업은 공업화의 찬란한 성과와 관계없이 진통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